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23)화 (225/319)

“으, 흐으…… 노, 놓아…….”

뒤통수를 찍어 누르는 듯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머리를 뒤흔드는 통증은 둘째 치고 생전 처음으로 가해진 직접적인 공격에 충격을 받은 이예주의 몸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저하게 차이 나는 힘의 우열 앞에서 그녀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씨발, 씨발. 연달아 험한 욕설을 읊조리며 거친 숨을 헐떡이던 남자는 이예주가 잠잠해지자 그제야 두피를 파고들던 손에 힘을 풀었다.

“좋게 대해 주려니까 씹…… 후, 가만히 있어. 그러면 아프지도 않고 곧 기분 좋아질 테니까. 응? 오빠가 기분 좋아지게, 읏차! 해 줄 테니까.”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기다랗게 늘어진 로브 자락이 아래에서 위로 들렸다. 

단추를 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방법을 바꾼 것이다.

떨리는 손이 맞닿은 유리벽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렸다. 

더러워. 무서워. 더러워. 더러워. 허벅지를 더듬는 뜨거운 손바닥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자꾸만 축 늘어지려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이예주는 끝까지 악을 썼다.

“……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이 미친 새끼야! 족장이 가만있을 것 같아?!”

“크큭, 멍청한 년. 지나가는 눈족 계집애인 줄 알고 실수로 덮쳤다고 하면 족장이 뭘 할 수 있겠어? 애초에 나 같은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구원자라고 받들어 모시던 널 처박아 놓은 게 그놈인걸.”

달칵. 벨트 풀리는 소음이 광활한 공간 안에 유난히도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뿔각 소리와 남자애가 유리벽에 머리를 처박는 소리가 멈췄다.

새벽의 일이 데자뷰처럼 겹쳤다. 

벨트가 풀리는, 옷이 찢어지는 소리에 기겁을 하고 위로 튀어 올라갔던 자신. 그러나 지금 자신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람도, 조롱이도, 유나도. 하다못해 여준조차. 

이예주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자신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두렵다. 그리고 무서워. 무서워. 나 무서워요, 람. 람…….

거칠게 몸을 더듬거리는 타인의 손길이 소름 끼쳤다. 

놈의 손이 허벅지를 스칠 때마다 눈앞이 시뻘게지면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죽이고 싶어. 죽여 버리고 싶어. 이 새끼 죽여 버리고 싶어. 죽여 버린다! 하지 마! 죽여 버릴 거야, 개새끼! 죽어, 죽어! 

철컥.

“손 떼.”

너무 간절해서. 이 개 같은 상황 속에서 너무 벗어나고 싶어서 환청이라도 들은 걸까. 

그러나 환청이라고 치부하기엔 허벅지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손이 일시 정지라도 하듯 뚝 끊겼다. 

“칼 버리고 양손 머리 위로 올려.”

어린 여자의 목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였다. 

그 덕에 이예주는 제 몸을 짓누르던 남자의 결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 나. 이번엔 네년이야? 응? 씨발, 서로 번갈아 가며 골탕 먹이는 거야, 뭐야!”

“셋 셀 때까지 손 머리 위로 올리지 않으면 발포한다. 셋, 둘.”

“히익! 이, 이봐! 알았어! 알았다고!”

후다닥 남자가 족제비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질끈 부여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이 온통 흐릿해서 초점을 맞추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울고 있었던가. 축축하게 젖은 눈을 세게 비벼 간신히 시야를 확보하자, 남자의 관자놀이 옆에 권총을 겨눈 유나의 모습이 보였다.

“뒤돌아.”

감정 하나 묻어나지 않은 깔끔한 목소리로 그녀가 총을 까딱였다. 

“제기랄, 벨트는 좀 채워야 할 거 아니야?” 

한 손은 머리 위로 올렸으나, 여전히 칼을 버리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제 앞섶을 까딱이며 족제비가 불평을 토해 냈다. 

그러나 말없이 철컥하고 권총을 장전하는 유나의 답변에 놈이 칼을 버리려는 듯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개새끼. 그냥 앞으로 던지면 되지 왜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거야. 

허리 위까지 마구잡이로 말려 올라간 로브를 미친 듯이 잡아 내리며 이예주가 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속 터질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던 놈이 돌연 엄청난 속도로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렸다. 

이예주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유나야!” 

“억! 이, 이년이……!”

휘익, 콱!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까스로 물러나며 놈이 휘두른 칼을 피한 유나가 총신으로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충격으로 비틀거리던 남자가 이마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칼을 들고 도약하려고 했다. 

하지만 약간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잇달아 총신으로 놈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는 유나 때문에 무산되었다.

“으, 으…… 씨, 씨발…….”

놈의 머리에서 한줄기의 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고작 17살 먹은 여자 아이의 완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행동에 이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 

쿠당탕- 

이예주로서는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던 족제비가 바닥으로 힘없이 널브러졌다. 

이게 무슨……. 

유리벽 근처에서 얼어붙은 채 유나와 쓰러진 놈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녀가 피 묻은 권총을 옷에 문질러 닦으며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뭐 해?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

다른 때 같았으면 명령조에 부아가 치밀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너무 엄청난 광경을 본 탓일까, 이예주는 대꾸 하나 하지 않고 후다닥 유나 옆으로 걸어갔다.

“주, 주, 죽은 건 아니지?”

벌건 물을 줄줄 내뿜으며 바닥을 더럽히고 있는 남자의 찢어진 머리통에 이예주가 소심하게 물었다. 

유나가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흘깃 눈짓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예주는 솔직히 조금 겁먹었다. 그, 그렇지. 그거 맞았다고 죽은 건 아니겠지. 

왠지 그동안 제가 알던 버릇없는 계집애가 아닌 것 같아서 차마 반발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때려.”

아침 인사라도 하듯 평이한 어조로 유나가 말했다.

“어, 응? 뭐라고?”

뜬금없는 말에 이예주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때리라고.”

“누, 누굴…….”

“죽여 버리고 싶다며?”

“…….”

“네가 꽥꽥 소리 지르는 거 3층 환풍구까지 들렸어.”

여상스럽게 자신을 돌아보는 유나의 얼굴을 마주하자 이예주는 비로소 기억해냈다. 

놈에게 겁탈을 당하기 직전, 자신이 떠올렸던 꽤 무서운 생각들을. 

힘만 있다면 저를 짓누르고 있는 개새끼를 찢어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을 입 밖에까지 내었던 것인가. 

눈을 끔뻑거리며 유나를 멀거니 마주보고 서 있던 이예주는 바닥에 기절해 있는 놈에게 시선을 돌렸다. 

찢어진 머리통에서 새어 나오는 핏줄기를 보자 거짓말처럼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단숨에 들끓어 올랐다. 

툭, 툭. 처음에는 소심하게 발끝으로 건드려 보는 것이 전부였다. 

옆에 유나가 있음에도 놈이 언제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려들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번 툭, 툭 건드려도 반응이 없자 발끝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퍽, 퍽! 

“개새끼, 개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

어느새 이예주는 온 사력을 다해 놈의 더러운 몸뚱이를 걷어차고 있었다.

“발정난 개만도 못한 새끼!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으, 으윽! 컥!”

“미친 새끼! 개새끼! 죽어! 제발 죽어 버려!” 

기절한 와중에도 고통을 느끼는지 놈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버러지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이예주는 지쳐서 숨이 막힐 때까지 족제비를 걷어찼다. 

그리고 되레 제 발이 아파 오자 그때부터는 마구 짓밟기까지 했다.

자신이 엉엉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눈앞이 온통 시뻘게서 좀체 이성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뭔가를 행하기 앞서 옳고 그름을 따져 보기라도 하겠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고 가슴은 뜨거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불타오르는 기분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헉, 헉. 개새끼, 개새끼…… 허억.”

한참이 지나자 남자를 걷어차던 이예주의 발길질이 현저히 느려졌다. 

조금 더 놈을 죽사발을 만들고 싶었지만 급격히 고갈된 체력 때문에 힘이 딸렸다. 

빌어먹을. 남을 패는 일도 체력이 받쳐 줘야 할 수 있는 것이구나. 

헉, 헉, 쫓기는 사람처럼 가파르게 호흡을 하며 발길질을 완전히 멈췄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나가 깨끗이 닦아 낸 권총을 이예주에게 내밀었다. 

“받아.”

“왜, 왜?!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제게 총구를 겨눈 것도 아니건만 이예주는 자리에서 펄펄 뛰며 과민 반응 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거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이예주의 손을 낚아채 직접 총을 쥐여 주었다.

“안전핀 풀었으니까 방아쇠 바로 당기면 돼.”

“바, 방아쇠?”

“머리통 잘 조준하고. 괜히 엄한 곳에 쐈다가 비명이라도 지르면 곤란하니까.”

두 손으로 잡고, 이렇게. 유나는 친절하게도 이예주의 손을 잡아끌어 남자의 머리통을 향해 총을 조준해 주었다. 

“어깨에 힘 빼고.” 

얼떨결에 유나에게 손이 감싸여 총을 쥐게 된 이예주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완벽하게 사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어설픈 자세로 총을 들고 있는 이예주의 자세가 유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미련 없이 이예주에게서 손을 떼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대로 쏴.”

1000년 후로 넘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총을 본 게 언제더라? 액션 채널에서 주구장창 틀어주는 CSI 미드?

이 망할 비행선에 처박힌 후에도 군인들이 들고 있는 총은 자주 접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안일하게 그 총들을 장난감 바라보듯 보았었는지 이예주는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직접 손에 든 총은 딱딱하고 묵직했다. 

휴대폰 진동처럼 덜덜 떨리는 손을 제외하면, 조준은 완벽했다. 

당장 방아쇠만 당기면 끝이었다. 

총알이 날아가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박살 내겠지. 

그러면 방금 전까지 눈앞이 시뻘게지도록 느꼈던 분노와 혐오감을 털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쏘라고. 죽이고 싶다며.”

유나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가만히 총을 겨누고 서 있을 뿐인데 이예주는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유나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휙 돌아 놈의 면상을 보았다. 

그래, 쏠까? 유나 말처럼 그냥 쏘자. 이 정신 나간 새끼가 방금 전에 나한테 했던 짓거리를 생각해 봐. 

그 역겨운 손길, 구역질 나는 숨소리. 당장이라도 벌거벗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던 몸을 박박 긁어내리고 싶었다.

이 자식을 죽이고 싶어. 지금 죽이지 않으면 이 새끼는 또 더러운 제 물건을 휘두르고 다닐 인간 말종 새끼야. 

당장 폐기 처분해야 하는 쓰레기지. 쏘기만 하면 끝이잖아? 쏠까? 그냥 죽일까? 

“빨리 쏴.”

이마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기절한 남자의 면상에 정확히 겨눈 총구가 자꾸만 빗겨 나갔다. 

총을 들고 있는 손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져 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핸드폰의 가벼운 진동처럼 드문드문 떨리던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급기야 땅을 뚫는 드릴처럼 발발발발 흔들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유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빨리 쏘지 않고 뭐 하냐는 무언의 압박 같았다. 

이예주도 동의했다. 

뭐해, 이예주. 빨리 쏴. 쏘면 끝이잖아. 이런 쓰레기 따위 죽여 버리면, 죽여 버리면……!

“쏴!”

“……모, 못하겠어!”

이예주는 결국 권총을 받쳐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병신. 이러니까, 이렇게 이도 저도 못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네가 버려지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욕하면서도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죄인처럼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못하겠어.”

“…….”

“나는 아무 능력도 없는 병신이라서 못하겠어. 너처럼 이 자식을 죽일 힘도 없고, 결단력도……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나는…….”

결국 이런 것도 못해. 이예주는 총을 들지 않은 한 팔로 화끈거리는 눈시울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꼴사납게 주저앉아서 엉엉 울 것만 같았다. 

뚜벅, 뚜벅. 

유나가 제게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그녀가 자신을 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럼 그렇지, 네까짓 게 구원자는 무슨 구원자냐고. 힘도 없고 아무것도 못하는 약아빠진 계집이라고 욕하고 조롱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다가온 유나는.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로 울려고 그래?”

이예주의 손에 들려 있던 무거운 권총을 스르륵 자연스럽게 도로 가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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