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주는 이번에야말로 괴성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쳤다.
텅! 텅! 길쭉한 팔이 두어 번 안쪽에서 유리통을 더 쳤다.
이예주는 거의 졸도할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으흐! 살았어! 미친, 미친! 살아 있어!”
뒤통수에 벽이 닿아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건만, 그녀는 계속해서 원통에서 떨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괴물이 유리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기엔 턱 없이 기운 없는 두드림이었고, 단단한 방화 유리가 이중으로 방호하고 있었지만 겁을 먹은 그녀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눈족 장로의 눈에는 딱히 초점이랄 게 없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 눈이 저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하여 단단히 막힌 벽을 뚫고 들어가고 싶은 사람처럼 등으로 벽을 밀며 몸부림을 치던 와중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달칵하고 팔꿈치로 벽에 달려 있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녀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은, 지이이잉 하는 객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등이 닿은 벽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뭐, 뭐야! 뭐야!”
후드가 말려 올라가는 느낌에 이예주가 화들짝 벽에서 등을 떼고 뒤를 돌았다.
제가 뭘 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벽이 아래위로 갈라져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스크린 도어 내려오듯 천천히.
그 너머로 한 평 남짓 되는 화장실 크기만 한 하얀 방이 나왔다.
과거의 영상 속에서 사슬을 채운 채 어린 람을 가둬 두었던 방처럼 새하얀 방이.
그 안에 한 사람이 옆으로 돌아서 있었다.
안쪽의 벽처럼 희디흰 옷을 입고 있는 남자아이였다.
흰 방에 흰 옷. 그 무채색들 가운데 남자애의 희멀건한 피부색과 염색물이 빠진 것처럼 푸석푸석한 노란 머리는 유독 눈에 튀었다.
수조에 갇힌 사람도 모자라 벽 뒤의 공간에 사람이 또 하나 갇혀 있다니.
이예주는 눈동자를 굴려 드러난 벽 옆의 다른 벽면들을 곁눈질했다.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수십, 어쩌면 기백 개에 달할지도 모르겠다.
이예주는 떨리는 동공을 다시 돌려 제 앞으로 고정했다.
남자아이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건지 하염없이 하얀 도화지 같은 옆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좀 이상했다.
“……저, 저게 뭐야?”
열여섯? 열일곱은 먹었을까.
조롱이처럼 사춘기가 찾아오지 않은 앳된 소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흰 방에 어린 남자애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애의 뒤통수에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얼굴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돌출된 코와 입, 틀림없이.
“얼굴…… 어, 얼굴이 왜 저기에…….”
그때였다.
부우우— 부우, 부우우— 부우우—
어디선가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예주가 다리족 족장을 뿔각 대장이라고 부를 적, 사막에서 여준이 꺼내 들어 불렀던 뿔각 소리였다.
제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없이 방을 훑자 하얀 방의 모서리에 손바닥만 한 스피커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왜 뜬금없이 뿔각 소리가…….”
이예주가 혼이 나간 얼굴로 혼잣말할 무렵, 옆벽을 바라보고 서 있던 남자애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홱 돌아갔다.
뒤통수가 뒤를 향하며 진짠지 가짠지 구분이 가지 않던 또 다른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신해서 죽은 사람처럼 빛이 꺼진 흐리멍덩한 눈을 한 남자아이가 비틀비틀 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내 쪽으로…….”
부우, 부우우, 부우우—
뿔각 소리가 나올 때마다 남자애의 몸이 기이하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예주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이래. 야. 오, 오지 마.”
불과 몇 걸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남자애가 계속해서 제 쪽으로 걸어오자 이예는 유리벽 쪽에서 몸을 떼며 엄포를 두듯 말했다.
그녀는 그러면서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유리통 안에는 빌어먹을 눈족 장로가 혼이 나간 눈을 하고 둥둥 떠 있었다.
그 아래 길쭉한 팔은 여전히 해초처럼 물속에서 꿈틀꿈틀 거렸다.
마치 이예주가 근처에 오기만 하면 바로 유리를 깨고 튀어나와 어깨를 잡아챌 것처럼.
망할! 망할!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남자애는 어느새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채 세 걸음도 안 되는 거리였다.
“흐, 흐으. 야! 야! 오, 오지 말라니까 왜 자꾸…… 으아악!”
그 순간,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비척거리던 남자애가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입을 쩍 벌린 채 이예주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꽥 고성을 내지르며 마구 뒷걸음질을 치던 그 순간, 퍽! 남자애가 돌연 허공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찌나 세게도 박았는지 아이의 몸이 뒤로 넘어갈 듯 휘청거렸다.
너무 투명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벽 속의 방은 투명한 유리벽으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좀비 같은 새끼가 제게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그새 균형을 잡은 남자애는 다시 빌빌거리며 걸어왔다.
그리고 ‘퍽!’ 하고 유리벽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쪽에 유리가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사람 같았다.
퍽퍽, 남자아이가 얼굴을 박을 때마다 반동으로 머리통이 흔들려 뒤통수가 슬쩍슬쩍 보였다.
얼굴이 달린 그 뒤통수의 눈코, 입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머리카락을 대신해서 자리하고 있어 잘못 보았다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부우우― 텅!
부우, 부우우― 텅!
뿔각 소리와 박자를 맞추듯 유리벽에 얼굴을 처박는 둔탁한 소리.
당장 비명을 지르며 기절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기절은커녕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어’ 하고 입을 벌릴 즈음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섬뜩하게 목을 압박했다.
“안녕, 예쁜이.”
눈족 장로가 있는 수조 대신 타인의 딱딱한 몸뚱이가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하루도 안 지나서 또 만났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이 새끼가 대체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예주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아무리 되새겨 봐도 누가 들어오는 인기척은 듣지 못했다.
“어…… 어떻, 흑.”
어떻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내뱉을 수 없었다.
턱 밑에 바짝 들이밀어진 칼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식도를 쑤시고 들어올 듯 날카로운 칼날이 섬뜩하게 목주름을 긁었다.
“헤헤, 어떻게 왔느냐고?”
놈이 킬킬 웃었다.
그 비열한 웃음소리가 낯익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따위의 고민을 굳이 하지 않아도 새벽녘의 잔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기억 속의 날카로운 족제비상과 졸루한 목소리를 대조하는 와중 귓가에서 더운 숨이 헉헉 내뿜어졌다.
“화장실에서 똥 싸고 있는데 천장에서 웬 쥐새끼가 찍찍거리면서 기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지.”
환풍구를 길 때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던 주인공이 바로 이 미친놈이었다니.
잊고 있었던 역겨운 구린내가 어디서부턴가 스멀스멀 몰려와 이예주의 얄팍한 비위를 건드렸다.
우욱, 토할 것 같아. 놈이 귓가에서 뿜어내는 숨결에 그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야. 이 비행선 내의 쥐 새끼란 쥐 새끼는 쥐포를 만든답시고 족장이 모조리 잡아들여 씨를 말렸는데…… 이렇게 뜯어 먹을 거 많은 여왕 쥐가 홀로 돌아다니고 있을 줄이야.”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해 이예주가 눈치 챌 틈도 없이 귀신처럼 따라붙은 놈이 섬뜩했다.
타인의 시선이나 오감에 예민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놈이 자신의 뒤를 따라 환풍구를 기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예쁜이도 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아? 왜 이 시간에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시켜 줄 구원자님이 혼자 나돌아 다니고 있을까? 안내해 주는 족장도 없이.”
놈이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칼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이예주의 목덜미를 끈적하게 쓰다듬었다.
의도가 명백한 손길이었다.
그 더러운 마수를 피하기 위해 고갯짓을 했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놈의 손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워, 그렇게 겁먹지 말라구. 난 병철이 놈보다 훨씬 상냥하니까 말이야. 자고로 계집들이란 말 안 들을 때를 제외하고 살살 달래 가며 다뤄야 제 맛인데. 그 뇌까지 근육으로 찬 무식한 놈은 수틀리면 손부터 올라가고 본다니까, 멍청한 새끼.”
“…….”
“우리 예쁜이, 어제 많이 놀랐지? 괜찮아. 오빠가 너는 특별히 더 살살 다뤄 줄 테니까. 넌 그냥 다리만 좀 벌리고 있으면 돼, 응?”
“흐, 흐으…… 이, 이거 놔.”
“에헤이, 떨지 말래두. 난 사실 유나 같이 뻣뻣한 계집보다 소리도 지르고 울기도 하는 너 같은 계집이 더 마음에 든다니까. 병철이 그 새끼야, 유나 어떻게 못해서 안달 나 있는 새끼라지만 난 한 번 하면 미련 없이 떨어질 거야. 병 같은 것도 없어. 물론 너도 없겠지?”
있어! 병 있어! 이예주는 차라리 자신이 병을 가지고 있다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바짝 들이밀어진 칼날 때문에 목에 힘을 주기 더럭 겁이 났다.
그사이 놈이 그녀의 말을 먼저 가로채어 단정 지었다.
“하긴, 더러운 계집이었으면 결벽증 말기 환자인 족장 놈이 네년을 곁에 두지 않겠지.”
“그, 그게 무슨…….”
“족장이 단물 다 빼먹은 후에 산 채로 씹어 먹으려고 널 검은 파편에게서 뺏어 왔잖아? 다 알아. 구원자랍시고 아무 능력도 없는 계집을 데리고 와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나도 들은 게 있어서 다 안다고. 아니면 그 귀한 구원자를 격리자 소굴인 B구역에 처박아 둘 리 없잖아? 너도 여준만 상대하기 질리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야, 아니야!
이예주는 미친 듯이 도리질을 쳤지만 놈은 알아듣지 않았다.
“그 새끼, 요만하잖아. 기집애같이 생긴 것들은 거기도 꼭 얼굴값을 한다니까.”
되레 제 검지를 꺼떡꺼떡 거리며 낄낄 웃는 놈의 속삭임에 이예주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갔다.
아무래도 이 미친놈은 뭔가 구원자란 존재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여 댈 리가 없잖아.
게다가 격리자 소굴인 B구역은 또 뭐야. 단물 다 빼먹은 후 산 채로 씹어 먹으려고 한 건 또 뭐고.
“샹, 뭔 놈의 단추가 이렇게 많아? 일단 딴소리는 급한 불부터 끄고 하자구, 예쁜이.”
뇌와 귀를 휘젓는 폭언에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이예주는 불현듯 로브 위를 꾸물꾸물 더듬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을 차렸다. 놈이 가슴께를 더듬거리며 로브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
아직 벗겨지지 않았지만 피부 위로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이예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뒤틀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아악! 이 새끼야, 이거 놔!”
칼을 들이민 상태인데도 여자가 미친 듯이 저항을 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놈이 서둘러 목에서 칼을 뗐다.
“이런 씨발! 움직이지 마!”
그 와중에도 족제비가 자신을 정말로 죽일 생각까진 없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이예주는 더욱더 격렬하게 발악했다.
그러는 도중 그녀의 팔이 벽면의 버튼을 눌렀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새벽에 내가 누군지 못 들었어? 나, 나 구원자야! 이러는 거 알면 족장이 가만있을 것 같아?!”
뿌우우― 뿌우우―
멈췄던 뿔각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유리벽 너머의 남자애가 발버둥 치는 이예주에게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유리벽을 부술 듯이 머리를 처박는 남자애의 움직임이 아까보다 더욱 격렬했다.
쿵! 쾅! 쿵! 쿵!
“놔! 놓으라고!”
퍽!
거세게 몸부림을 친 탓에 그녀가 휘두른 팔꿈치가 남자의 턱을 거세게 강타했다.
“윽!”
나지막한 비명 소리와 꽉 잡혀 있던 한 쪽 어깨가 느슨해졌다.
무심결에 위를 올려다보니 놈의 양 콧구멍에서 질금질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뭐야. 뭐가 흐르는…… 피? 코, 코피!”
놈이 제 코 밑을 훔친 손과 이예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새끼, 생각보다 약한 건가? 잘하면 벗어나서 곧장 환풍구로 달려갈 수도……!
그러나 팔을 풀어내어 도망갈 계획을 짜고 있던 그녀의 안일한 생각을 비웃듯, 놈의 낯이 흉악스럽게 구겨졌다.
“이 망할 계집이……!”
어마어마한 악력이 이예주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이어서 남자아이가 있는 방의 유리벽 쪽을 향해 어마어마한 강도로 밀어붙였다.
쿵!
“악!”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이마가 유리벽에 뭉개질듯 처박혔기 때문이다.
두개골 사이로 쏟아질 듯 뇌가 출렁출렁 흔들리는 기분에 이예주는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해롱거렸다.
쿵! 쿵!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놈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채 연이어 두어 번 더 벽에 머리를 찧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