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21)화 (223/319)

그녀의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커다란 물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양이 자못 특이했다. 

거대하고 길쭉한 원통 여러 개가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공중에 설치돼 있었는데, 마치 오래된 가구 위에 흰 천을 덮어 놓은 것처럼 하나같이 검은색의 암막 천으로 덮어져 있었다. 

천의 길이가 채 바닥까지 닿지 않아 그 틈으로부터 일렁이는 푸른빛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저게 뭐지?”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게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장치 뒤로는 B구역 1층을 이루고 있는 어두컴컴한 회색 시멘트 벽이 한쪽 벽면 전부를 이루었다. 

다른 곳은 벽이든, 바닥이든 모두 정신병원처럼 광이 나는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것에 반해 그쪽 벽만 투박하고 칙칙해서 유독 눈에 띄었다.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있는 모서리 구석에서 앞으로 쭉 직진하면 중앙 부근에 두터운 철문이 존재했다. 

지난 새벽에 확인차 보았던 출입구가 확실했다.

다른 쪽도 둘러보았지만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출입구는 그 문 하나뿐인 것 같았다. 

여기가 그 2층 연구실이라면, 그렇다면 저 이상한 모양의 장치가 바로 여준이 말한…….

“타, 타임머신?”

과거로 돌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를 기계를 보는 이예주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진짜 타임머신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던 거야? 뻥이 아니었어? 

원통들을 바라보는 이예주의 동공이 순간 이지러졌다. 

과거로 돌아가면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를 되살릴 방법이 있어. 그치만……. 

당장 제가 생각하는 기계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검은 천으로 덮여 있는 탓에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빌어먹을, 사람 호기심 자극하는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천으로 덮어 놔. 

그리고 덮어 둘 거면 빛도 새어 나오지 않게 꽁꽁 싸매던가. 빨리 천을 벗겨 달라고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야, 예주야. 정신 차려. 그 남자한테 가기로 결정했잖아.”

빛이 나오는 쪽을 바라보며 잠시, 갈팡질팡하던 이예주는 순간 드는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머리통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정신 차려, 이예주.”

이예주는 한 번 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람 놈이 다칠 수도 있다고. 

여긴 나중에라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날라 간 팔 한쪽은 되찾을 수 없잖아. 

타임머신이 실존하는지, 과거로 가는 방법이 정말 실제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지만 그녀는 예지몽을 상기하며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았다. 

출입문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징하다 징해, 이예주. 어떻게 이렇게까지 타인을 끔찍이 여길 수 있을까. 이성을 돌같이 보던 과거의 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였다. 

서둘러 걸음을 옮긴 탓에 철문까지의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그러나 그녀는 굳게 닫혀 있는 문과 마주치자마자 험악하게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뭐야! 미친, 무슨 문 안쪽에도 잠금장치가 있어!”

그렇다. 안쪽이니까 도어 락 해제 버튼 같은 열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거라 믿었는데, 마치 그녀의 뒤통수를 거하게 내리치듯 바깥쪽과 똑같은 ‘Marking’과 ‘Card’가 쓰인 패드가 존재했던 것이다. 

“아오, 진짜!”

쓸데없는 곳에서 이렇게 철저하단 말이야! 탈출구가 막힌 탓에 이예주는 몸을 안절부절 움직이며 짜증을 냈다. 

마킹 자국은 둘째 치고, 환풍구로 올라가는 데만 신경 쓰느라 객실 카드 키를 챙기는 것을 깜박했다. 

카드 키도 없는데, 괜히 열어 보겠답시고 패드를 막무가내로 건드렸다가 비상벨이라도 울리면 답도 없다. 

“제기랄, 이제 어떡하지.”

빠져나온 환풍구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갈림길의 교차점으로 되돌아가 다른 통로로 들어가는 방법뿐인가. 

그 더럽고 먼지 뭉치가 굴러다니는 곳으로 다시? 

그리고 그 통로들이 또 어디로 이어질 줄 알고. 

“으으, 망할…….”

이예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을 뇌까렸다. 

으, 어떡하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고 생각을 짜내려 해도 도무지 환풍구로 돌아가는 것 외에 뚜렷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해를 해서 강제로 미래로 가는 ‘문’을 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시기 조정을 할 수 없으니 너무 무모했다. 

또한 다시 버려지지 않으려면 어쨌든 남자한테 제 쓸모를 증명해야 하지 않는가. 

“하…… 그 새끼가 뭐라고.”

이예주는 우울한 낯빛으로 터덜터덜 철문에서 등을 돌렸다.

그때, 암울의 극치를 달리는 그녀에게 문득 한줄기 빛이 보였다. 

바로 천으로 덮여 있는 타임머신-이라고 추정되는-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었다.

“타임머신…….”

눈길을 끄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다시 마음이 갈팡질팡해졌다. 

당장 람에게 가야 해. 그 남자에게 가는 게 먼저라고 이미 결정했잖아. 

그렇지만 그토록 찾던 ‘과거로 가는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잠깐, 잠깐 확인만 하고 가는 것까진 괜찮지 않을까. 

진짜 저 천에 덮인 것이 타임머신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여준의 말이 거짓일 확률도 있으니까. 

잠깐 확인 정도는. 알 수 있으면 작동법도 좀 보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보기만 하고 갈까?”

람에게 간 이후엔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시 온다 해도 이 비행선이 온전한 모습으로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후딱 확인만 하고 가는 거야. 

저 천만 끌어 내리면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기어이 확인하고 가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이예주는 그것을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천을 치우고 확인만 하는 거니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는 초조함에 거의 뛰듯이 걸었다.

천이 덮인 요상한 모양의 원통 기계들에 가까워질수록 빛이 강해지며 시야가 훤해졌다. 

세어 보니 거대하고 길쭉한 원통은 총 8개였다. 

천 아래 굵은 기둥들이 나와 바닥에서 휘어져 다른 기둥들과 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모양새일세.”

이예주는 기기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반 바퀴쯤 돌았을 때 기계를 관리하기 위함인 것 같은 터치스크린이 가슴 밑 정도의 높이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예주는 그 앞으로 걸어갔다. 모니터 안을 들여다보니 알 수 없는 수치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그 옆에 여러 영단어들이 적힌 버튼들이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단어는 ‘Supply’와 ‘Stop’ 정도뿐이었다. 

괜히 아무거나 건드렸다가 낭패를 보긴 싫은 이예주는 금방 화면에 흥미를 잃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원통 장치 뒤쪽은 멀찍이서 보았던 대로 칙칙한 회색 벽으로 막혀 있어 더 이상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벽이 그냥 벽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벽면에 일정한 간격마다 미세한 균열이 존재했고, 그 균열을 만드는 세로선의 양옆에는 버튼이 있는 패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벽 너머에 또 다른 공간이 있고, 그것을 두터운 벽으로 차단해 둔 것 같아 보였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확인해 볼 텐데. 하지만 이예주에겐 타임머신 기계를 확인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사치였다.

그렇지. 지금은 후딱 타임머신이 진짜인지만 확인하기로 했지. 

이예주는 여기서 지체하고 있는 이유를 재차 상기하며 고개를 원래의 목표로 원상 복귀시켰다. 

검은 천으로 덮여 있는 원통들의 아래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그림자는 터치스크린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안으로 신발 코를 들이미는 이예주는 왠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것 같다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뚜벅뚜벅, 원통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유독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지면에서 반 미터 정도 떨어진 공중에 설치되어 있어서 그런가. 

멀리서 볼 때는 크기도 길이도 크다고만 생각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원통은 그렇게 크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작은 것은 아니었다. 

체구가 작은 두 사람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폭과 모양새였다. 

마치 세로로 세워 둔 MRI 스캐너 같아 보였다.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검은 천의 끝자락을 말아 쥐었다. 

천으로 감춰진 내용물을 정말 확인하려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런데 끌어 내린 천을 다시 어떻게 원상태로 씌우지? 밟고 올라갈 의자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쓸데없는 걱정들이 차오르자 그녀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상념들을 내쫓았다. 

알 게 뭐야. 어차피 잠깐 확인만 하고 바로 튈 건데. 

이예주는 마른 침을 모아 꿀꺽 삼키며 천 자락을 꽉 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검은 천이 그녀의 손짓에 스르륵 힘없이 딸려 왔다. 

그리고 마침내 천 밑의 기계가 드러났다. 

어두침침했던 눈앞이 한순간 확 밝아졌을 때.

“흐, 흐억!”

드러난 기계의 모습에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털썩. 그 바람에 손을 놓쳐 던지듯이 바닥에 떨어진 천소리가 꽤 크게 울려 퍼졌다. 

정면을 바라보는 이예주의 동공이 찢어질 듯 크게 확장되었다. 

원통은 타임머신 같은 기계가 아니었다. 

기계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녀였으나 그것이 타임머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시간을 다루는 그 어떤 장비가 내부에 수조처럼 물을 채운 채 그 안에 사람을 넣어 놨겠는가.

일렁이는 푸른빛은 원통형의 수조 안을 밝히는 전등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원통은 기계 장치가 달리지 않은, 유리로 만든 통에 가까웠다. 

그 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이, 포름알데히드로 채워진 유리병 안의 표본처럼 둥둥 떠 있었다. 

이예주를 더 경악에 빠트린 것은 안에 갇힌 사람의 생김새였다. 기형인가? 

언젠가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다 들어간 호러 사이트에서 본 것들이 생각났다. 

죽은 쌍둥이를 몸에 달고 태어난 사람처럼, 수조 안에 있는 사람의 바싹 마른 양 옆구리엔 기괴스럽게도 또 다른 인간 두 명의 상체가 달려 있었다. 

아래로 축 늘어진 것들이.

한쪽은 몸집이 작았다. 어린아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다른 한쪽은 체격이 큰 남자였는데 양팔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게다가 온몸이 울긋불긋하고 퉁퉁 불어 징그러웠다. 

나뭇가지처럼 바싹 메마른 사람의 몸에 붙어 있기엔 너무 힘겨워 보여…….

거기까지 생각한 이예주는 허겁지겁 두 상체를 매달고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지겹고 권태로웠던 무감각한 눈과 얼굴이 조롱이를 보고 어떻게 희번덕 뒤집어졌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그 시체처럼 허옇고 창백한 얼굴이…….

“누, 눈족 장로……!”

이예주는 물속에 있는 기이한 형태의 인간의 얼굴을 확인하고 거칠게 숨을 할딱거렸다. 

이,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그때 분명 얼굴을 갈겨 쓰러뜨린 다음 지하에 남겨 두고 왔는데. 

그리고 그 지하 탄광은 자신이 던진 등불에 의해 완전히 폭발하여 붕괴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데 대체…… 대체 이 여자의 몸뚱이가 왜, 꼭 사막에서 보았던 그 괴물처럼……. 

참혹한 여자의 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던 이예주는 주춤주춤 유리통 가까이로 다가갔다. 

살아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그동안 여자가 죽었다는 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다리족의 비행선에서 다시 만날 줄은 전혀, 꿈에도 몰랐다.

뽀글뽀글. 이상한 것들을 양 옆구리에 달고 있는 여자 주변에서 계속해서 기포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혈색이 돌지 않는 눈족 장로의 몸은 살아 있다고 보기 매우 어려웠다.

“……죽은, 죽은 건가?”

죽은 거겠지? 산소 호흡기도 없는데 어떻게 물속에서 살아 있을 수가 있겠어. 

그리고 다리족 놈들이 아무리 미친놈이라지만 산 사람을 가지고 이런 짓을 할까. 

개구리 표본도 아니고. 

게다가 같이 협력하여 비행선을 건조해 살아남은 눈족의 장로였다. 

그런데.

“그럼 이 원통들이 다…….”

이런 괴물의 시체들을 보관하기 위해 쓰고 있는 거란 말이야? 타임머신 같은 게 아니라? 

눈족 장로가 들어 있는 천이 벗겨진 유리통과, 그 옆으로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는 원통들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번갈아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유리통 앞으로 다가가던 순간이었다. 

눈족 장로의 옆구리에 매달린 남자의 길쭉한 팔이 불현듯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이예주 앞의 유리통을 쳤다. 

텅! 

그 소리를 듣고 깨어난 건지 시체처럼 눈을 꾹 감고 있던 눈족 장로가 번쩍 눈을 떴다. 

“흐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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