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19)화 (221/319)

톡, 토독.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이예주는 10평 남짓한 객실 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다리족 놈들의 본거지인 이 망할 비행선에서 탈출하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도무지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객실 밖은 사방에 CCTV가 깔려 있고, 옆방에는 이예주를 감시하는 발칙한 계집애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이 빌어먹을 B구역이 어떤 곳이었나. 

새벽녘에 유나를 겁탈하려고 했던 흉악한 미친놈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돌아다니는 곳이다.

조롱이를 구하기 위해 탄광굴을 헤맬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그녀에게 제드라는 패가 있었고 조롱이를 구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계획, 전략 따위 없이 무작정 움직이는 것에도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근거라곤 그저 예지몽이라고 믿는 꿈뿐이다. 너무 무모하고 대책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가슴이 초조하고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아직도 눈앞에 생생해. 피를 흩뿌리며 폭발한 남자의 왼쪽 팔. 

예지몽이 현실로 이뤄지기 전에 어서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마음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현실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막 나갈 수도 없고……. 

그녀는 새벽녘 몰래 돌아다니며 살펴보았던 B구역과 지금껏 보고 새겼던 비행선의 전체 구조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B구역은 어찌어찌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비행선 자체에서 나가기 위해선 A구역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그것도 A구역 3층 본부실부터 1층까지. 

B구역과 A구역 사이를 잇는 중앙 통로 끝에는 이동 수단이 엘리베이터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비행선의 출구가 있는 A구역 1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앙 통로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서 A구역 3층 본부까지 올라가, 본부를 가로질러 다시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빌어먹을 구조였다. 

“미친.”

이예주는 쌍욕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올 때는 미처 몰랐다. 이곳이 바로 개미지옥이라는 것을. 

이제야 여준 놈이 안전제일을 외치며 왜 자신을 부득불 B구역 꼭대기 층에 처넣었는지 알 것 같았다. 

비행선에서 가장 깊숙하고 나갈 수 없는 곳에 자신을 가둬 둔 것이다. 

탈출을 마음먹더라도 실행할 수 없도록. 

“……빠져나갈 구멍이 없네.”

이예주는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녀의 탈출 고행기에서는 계속 운이 따라 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했지만 결국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씩은 있었으니까.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빠져나갈 구멍…… 구멍?”

이예주는 번뜩 스치듯이 지나가는 발상에 뱅뱅 맴돌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구멍…… 생겼잖아?”

그러고 보니 거짓말처럼 구멍이 생겼다. B구역 폭발로 중앙 통로에 생긴 뻥 뚫린 구멍! 

“가만있어 봐. 벌써 다 고쳐졌나?”

이예주는 아침에 유나를 따라 A구역으로 가는 동안 지나친 중앙 통로를 더듬더듬 기억해 냈다. 

뻥 뚫린 중앙 통로의 손상된 내벽은 ‘위험’이라는 빨간색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진 불투명한 비닐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그 주변은 비행선 내부의 다른 곳보다 공기가 유독 서늘했다. 

아직도 구멍이 뚫린 채 완벽하게 수리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막막함과 초조함으로 찌푸려졌던 이예주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그래도 하늘이 완전히 저를 버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굳은 머리로도 도망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준 것을 보아하니. 

B구역에서 나가 그쪽으로 탈출하겠다는 허접한 계획 하나를 세운 이예주는 무작정 카드 키를 챙겨 들고 달려 나갔다. 

“기다려라, 람 자식아!”

내가! 내가 얼른 가서 구해 줄 테니까! 얼른 내 능력과 쓸모를 입증해서, 네놈이 날 버린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그러나 카드 리더기에 채 카드를 긁기도 전에 이예주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비행선에서만 빠져나가는 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당장 다리족 놈들에게 들키지 않고 어떻게 구멍까지 갈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문만 열어도 사방에 CCTV 깔려 있는 복도를. 

“망할.”

이예주는 들고 있던 카드키를 내팽겨 치고 문 앞에서 절망했다. 

“난 탈출 같은 거 적성에 안 맞는다고…….”

언제나 도망만 다녀야 하는 제 신세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멍청하게 있지만 말고 머리 좀 굴려 봐.”

이예주는 또 다른 제게 말을 걸었다.

“생각을, 그러니까 어떻게 나갈지 생각을…… 하, 안 입다가 다시 입으려니까 무거워 죽겠네. 이놈의 망할 포대.”

약 이틀간 화장실 구석에 내팽겨쳤던, 람이 사 준 포대 자루를 다시 몸에 주섬주섬 꿰입으며 그녀가 주절댔다. 

볼일을 보러 들어왔다가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어 다시 입는 도중이었다. 

두터운 로브를 장착하니 몸이 금세 묵직해졌다. 

고작 이틀도 채 안 되는 시간 벗고 있었다고 그 무게가 새삼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예주는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이며 뚜껑을 내린 변기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 미친놈들 집단에서 벗어나고자 마음먹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한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뤼미에르 꽃의 개화기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 그쪽으로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하지만 비행선의 구조도 간신히 떠올리는 제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지, 가장 빌어먹을 산인지 듣도 보도 못한 산의 길을 알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정상으로 올라올 땐 다리족 헬기를 타고 와서 길을 외울 틈도 없었지. 

게다가 헬기 밖으로 보였던 것은 온통 눈으로 덮인 깎아지른 절벽뿐이지 않았는가? 

“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암담한 탈출기에 이예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 폭 내쉬었다. 

그래도 변기 위에 우두커니 앉은 우스운 꼴로 사색에 잠겨 있자니 예지몽으로 인해 극도로 흥분했던 머리가 점차 차가워졌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이완시키며 뒤로 젖혔다. 

긴장을 풀려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화장실 천장에 달린 백열등 탓에 눈이 부셔 손을 들어 눈을 가려야 했다.

풍랑같이 격렬한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지독한 무기력증과 탈력감이 남았다. 

마음만 앞서 나가다가 막상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느꼈던 것들이 떠올랐다. 

힘없는 자신과 개똥 같은 능력에 대한 원망, 자괴감. 

언제부터였을까. 

죽음을 감수하고도 매번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람에게 구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이예주는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능력에 관해 숨긴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뒤섞여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보잘것없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도움을 구할 수 있음에도 끝내 입을 다물고 홀로 아등바등 거리다가 끝내 일을 망칠 때마다, 그녀는 무의미한 힘을 가진 자신이 미웠다.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짐은 주기 싫었다. 그랬는데……. 

이래서, 이래서 그 사람이 버린 건가 봐. 이예주는 가벼운 깨달음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쓸모가 없어서. 제 힘으로는 이깟 객실 하나 몰래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인간이라서. 

곁에 둬 봤자 짐만 될 뿐이라서. 

“그치만…….”

아무짝에 쓸모없는 능력을 가진 인간일지언정 이예주는 예지몽을 꾸었다. 

곁에 있었더라면 필히 그에게 곧 닥칠 미래의 위험을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손부터 어깨까지, 람의 왼쪽 팔 전체가 폭발하여 피를 물처럼 흩뿌리는 끔찍한 부상을 당하는 꿈이었다. 

예지몽이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으니 그런 위험 따윈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예지몽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냥 당장 그에게 꿈에서 본 미래를 이야기해 줄 수 없는 이 상황이, 제가 가진 불안과 공포를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이예주는 미칠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람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를 구하려면, 그를 도우려면…….

이예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처럼 그녀를 구원할 단 하나의 탈출구가 보였다. 

“어……?”

변기 바로 위, 천장에 달린 네모난 환풍구가.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이 앉은 몸을 일으켜 아예 변기 위로 올라섰다. 

환풍구에서는 부연 먼지가 더덕더덕 낀 프로펠러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 앞은 네모난 모양의 촘촘하고 얇은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이 정도면 쑤셔 넣으면 어떻게든 몸이 들어갈 것 같은데? 

까치발을 바짝 들고 철창 새에 손을 집어넣어 두어 번 아래로 잡아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오늘 새벽에도 이 환풍구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랬다. 

철창의 모서리 네 군데에 박혀 있는 나사 때문에 금방 포기했지만. 

붉게 녹이 슨 철장과는 달리 나사는 교체한 지 별로 오래되지 않은 듯 헤드에서 유독 반질반질 빛이 낫다. 

마치 교도소에서 침대 기둥이나 변기를 절대 뽑을 수 없도록 바닥에 단단히 고정해 놓는 것처럼. 

“거참, 이상한 곳에서 철저하단 말이야.”

이예주는 중얼거리며 덮개에서 손을 뗐다. 

지문에 묻어나는 회색 가루에 손을 턴 그녀는 다시 나사 헤드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십자 홈이 얕게 파져 있는 일반 나사였다. 

뭔가 홈에 비집고 넣어 돌릴 수 있을 만한 것이 있다면 충분히 분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객실 안에 뜬금없이 십자드라이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예주는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로브 안주머니를 뒤졌다.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 

그녀는 품에서 열쇠를 끄집어냈다.

“……하, 설마 이게 나사까지 풀진 못하겠지.”

만능 키의 능력은 잠겨 있는 자물쇠에만 해당될 테니 이예주는 드라이버 대신 십자 홈에 쑤셔 넣을 만한 열쇠의 얇고 날카로운 끝부분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덮개의 모서리에 바짝 조여진 네 개의 나사들 중 하나에 조심스럽게 열쇠를 가져다 대었다. 

어떻게 홈에 잘 맞춰서 살살 돌리다 보면 나사도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엔 너무 꽉 죄어진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별 기대 안 했다. 

부디 조금이라도 돌아가기를 빌며 홈에 열쇠 끝을 비집어 끼어 넣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이었다. 

끼리리릭, 힘을 주기도 전에 나사의 헤드가 돌아갔다.

“헐.”

이예주는 화들짝 놀라 열쇠를 나사에서 떼고 열쇠 끝과 나사의 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자물쇠만 따지는 거 아니었어? 

그녀는 제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십자 홈에 열쇠를 맞췄다. 

아주 살짝, 정말 살짝 힘을 주었을 뿐인데 나사가 술술 풀렸다. 

끼리릭, 끼리리릭. 

원래부터 조임이 헐거웠던 것처럼 나사는 돌돌돌 돌아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눈으로 보고도 거짓말 같았다. 대체 열쇠에다가 뭔 짓을 했으면. 

……역시.

“다시 만나면 일단 연금술부터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어.”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박 물건을 만들 수만 있다면 기술직이더라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테다. 

그녀의 손이 바빠졌다. 끼릭, 끼리리릭. 곧 그 손을 따라 나머지 나사들도 마저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리더라……. 크헙! 켁!”

이예주는 코와 입 속으로 훅 풍겨져 들어오는 먼지 덩어리에 사레에 들려 목을 부여잡고 죽을 듯이 기침을 토해 냈다. 

빌어먹을. 

프로펠러를 떼어 내고 변기 위에 위태롭게 여러 가지 물건들을 쌓아 올려 간신히 좁은 환풍구 속에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자 당장 쥐 새끼들이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을 만큼의 더러운 먼지와 때 밭이 펼쳐졌다. 

이예주의 거센 기침으로 흔들린 탓일까. 

순간 ‘탁, 콰당!’ 소리와 함께 변기 위에 위태위태하게 쌓여 있던 의자, 바구니, 수건 따위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요란한 소리에 찔끔한 표정으로 엉망진창이 된 화장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 소리가 망할 유나 계집이 있는 옆 객실까지 들리진 않겠지. 

“아오, 들키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환풍기 구멍에서 등을 돌린 채 낑낑거리며 먼지 구덩이 속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옆방 계집이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또 미친 듯이 벨을 눌러 대기 전에 어서 제 객실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예주는 뿌연 먼지가 부유하는 텁텁한 환풍기 속을 계속해서 기어 나갔다. 

환풍기 안은 조금만 고개를 움직여도 이마를 부딪칠 수밖에 없는 좁았다. 

그래도 밀폐된 공간 안에서 두꺼운 로브를 걸친 채 먼지 바다를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 빼고는 나름 괜찮았다. 

이상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지하 통로나, 너무 낙후돼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승강기에 비하면 훨씬 안전한 거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세뇌했다.

환풍구 속은 좁고 후덥지근했다. 이예주는 방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무조건 제 객실에서 반대편 쪽으로 기어갔다. 

그쪽이 엘리베이터와 비상 통로가 있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B구역 1층으로 내려가긴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지라 다행히도 잘못된 길로 들어설 일은 없었다.

“하…….”

이렇게 숨 막히는 먼지 구덩이를 기어 5층에서 1층까지 언제 내려갈까.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별 수 없었다. 

제가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수많은 CCTV를 피해 가며 복도를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능력이 없으면 기어야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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