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18)화 (220/319)

이예주는 놈의 물음에 사실대로 답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호수에서 살던 포악한 생명체는 지금은 뼛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러니 뤼미에르 중턱 부근에는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음, 이상하군요. 산 중턱 전체를 덮고 있던 가시장벽이 하루아침 새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 그 지역에 있는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시적인 계약일 가능성도 있겠군요.”

표정 없이 해쓱한 낯빛으로 여준의 말을 듣던 이예주는 문득 뇌리를 번쩍 스치고 가는 목소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퍼뜩 몸을 떨었다. 

―개화기가 끝나는 사흘간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니 내 인내심이 끊기기 전에 내게로 돌아와, 예주야.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붉은 눈으로 사흘 안에 돌아오라 몇 번이나 강조하던 꿈속의 람. 

뤼미에르의 가시 장벽이 사라지는 개화기. 

오늘이 람과 헤어진 지 며칠째지? 

이예주는 커다란 깨우침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정체되어 있던 머리를 정신없이 굴렸다. 

람에게 버려졌다는 충격과 공포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뤼미에르 가시 장벽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가시 장벽이 사라지는 것은 뤼미에르의 개화 기간인 단 3일뿐이라는 것과 오늘로써 사흘간의 개화 기간 중 이틀이 지나가고 있음을. 

사흘 안에 내게로 돌아와, 이예주. 

남자가 꿈속에서 분명 그렇게 지껄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다음에 꿈속의 그가 무어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거 같은데. 

그 뒤는 뿌연 성에가 낀 것처럼 잘 들리지 않았다. 

이게 정말 꿈인가? 사흘 안에 돌아오라는 그의 명령을 이렇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게 정말 람을 향한 그리움이 도가 넘어 꾼 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강한 기시감이 스멀스멀 몸을 좀먹는 것 같았다.

“과거를 받아들이기도 벅차실 텐데, 무리한 요구를 드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구원자님. 구원자님의 도움 없인 그조차도 알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알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예주가 움찔하며 정신을 되찾았다. 

여준이 한줄기 빛을 본 것처럼 감격에 빠진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진짜 정보는 한 톨도 제공하지 않은 그녀는 면구스러워졌다. 

다행히 그가 황급히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오늘 밤 당장 산 중턱으로 정찰대를 다시 보내어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철수 상병, 붉은 개 요원들을 즉시 소집하도록.”

“알겠습니다!”

이예주의 말을 받아 기록하느라 고요했던 장내가 한순간에 분주해졌다. 

“……하지만 거기에 아직도 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활기를 되찾은 본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예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람이 절대로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는, 끝내 놓지 못한 희망에서 발로된 의아함이었다. 

그저 작은 웅얼거림이었을 뿐인데 어찌 알아들었는지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던 여준이 바쁜 와중에도 이예주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 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원자님. 우리에겐 검은 파편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는 RTBD가 있지 말입니다. 비록 단시간뿐이지만 그 지역을 정찰하는 데는 충분합니다.”

졸렬한 새끼. 이예주는 여준의 용의주도함에 치를 떨다가, 이내 그조차도 힘에 부쳐 관뒀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쳤다. 

검은 파편에 관한 과거로 완전히 뒤죽박죽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면 부족에서 파생된 피로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렇게 바라 오던 1000년 전 과거의 일들과 람에 관한 모든 것을 똑똑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예주.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제가 던진 떡밥 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여준의 꼴을 더 이상 보고 있기가 싫어 이예주는 그 혼잡함을 뒤로한 채 스리슬쩍 A구역 3층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유령처럼 사라지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조용히 따라붙은 유나 일병뿐이었다. 

터벅터벅, B구역을 돌아가는 동안 소음이라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전부였다. 

이예주는 걷는 내내 입이 붙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녀의 음울한 심경을 배려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유나 또한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마침내 객실에 도착한 이예주는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으슬으슬 몸이 떨려 와 시트를 목 끝까지 덮었는데도 어디선가 한기가 들었다.

람의 과거는 그녀가 감당할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그의 순수한 분노. 그가 하는 증오의 대상이 언제든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예주는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 

그토록 그의 과거는 처참하고 참혹해서, 억누른 울음이 자꾸만 잇새로 터져 나왔다.

*       *       *

와아아아― 

우렁찬 함성 소리에 이예주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 여준의 마수에서 벗어나 B구역에 있는 제 객실로 돌아왔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녀는 혼란, 혼돈, 아수라장, 그 한가운데에 길 잃은 아이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이게 뭐…….”

악! 으윽, 크아악― 마치 전쟁터의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적을 때리고 찌르고 죽이는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자신이 어디에,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좀체 감이 잡히지 않아 멍청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부르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것은. 

“이예주.”

이예주는 허겁지겁 그 목소리를 쫓아 뒤로 돌았다. 

피 튀기는 살벌한 난장판 속에서 제게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람…….”

그녀의 얼굴이 절박하게 일그러졌다. 꿈속에서조차 잊은 적 없는 남자였다. 

그 얼굴, 눈빛, 걸음걸이까지. 이렇게 눈에 박혔는데, 아플 만큼 제게 박혀 버린 저 남자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남자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잔인한 비명 소리와 고통에 찬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주변이 부옇게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별로 상관없었다. 

그만 있으면 주위 따위. 누가 죽어 가든 알 바 아니야. 상관없어. 

하지만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남자는 사이를 쉬이 좁히지 않고 돌연 우뚝 멈춰 섰다. 

람이 입을 열었다. 

이예주는 주변 소음에 묻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불안해졌다. 

“이제 너도 충분히 알았겠지. 네가 만난 놈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악한 것들인지.”

그러나 꽤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서 내뱉는 것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선연하게 와 닿았다. 

람이 건네는 영문 모를 소리에 이예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에게 되물으려고 입을 떼었지만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예주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뜬구름 잡는 소리를 이어 했다.

“이제 선택을 할 때군.”

무슨 선택이요? 이예주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나른하게 웃었다. 

“개화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 않아.”

“…….”

“사흘, 그때까지 내게로 돌아와.”

답답해 죽을 것 같아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남자는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소리를 늘어놓다 못해 이제는 오만한 명령까지 하사했다. 

“내게로 돌아와서 나를 선택해, 이예주.”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지 알아야 선택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제 가슴을 두어 번 팡팡 내리치자, 남자가 낯을 바꾸듯 웃음을 싸악 거둬들였다.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그는 다시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감질이 나서 죽을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간 환장할 것 같아 이예주는 제가 먼저 가겠다는 생각으로 발을 뗐다. 

그러나 누가 바닥에 본드라도 잔뜩 발라 놓은 것처럼 발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끙끙 앓는 소리를 낼 만큼 안간힘을 쓰던 그녀는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예주는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들어 다시금 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에게 못 박혀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검붉은 색으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래, 검붉은 색. 

평소와 다름없이 빨간 눈동자가 틀림없는데. 

그런데 그 순수한 빨간색에 탁한 검은색을 마구 뒤섞은 것처럼…….

이예주는 문득 강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눈이 좀 이상한데요?

“만약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 순간이었다. 

퍽― 

그것은 작은 폭발이었다. 

이예주에게로 걸어오던 남자의 왼쪽 팔이 폭발했다.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허공으로 선명한 색의 피들이 흩뿌려졌다. 

그 뜨끈한 핏방울 몇 개가 이예주의 허여멀건 피부에도 점점이 튀었다. 

비릿한 혈향이 콧속을 훅 파고들 즈음, 남자는 피보다도 더 짙은 눈을 형형히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네가 가려는 대륙이 어디든, 다 때려 부수고 파멸시키겠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거의 짓씹는 행위에 가까운 으르렁거림이었다. 

이예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일전에 남자의 목표가 인간 박멸이란 소리를 들은 것처럼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라면 현실로 만들기 충분했기에 손끝이 서늘해졌다. 

남자의 팔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찢어진 옷소매가 펄럭이는 어깨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진득하고 질척한 시선으로 이예주를 주시했다.

“그곳에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모조리 갈가리 찢고 불태워서 너를 다시 내게로 돌려놓을 거야, 그러니.”

“…….”

“그러니 사흘 안에 내게로 돌아와.”

터져 버린 왼쪽 팔에서 피를 질질 흩뿌리며 지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람. 

당장 그에게 뛰어가고 싶은데 누군가 몸을 강제로 자리에 잡아 두는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도 모자라 거무룩한 수렁 속에 빠지는 것처럼 눈앞이 까맣게 점멸해 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이예주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 이럴 수 없어. 흐으, 이건 꿈이야. 이건 악몽이야! 이건 악몽이야! 아아, 흐아악! 

그녀는 한 치 앞에도 보이지 않는 암경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무서워, 무서워! 람에게 당장 가야 해. 그를 구해 줘야 돼! 누가 날 좀, 아니 누가 그 사람을 좀. 그 사람 좀 제발……!

“흐, 허억!”

깊은 심해 속으로 침잠하다가 간신히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진 사람처럼 이예주가 날카롭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다소 딱딱한 매트리스, 심미성보단 실용성에 중점을 둔 간결한 내부 구조가 보였다. 

몸은 B구역 5층 객실에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피를 줄줄 흘리는 람 앞에 있었다.

“가야 돼!”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이예주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얼굴에 튄 핏방울과 비릿한 피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게 비위를 자극했다. 

예지몽이었다. 

찢어질 듯 확장된 동공,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몸, 그리고 덜덜 떨리는 두 손이, 틈 하나 없이 피부 위에 빡빡하게 돋은 소름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람에게 가야 돼!”

목까지 덮고 있던 침대보를 찢듯 잡아 던진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냉철하게 이성을 차리고 계획을 세울 시간 따윈 없었다. 

예지몽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꿈을 통해 미래의 람과 만난 순간부터 이미 이예주는 반실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A구역의 본부에서 보았던 과거 속의 어린 람과 꿈속의 피 흘리던 람이 쉴 새 없이 교차되었다. 

인간들이 그를 또다시 다치게 할 거야. 다리족 새끼들이 1000년 전처럼 그를 아프게, 끔찍하게 난도질할 셈이야.

과거에서 본 그처럼, 꿈에서 본 남자의 처참한 모습처럼 그렇게 되기 전에. 람이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지금 당장 탈출해야 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