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짧은 총성과 함께 목표물에 적중한 듯 스크린 안의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흐흑, 이예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막았던 손으로 얼굴을 가려 시야를 차단했다.
얼굴에 닿은 손바닥에 미지근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축축한 그 감촉에 이예주는 제가 언제부터인지 꼴사납게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탁, 화면이 완전히 꺼지고 그에 대비하듯 여태껏 어두웠던 본부 내부가 환해졌다.
어둠 속에서 바들바들 떤 채 울던 그녀는 순식간에 환해진 시야에 얼굴을 가린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살아남은 시간족 인간들을 태운 Ark-17는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대기권을 떠돌게 됩니다. 그 와중에 눈족 족장은 제 아내가 낳아 용암 대폭발을 일으킨 아이의 이름을 람(Ram)이라 명명합니다.”
“…….”
“신을 뜻하는 고대어의 앞 글자와 파편을 뜻하는 어음을 합쳐 만들었다더군요. ‘여신의 파편’이란 뜻의 이름으로 눈족은 여족장의 배를 빌려 태어난 검은 파편을 신격화하는 듯 보였…… 구원자님?”
토끼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망연자실 서 있는 구원자를 그제야 확인한 여준이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구원자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혹시 아프신 데라도…….”
“저 사람은…….”
그 이름을 싫어하고 혐오했어.
이예주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나비 아저씨의 말처럼 그는 그 이름을 지독히도 증오할 만했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
부르라고 있는 이름을 왜 못 부르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자신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며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쨌더라. 이름을 지어 준답시고 오만 방자하게 날뛰기까지 하였지 않나.
제가 다를 게 뭐라고. 제가 저 인간들과 다를 게 뭐 있다고.
이예주는 소매를 들어 젖은 눈을 박박 내리 닦았다.
알 듯 모를 듯 가슴이 버석거리고 숨쉬기가 벅찼다.
과거의 제가 나타나 지금의 자신을 낄낄 비웃으며 조롱하는 것 같았다.
왜 답지 않게 청승이야? 결국 네가 원한 게 이런 것이 아니었냐고.
선을 긋는 듯한 그의 태도와 거리를 두는 조롱이 때문에 서운함이 들 때마다 누구보다 그들에 대해 알기를, 그들에게 포함되길 갈망하던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걸 원한 건 아니었어.
그의 비참하고 참담한 과거를 맞닥뜨려 과거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었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었어.
“저 사람은 신이에요?”
이예주는 낮게 침잠된 목소리로 여준에게 물었다.
언젠가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던 적이 있지만, 그는 답해 주지 않았다.
“검은 파편은 신이에요?”
이제 와선 모든 게 무의미한 질문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들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신을 깨워 자신들을 멸망의 궁지로 밀어 넣은 것이냐고.
“……신과 같은 불사의 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무기와 공격으로도 죽지 않지요.”
여준은 울음을 멈추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묻는 이예주를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해 주었다.
“미지의 에너지로 생명체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인간이 절대 할 수 없는 상상 초월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이전의 선조들이 믿었던 ‘신’과 비슷한 형태로 정의 내릴 수도 있습니다만, 시간족은 여신이 아닌 그 어떤 신도 믿지 않습니다. 눈족은 여신의 파편이라 하여 검은 파편을 신격화하여 떠받드는 분위기지만 말입니다.”
“…….”
“검은 파편은 여신의 수많은 권능들 중 가장 강한 것이 떨어져 나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게 한결같이 이어진 눈족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현재로썬 가장 신빙성 있는 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검은 파편이 만일 신이라면 아마 인간을 사랑한 여신에게 대항해 인류를 멸망시킬 악신일 겁니다. 우리의 사명은 바로 평화를 위협하는 악신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으로…….”
“지상으로 끌어 올려졌을 적에 검은 파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예주는 반복되는 다리족 족장의 논지가 지긋지긋했다.
1000년 전의 인간들이나 1000년 후의 인간들이나 하는 말은 다 똑같았다.
검은 파편의 제거, 제거, 제거……
그를 거대한 악의 축으로 세워 둔 채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눈족 여족장의 배에서 튀어나온 살덩어리에 불과할 때도, 살덩어리를 찢고 태어났을 때도!”
간신히 씹어 삼켰던 토악질이 맹렬히 치솟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요. 잠들어 있던 검은 파편을 깨워서 용암 폭발이 일어나게 한 건 오히려 인간들이에요. 같이 봤잖아요.”
여준은 구원자의 다른 관점에 매우 당황했다.
과거의 일들.
1000년 전 세기말, 악신이었던 검은 파편이 어떻게 용암 대폭발을 일으켰는지, 어떤 식으로 인류 멸망이 초래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구원자가 더 이상의 거부감 없이 자신들을 도우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붉은 개의 멸족에 대해 설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치 벌레 보는 것처럼 혐오스럽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건 예측한 모습과 상이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까워지긴커녕 점점 거리를 두는 것만 같은 그녀의 태도에, 여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반론했다.
“……구원자님께서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물론 검은 파편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던 선조들의 실수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일을 저지른 이후 사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작금의 세계는 멸망될 위기에 빠져 있고 언제까지 과거에만 얽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자님. 지금도 검은 파편의 손에 수십, 수백의 인명이 손쓸 틈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걸요.”
“…….”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인류의 미래를 위해 힘겨운 전투를 지속해 선조들이 하지 못했던 지상 최대의 적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할 것입니다.”
여준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굳은 표정을 피고 쾌활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구원자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썼다.
당장은 1000년 전의 일들을 몰아 봐서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도 복구가 완료된 데이터를 보고 충격을 받았으니 그녀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준의 엄한 짐작과는 달리 이예주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준조차 겪어 보지 못한 데이터 속의 세상을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들도 하지 못한 일을 무슨 수로요?”
“……예?”
“지금보다 훨씬 발달한 1000년 전에도 제거하지 못했던 검은 파편을 무슨 수로 제거할 건데요?”
그렇게 잔인한 짓거릴 해 놓고 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제거를 해. 폭탄에서도 살아남고 인간들이 겨냥한 총에 맞고도 이렇게 장성한 그를, 대체 어떻게.
람의 분노는 정당했고, 그의 증오는 순수하게 정제된 것이었다.
지금껏 그 남자가 어떤 것을 억누르고 자신을 바라보았을지, 이예주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더럭 내려앉고 몸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여준은 스크린을 통해 과거를 엿보는 내내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졌던 검은 파편의 증오가 전혀 와 닿지 않는 듯해 보였다.
“……우리에겐 구원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부정적이고 단정적으로만 이야기하는 이예주가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지 그녀를 바라보는 여준의 눈이 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부 내의 전부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이예주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용암 대폭발로 죽은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미친놈. 이예주는 할 말을 잃고 여준의 낯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새벽녘 비상 통로에서 겪었던 유나의 일로 얼핏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이 새끼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야.
시간족 중 가장 정상인을 잘 흉내 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폐쇄적이고 폭력적이기 그지없었다.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목표를 검은 파편의 제거로 설정함으로써 붕괴를 간신히 막고 있는 것이다.
“구원자님이 어떤 감정이신지 잘 압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과거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셨으니 혼란스럽고 두려우실 겁니다. 복구된 데이터를 시기별로 정리하는 동안 저희들도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요.”
여준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며 질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이예주를 위로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촉박합니다. 전 인류의 97퍼센트가 검은 파편에 의해 죽고 이제 단 3퍼센트만이 남았습니다, 구원자님. 우리들은 구원자님께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 농담 하나까지도 헛되이 지나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들 중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검은 파편을 보고 겪은 분이 바로 당신이니 말입니다.”
“…….”
“그러니까 힘드시더라도 부디 도와주십시오, 구원자님.”
다리족 족장은 제법 절박한 얼굴로 다가왔다.
부담감과 거북함에 이예주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여준은 거리를 단숨에 좁혀 다가와 그녀의 두 손을 덥석 붙잡기까지 했다.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셨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원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들어줄 의향도, 기술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
“당장에 말할 만한 것이 없으시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냥 그동안에 겪으셨던 경험담을 동료에게 털어놓듯 가볍게 얘기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아, 그렇죠. 저희가 구원자님을 구출하기 직전에 갇혀 계셨던 산 중턱의 이야기는 어떠십니까? 중턱에 왜 갇혀 계셨는지, 그 부근 전체를 뒤덮은 그 가시 장벽은 대체 왜, 어떻게 생기게 된 건지부터가 좋겠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마친 여준은 이제 대답해 보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로지 이예주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눈이 집요했다.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힘을 주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억세게도 부여잡은 탓에 손끝이 저렸다.
“……그건 뤼미에르 꽃의 뿌리에요.”
이예주는 결국 떠밀리듯 묻는 말에 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오물을 털어 내듯 힘겹게 잡힌 손을 뿌리치자 원하는 대답을 들은 족장이 그제야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잠시 닿았던 온기가 끔찍했다.
다시 손을 붙잡히긴 싫어 이예주는 허겁지겁 두 손을 모아 뒤로 숨겼다.
“뤼미에르…… 햇살을 담은 빛나는 꽃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 꽃은 가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계약을 맺고 변형되었어요.”
“계약, 말입니까? 철수 상병, 기록 준비해!”
“예, 대장님!”
여준의 명령에 철수가 후다닥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인간들 또한 허겁지겁 펜과 노트를 꺼내거나 컴퓨터 키보드를 붙잡은 채 이예주의 입을 예의 주시했다.
그 모습에 그녀는 그만 아연해졌다.
“검은 파편은 지금까지 움직일 수 있는 동물들을 대상으로만 계약을 해 왔기 때문에 식물과 계약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역시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여준이 미소를 지으며 환호했다.
“혹시 검은 파편이 왜 뤼미에르와 계약을 하여 그 뿌리를 거대한 가시장벽으로 변형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이예주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다소 성의 없게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도 여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곧바로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 안에는 검은 파편이 은폐할 만한 뭔가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예?”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예주는 힘없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 지역은 유독 독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물들이 서식할 수 없습니다.”
여준이 그에 동의한다는 듯 입에 침조차 바르지 않고 유창하게 거짓말을 했다.
다리족 족장의 이중성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다만 산 중턱에 있는 거대한 호수는 수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식용으로 쓸 수 있는 어류, 갑각류, 어패류는 물론이고 호수 바닥에는 동력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자원들이 대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껏 자원 채집을 위해 그 지역으로 투입된 인원들은 아무도, 그 아무도 되돌아 나오지 못했지요.”
“…….”
“식인을 하는 포악한 생명체가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의 인명 손실을 막기 위해 정찰조차 보내지 않았던 지역인데……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게 확실합니까?”
여준은 눈 깜짝할 새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짐짓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잃어버린 제 부하들이 안타깝고 슬퍼서 미치겠다는 듯.
그래서 조금이라도 구원자의 얄팍한 동정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