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16)화 (218/319)

“……저 여자, 검은 파편을 삼키고 죽었는데요.”

이예주는 새된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흘끗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준을 바라보니 그는 처음 의자에 착석했던 때와 똑같았다.

그녀는 근처에 미동 없이 서 있는 유나, 철수 그리고 다리족들을 곁눈질했다. 

그렇게 잔인한 영상을 보았는데도 표정들이 하나같이 한결같았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두피가 차가워진 것은 저 하나뿐인 듯싶었다. 

이예주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듯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검은 파편을 먹으려 들었다고요.”

“…….”

“그리고 풍선처럼 배가 부풀어서 죽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문제가 없이…….”

“네. 그렇습니다.”

횡설수설,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설명하려던 이예주의 말문을 막고 여준이 다시 앞을 바라보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작은 고갯짓에 까마득한 암전뿐이었던 화면에 ‘팟’ 불이 켜졌다. 

“문제는 당시 Core1에 탑승했던 눈족 대원들이 여족장의 시체를 내핵에서부터 지상까지 끌고 온 것이었습니다.”

두근두근, 갑작스레 환해진 화면에 눈이 부신 것도 잠시, 본부 내에 크게 울려 퍼지는 박동 소리에 이예주는 억지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얼굴이 시퍼렇게 변색되었다.

화면 안을 꽉 채운 것은 커다랗고 벌건 덩어리였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 안에 있는 그것은 폐병 환자가 내뱉은 각혈 덩어리를 한데 모아 뭉친 것처럼 검붉고 물컹물컹해 보였다. 

게다가 움직였다. 그래,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내장처럼 규칙적으로. 스크린으로부터 시끄럽게 들려오는 맥동 소리는 바로 그것에서부터 나왔다.

이예주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눈족 여족장의 배에서 튀어나온 것임을 알아 차렸다. 

하지만 인간의 내장 중 하나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컸다. 

……그리고 살아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과 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자 이예주의 가슴 또한 덩달아 수런거렸다.

“눈족 여족장의 시체는 소유할 수 있었지만, 저것마저 눈족이 수거할 수는 없었죠. 눈족만 본 것도 아니거니와 눈족에서 수습하여 숨겼다 해도…… 저것의 정체가 뭔지 알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눈족 여족장과 DNA가 완벽히 일치하여 그녀의 신체 중 일부분인 것 같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단정 짓기엔, 보시다시피.”

……너무 크고 무거웠죠. 그리고 살아 있고요. 

이것만큼은 그 또한 믿기지 않다는 듯 여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화면 안에 알 수 없는 DNA 구조와 염색체 사진들이 어지러이 떴다가 다시 사라졌다.

핏덩이가 숨을 쉬는 것처럼 피를 찍 내뿜으며 움칫움칫 진동했다. 

그 모습이 꼭 거대한 심장 같았다. 

“게다가 유전자 정보와는 달리 내뿜는 생명 에너지는 블랙 웨이브의 파동과 일치했습니다. 때문에 10개월간 수많은 연구와 실험, 그리고 제거에 관한 갑론을박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부해도 나오는 것은 오로지 살덩어리뿐이었다고 합니다. 혹시나 눈족 여족장이 내핵 프로젝트에 대원으로 탑승할 시 임신 중이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전제했지만, 그 안을 반으로 갈라도 장기와 기관이 존재하지 않아 그게 아니란 판단이 내렸지요.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여준의 말이 멈춤과 동시에 소리 없는 짧은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새하얀 방에 피를 질질 흘리며 두 쪽으로 갈라진 핏덩어리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서로를 향해 굼질굼질 움직였다. 

박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동영상은 재생 속도를 배가했는지 빠르게 끝났다. 

화면은 느리지만 꾸준히 움직여 종래에 하나로 붙어 다시 완전체가 된 핏덩어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어떤 제거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반으로 자른 후 절개된 부분을 불로 지지고 독극물을 묻혀도 소용없었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것으로 난도질을 해도, 총을 쏴서 벌집을 만들고, 화롯불에 통째로 구워도 생명 활동과 같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대 시간족들이 사색이 되어 탁상공론을 하기 충분한 주제였지요.”

당시의 사람들이 매우 공감된다는 듯한 얼굴로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주는 그저 입을 다문 채 희게 질린 얼굴로 화면과 여준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쯤 되자 당연히 원자폭탄이나 화학 무기로 제거하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거세졌습니다. 다리족 고위 간부들 또한 대부분 제거하자는 쪽에 손을 들었습니다. 일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관찰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만, 군중 심리를 물리치기란 힘든 일이죠.”

“…….”

“제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는 시간을 두고 관찰하자는 쪽에 손을 들었을 겁니다. 블랙 웨이브와 에너지 파동이 일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고, 어떤 연구 결과로 동향을 이끌지 모를 귀중한 연구물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자님?”

이예주는 여준의 헛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물론 다리족 족장은 그런 것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이어 치고받는 혈전이 끝을 보이기도 전에 다리족과 눈족은 새로운 상황에 돌입하게 됩니다. Core1 귀환 후 10개월이 지났을 무렵, 돌연 내핵에서 가져온 커다란 살덩어리가 찢어지며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

거의 반 정도는 흘려듣는 식으로 멀거니 여준의 말을 듣고 있던 이예주는 불현듯 귀를 파고드는 생소한 소리에 멈칫했다.

“아이……?” 

“네. 10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습니다. 화면을 봐 주십시오.”

이예주의 목이 화면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입에서 탄성도, 신음도 아닌 미약한 소리가 바람 빠지듯 새어 나왔다.

“……어.”

10살 남짓한 벌거벗은 남자아이가 갈기갈기 찢어진 살덩어리 틈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사방이 지저분한 오물이었으나 남자 아이의 몸은 새하얗고 깨끗했다. 

피처럼 붉은 입술, 흑요석을 얇게 저며 심어 놓은 것처럼 가늘고 결이 좋아 보이는 검은색 머릿결…….

“10개월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10개월은 인간의 출산 기간과 일치합니다. 비록 태아가 아니라 꽤 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핏덩어리를 찢고 나왔지만, 검은 파편이 인간의 모습으로 실체화했다는 걸 추론하기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람이었다.

“그 살덩어리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더 볼보 참여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아이의 처치에 관한 갑론을박이 밤낮없이 이어졌지요. 그도 모자라 눈족 출신 학자 한 명이 여족장이 썼던 검은 동화책 안의 검은 파편 신화 중 한 부분을 거론하자, 당장이라도 그것을 내핵으로 돌려놓거나 제거하자는 주장의 비율이 높아집니다.”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 검은 파편은 울부짖었다.

—내가 다시 지상으로 끌어 올려질 적에 너희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다.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발겨 주마…… 까마득한 잠에 빠져들며 검은 파편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이예주는 여준의 입을 통해 스치듯이 거론된 신화의 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춥지도 않은데 체온이 내려가며 목 뒤가 오싹해졌다. 

“하지만 연일 이어진 다리족과 눈족의 탁상공론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랜 시간 눈족의 뒤를 캐던 미국 정부가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서둘러 개입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미 정부는 애초에 우환이 될 싹을 남겨 두지 말자는 주의였고, 검은 파편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반대를 외칠 새도 없이 더 볼보의 남극 기지 자체를 날려 버릴 원자폭탄이 남극으로 대량 들어왔습니다.”

스크린 안에 이예주도 익히 알던 1000년 전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미국이 무언가를 허용했다는 내용의 뉴스 영상이었다. 

그게 남극에 폭탄을 투여하는 것에 대한 허용이었는지 폭탄을 실은 전투기와 함선이 분주히 하늘과 바다를 오갔다.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손쓸 틈도 없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남은 눈족 족장은 한국의 다리족에게 은밀한 제안을 합니다. 바로 비행선 Ark-17의 건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근거로 다리족을 구워삶았는지는 데이터로 기록되지 않은 극비 사항이었기에 후대인인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추측하기론 아무래도 검은 파편이 내핵에서 끌어 올려졌다는 사실과 막연히 짐작했던 악신이 아이의 모습으로 실체화했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겠지요.”

“…….”

“결론적으로 그들은 옳았습니다. 그들은 아이로 다시 태어난 검은 파편을 제거하기 직전, 60일도 안 되는 기간 안에 Ark-17을 급조하는데 성공했고, 용암 대폭발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폭탄 설치 완료. 폭탄 설치 완료. 기지 내부의 모든 인원은 서둘러 밖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빅, 빅, 빅. 

비행선에 올라탄 후 이예주도 들어 본 적이 있은 비상 벨 소리와 탈출을 권하는 딱딱한 기계음. 

영상 속에서 군인들을 따라 바삐 건물을 빠져나가는 한국인, 미국인들이 보였다.

“여기서부턴 보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화면이 반전되었다. 

새하얀 방에 핏덩어리의 잔해들과 함께 어린 람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영상이었다.

폭발 5초 전, 4초 전. 기계음이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구원자님께서 보시기에 조금 잔인한 면이 없지 않아…….” 

“람!”

이예주는 비명을 지르듯 벌떡 일어나 화면 속의 아이를 불렀다. 

텅 빈 건물 안에는 제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작은 남자아이만 남겨졌다. 

폭발 직전인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 없는 아이 때문에 이예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 떠. 일어나, 일어나서 도망쳐. 과거의 영상이라는 것은 이미 그녀의 안중에는 없었다. 눈 떠, 눈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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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이 끝난 그때, 이예주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아이가 꾹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마치 혈흔 같은 붉은색 홍안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대형 스크린이 시뻘건 불꽃으로 점멸했다. 

순식간에 남극 대륙이 폭발했다. 인간들이 설치한 폭탄으로 인한 폭발인 듯했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지상으로 끌어 올려진 검은 파편에 의한 용암 대폭발의 시작이었다.

전 세계의 얕은 지반 곳곳이 동시에 폭발하듯 튀어 오르며 벌거죽죽한 고온의 유황을 뱉어 냈다. 

지상으로 토해진 용암 덩어리들은 마치 몇 백, 몇 천 년을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인간,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지구 곳곳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연신 본부에 울려 퍼지자 어디선가 정말로 단백질 타는 구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높은 곳으로 도망쳤지만, 인간들은 얼마 안 가 차오른 용암에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팔열지옥(八熱地獄)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어딜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느른하게 흐르는 용암. 사방이 지옥. 지옥. 불바다.

인류가 멸망하는 그해, 일부 다리족과 눈족은 방주 Ark-17를 타고 그들이 만든 불지옥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하늘에 뜬 채 지구를 한 바퀴 순회하는 Ark-17에 탑승한 인간들은 그들의 손으로 망쳐 버린 인류의 마지막을 똑똑히 내려 보는 한편, 인류가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님을 안도했다. 

그 뒤 두 달에 걸쳐 세계 일주를 한 비행선 Ark-17이 남극을 순회하던 때였다. 

인간들의 손으로 지상으로 끌어 올려진 검은 파편이 펄펄 끓는 용암 벌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바로 옆에서 픽픽 튀어 오르는 마그마가 무섭지도 않은지, 위태로이 서 있는 벌거벗은 남자아이. 

엔진 소리를 들은 건지 문득 고개를 들은 아이가 하늘 위에 떠 있는 비행선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사실 과연 비행선을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시뻘건 동공은 이지라곤 한 조각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조차 에너지를 다스릴 수 없을 만큼 격분하게 되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예주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시울이 후끈해지더니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인면어를 끌고 산장으로 돌아가던 그가 말한 것이 이런 것이었나. 

그가 말하던 분노는, 꿈에서조차 상상도 못했던 이 끔찍하고 무서운 것에서부터 기초되었던 것인가. 

덜덜 떨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옷자락을 꽉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손톱이 파고든 살갗이 아파 왔다. 

폭발에도 어린 람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화면 속의 조준경이 아이를 얼굴을 향해 다시 조준되었다. 

빨간 레이저가 창백한 피부에 어른거리자 이예주는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러면 당장 악을 쓸 것 같아서. 

저를 겨냥하는 총구를 마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한 그 얼굴이, 검은색이었던 눈이 시뻘겋게 변해 버린 이유에 대해 덤덤히 이야기하던 그 얼굴과 겹쳐 보여서.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람, 람,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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