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과거를 보는 눈족 족장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눈족을 대표하는 대외적인 활동은 모두 저 여자가 했고, 다른 족장은 2017년에도 원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리족이 애써 긁어모은 그에 관한 정보들 또한…….”
여준은 흘긋 이예주의 눈치를 본 후,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용암 대폭발에 대피하기 위해 2017년도에 Ark-17에 올라탔던 눈족들에 의해 전부 폐기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완벽하게 비밀에 쌓인 남자군요.”
어쩌면 미국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지껄이며 여준은 하핫, 멋쩍게 웃었다.
의자 뒤에 서 있던 철수와 기타 수행원들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허접한 농담에 웃지 않는 사람은 이예주와 유나뿐이었다.
“그래서 Core1은 어떻게 됐어요?”
“흠흠, 20시간 안에 가능했던 굴착 한도는 내핵의 반지름에 조금 못 미치는 약 800마일이었지만, 천만 다행스럽게도 하선 후 굴착 작업 14시간 만에 900킬로미터 지점에서 대원들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첫 시도와는 달리 안타까운 희생 없는 완전한 성공이었습니다.”
제 수행원들과 화통하게 웃던 여준은 이예주의 냉정한 태도가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여러 번하다가 서두를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화면을 향해 손짓했다.
이예주는 뻑뻑한 목을 움직여 고개를 앞으로 고정시켰다.
스크린 위에는 아무것도 없이 깜깜했다.
대신 허억, 허억, 누군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화면을 넘기는 데 있어 잠시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차분히 기다렸지만, 몇 분이 지나도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이예주가 의아한 얼굴로 여준을 돌아보았다.
“900킬로미터 지점부터 시작되는 지구 내핵의 정중앙입니다.”
“정중앙……?”
“내부 속까지 모조리 뜨거운 금속으로 뭉쳐져 있을 것이란 과학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내핵 정중앙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한 줌의 빛도, 산소도, 펄펄 끓는 금속 액체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때였다.
여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컴컴한 화면 속에 한 줄기의 빛이 주르륵 지나갔다.
그 빛 새로 스치듯이 검고 붉은 덩어리가 보였다.
이예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스크린에 아무것도 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상이 재생되고 있음을.
허억 허억, 가뿐 숨소리와 함께 남자의 중저음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We found it.
그와 동시에 여러 줄기의 빛이 화면 안쪽을 이리저리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거무스름한 안개와 희끔하고 불그스름한 기운이 보였다.
“저게…… 저게 뭐예요?”
“검은 안개에 휩싸인 검은 파편입니다.”
“저게…….”
저게 정말 검은 파편이냐고 또 한 번 물으려던 그녀의 말은 실행되지 못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환희 어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여기는 Core1, 여기는 Core1! 검은 파편을 찾았다.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
화면 안의 사람들은 무의 공간 가운데에 존재하는 검은 뭉텅이 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가까워질수록 빛이 닿는 면적이 커지면서, 이예주 또한 볼 수 있을 정도로 뭉텅이의 정체가 또렷이 드러났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커다란 검정.
일전에 보았던 것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그것은 검은 안개였다.
―전방 200미터 앞부터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으니 신중하게 진입하도록 한다. 전 대원 모두 주의를 기울이고, 특히 단독 행동은 자제하…… 이, 이봐! 이봐!
총사령관인 듯한 남자가 긴장감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내리는 명령이 이예주에게까지 생생히 전달된 그 순간이었다.
방화 슈트를 입은 대원 한 명이 촬영하고 있는 사람을 앞질러 검은 안개가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이봐! 이봐, 위치로! 위치로!
한 명의 돌발 행동으로 모두가 당황한 채 우왕좌왕하는 동안, 홀로 튀어 나간 인간은 금방 검은 안개가 자박하게 깔린 곳까지 도달했다.
―위치로! 위치로!
그 사람은 사령관의 명령도 완전히 무시한 채 미친 듯이 검은 안개를 파헤치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불투명한 검은 안개들이 방화 슈트로 감싸져 있는 팔과 다리에 엉겨 붙었다.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던 인간은 검은 안개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 여의치 않았는지, 두 팔을 들어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 던졌다.
6000도를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뜨겁게 달궈진 금속 덩어리 속, 빛도 산소도 없어 인간이 맨몸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곳에서 그가 어떻게 방화 헬멧조차 쓰지 않고 멀쩡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신의 환생이란 거죽을 뒤집어써 본디 가지고 있는 능력이 출중한 건가.
뿌연 안개 사이로 찬란한 금발이 천천히 흩뿌려질 적에 여자는, 눈족 여족장은 미친 듯이 검은 안개를 뜯어 먹고 있었다.
마치 시간족이 탄생하게 된 전설처럼, 여자가 스스로 쓴 동화책에 등장하는 최초의 눈족처럼.
―족장님!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몇 달은 굶은 사람처럼 검은 안개를 뜯어 먹는 여자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검은색 뭉텅이를 뜯어 입에 처넣고, 먹이에 달려든 아귀처럼 주둥이를 사방으로 내뻗으며 검은 안개를 씹어 먹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거대한 검은색 뭉치의 중심부로 들어선 여자는 마침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검은 파편을 움켜쥐었다.
―하악! 내가, 내가 해냈어! 내가 검은 파편을 찾아냈어!
여자의 주먹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마름모꼴 파편이 여자의 손에 닿았다.
그러자 검은 파편이 불에 달궈진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며 붉은 빛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검은 파편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빨갛게 변해 버린 파편을 들고 여자는 미친 사람처럼 광소했다.
―흐흐, 내가, 내가 드디어!
아차 할 새 없이 여자는 시뻘건 색의 파편을 입 속에 처넣고 꿀꺽 삼켰다.
커다랗고 날카로운 그것을 삼켜 내느라 컥컥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지만 여자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을지언정, 그것을 도로 토해 내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한 광기가 여자의 주위에 휘몰아쳤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크헉! 내가! 내가 해냈어! 흐흐, 흐하하학!
간신히, 그리고 기어이 검은 파편을 삼킨 눈족 여족장이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해냈다, 해냈어!
하지만 손뼉까지 짝짝 마주치며 낄낄낄 웃어 대던 여자의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난 드디어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컥!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이 찢어져라 웃어 대던 여자가 돌연 눈을 부릅뜨고 배를 움켜쥐었다.
―크흐, 커헉! 커흐윽!
내핵을 파헤치고 나가 마침내 최초의 눈족도 하지 못한 검은 파편을 삼킨 여자는, 해냈다는 성취감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하고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아아, 아파! 아파아아악―!
곤돌라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여자의 괴성에 이예주는 몸을 움찔거렸다.
왜 갑자기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지?
자신의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여자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과식을 한 사람처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짝 튀어나왔던 여자의 배는, 몇 초 지나자 축구공만 해졌고, 잠시 후에는 누가 보더라도 임신한 사람의 그것처럼 커다랗게 부풀었다.
흡사 누가 풍선에 튜브를 꽂은 채 펌프를 눌러 공기를 주입하는 것처럼 여자의 복부는 점점 커졌다.
얼마 안 가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입고 있던 여자의 방화 슈트가 찢어지면서 그녀의 배가 노출되었다.
―크허헉! 아파! 아파! 커흑!
옷이 찢어진 후에도 둥실 솟아오른 여자의 배는 크기를 키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찢어질 듯 확장된 동공 주변으로 피가 몰려 그녀의 눈이 피눈물이 고인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찌지직, 찌직. 무언가 찢기고 찢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이예주는 그것이 여자의 뱃가죽이 찢어지는 소리인지, 부릅뜨인 그녀의 눈동자가 찢어지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만삭의 임부라고 보기엔 너무도 흉측하고 기이할 만큼 튀어나온 여자의 배는 이제 그녀와 같은 성인 여자 한 명이 들어 있다고 해도 믿겨질 만큼 거대해졌다.
얇고 창백해진 피부에 실핏줄들이 도드라졌다.
한계치였다. 더 이상 늘어날 것이 없음에도 계속해서 배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화면 밖의 이예주도 알 수 있었다.
―아하악! 끄으아아악―! 컥!
듣는 사람조차 버거울 만큼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던 여자는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터져 버렸다.
팍, 어디서 수박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으로 피와 잔해가 튀었다.
터진 여자의 배 속에서 커다란 핏덩어리가 튀어나와 철퍽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피를 분수처럼 내뿜던 눈족 여족장의 몸도 죽은 나뭇가지처럼 천천히 스러졌다.
“흐, 흐으.”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핏줄이 드극드극 일어선 채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처럼 돌출되었던 여자의 귀신같은 눈동자가 생생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족장님! 조, 족장님!
―사령관님! 내부 온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액체 질소는 얼마나 남았지?
―35퍼센트입니다! 이대로라면 3시간을 버티기가 힘듭니다!
―전원 모두 당장 철수한다! 철수해! 김 대위!
―사령관님! 눈족 대원들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앞으로 이동합니다! 아무래도 족장을 데리고 가려는 모양입니다!
화면 속의 상황이 급박해졌다.
아직도 자욱하게 검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는 앞쪽으로 달려가는 몇몇 인간들의 뒷모습을 보여 줬다가 다시 빛이 닿지 않은 심연을 비췄다.
화면이 쉴 새 없이 휙휙 전환되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눈족 놈들!
멋대로 행동하는 눈족들이 치가 떨린다는 듯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군. 여기 있다가 모두 개죽음당할 순 없으니, 다리족 대원들은 신속히 철수한다! 뛰어!
덜걱, 덜그럭 소리와 함께 화면이 팟 꺼졌다.
동영상은 그게 끝이었다.
이예주는 사방이 잠잠해지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뜰 수 있었다.
단지 화면을 통해 1000년 전의 상황을 엿본 것뿐인데, 정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달음박질을 쳤다.
그녀는 얕게 헐떡이며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비행선 내부가 적정 온도로 알맞게 조절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비행선 밖의 깎아지른 절벽 끝에 내몰린 것처럼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눈족 대원들은 죽은 여족장의 시체를 끌고 1시간 차이로 레만 면에 정차한 Core1에 도착했습니다. 다리족 대원이 기록했던 일지에 따르면, 눈족 대원들이 Core1에 도착했을 때쯤 소지하고 있던 액체 질소가 고갈되어 방화 슈트가 50퍼센트 이상 손상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화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족장의 시체를 수거한 것입니다. 대단한 집념이지요.”
“…….”
“눈족 여족장을 제외한 Core1에 탑승한 전 대원은 다행히도 사상자 없이 무사히 첫 임무를 끝마칩니다. 그들의 임무는 레만 면에서부터 내핵을 뚫고 진입해 검은 파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까지였으니까요. 검은 파편의 존재를 확인한 이후에 일어난 눈족 여족장의 죽음은 개인의 단독 행동으로 인한 일이었으니 전적으로 눈족 책임이었지요. 눈족은 불미스러운 사고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다음 내핵 프로젝트에서는 어떤 대원도 참여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여준은 이예주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침착하게 남은 말들을 쏟아 냈다.
“그러나 여족장의 시체는 한미 연합 연구소에서 사망 원인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남편이 강력히 주장하여 눈족에게 넘겨졌습니다. 이후 눈족에서 여족장의 시체를 부검했지요. 그 기록이 Ark-17의 데이터베이스에 남겨져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기록 삭제의 흔적일 뿐, 제대로 된 데이터는 아닙니다. 여족장이 왜 검은 파편을 삼켰는지, 그것을 삼킨 후 어째서 배가 부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눈족 여족장의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 같았지요.”
이예주는 기어이 검은 파편을 손에 콰득 움켜쥐었던 화면 속의 여자를 생각했다.
아니, 그녀의 손에서 검은 안개를 뚫고 영롱한 붉은 빛을 발산하던 검은 파편을.
검은 파편이라는 말이 정말로 ‘파편’의 모습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것의 모양과 람을 번갈아 가며 떠올리던 것도 잠시, 이예주의 관심은 검은 파편의 모양에서 금방 다른 것으로 옮겨 갔다.
검은 파편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할 만큼 그것의 색은 온통 시뻘겠다.
루비보다도, 홍옥보다도.
그 어떤 보석의 붉은색보다도 가장 순수한 붉음으로 타오르던 검은 파편. 검은 파편이라고 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빨간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기 무섭게 그녀의 귓가에 문득 무덤덤한 람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너무 화가 나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 때문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어 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
―그것은 모체 에너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의식을 가진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지. 잠에 들기 직전에 보았던 것은, 인간들의 피처럼 온통 검붉은 색뿐이었다.
1000년 전의 사람들이나 여준에겐 검은 파편이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단 사실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검은 파편이 어째서 붉게 빛나는지 따위가 아니라,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그 흉측한 것이 실제로 지구 내핵에 존재했다는 것뿐.
그것을 없애고, 빼앗고, 소유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아무것도 몰랐던 이예주조차 금방 알아챈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