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족 여족장은 책 속 여신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는 짓을 곧잘 하는 조금 미친 여자였지만…… 데이터에 따르면 유려한 필체와 아름다운 작화로 그 시절엔 유명한 작가였다고 합니다.”
여준의 입에서 드물게 상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예주는 이번만큼은 그의 말에 극히 공감하여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어쩐지 책 속에 그려져 있는 여신의 그림이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생생하다 싶더라니.
지 얼굴을 가져다 여신이라고 그려? 역시 어느 족장이건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니까.
“안타깝게도 그녀는 검은 동화책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이후 배가 터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버렸지만 말입니다. 2017년 더 볼보가 남극 프로젝트에 성공했을 무렵에요.”
그러나 이어지는 여준의 말에 이예주는 입을 떡 벌렸다.
책에 나온 여신의 형상을 한 여자.
그 여자가 죽었다고? 그것도 2017년도에? 그럼 내가 본 건 뭐야?
허상을 본 게 아니었다.
그녀는 팔족 족장의 저택 서재에서 그 여자를 똑똑히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그 미친놈들이 일을 꾸미는 비밀 장소를 찾아내었겠는가.
여자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죽었다는 화면 속의 눈족 족장과 팔족의 도시에서 제가 본 여자를 번갈아 떠올리며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와중이었다.
정말 뜬금없이 그녀의 뇌리를 불쑥 스쳐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생각났다.”
이예주는 비로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처럼 귀에 익었던 굴착 기업 이름의 출처를 기억해 냈다.
전광판이었다.
2017년도, 어마어마한 용암 파도가 서울 한복판을 덮치기 바로 직전에 보았던 맞은편 빌딩의 꼭대기 전광판.
오후 6시를 알리는 광고와 함께 뉴스 속보 자막이 화면에 흘러나왔다.
(주)미래를 보는 회사, 더 볼보가 지구 내핵까지 뚫는 굴착 신기술 Core1을 공개. 남극에서 10개월 전 내핵 작업 이미 착수.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에 이예주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대형 스크린 위로 그녀가 방금 막 기억해 낸 뉴스 속보의 자막이 떠 있었다.
“어…….”
이예주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넋을 놓고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문’을 넘기 전에 더 볼보에 관한 기사를 전광판에서 보았으니, 그렇다면 눈족과 다리족이 2017년에 내핵까지 도달했다는 소리였다.
“16년도 9월, 대량의 액체 질소로 선체를 냉각시키며 끊임없이 땅을 뚫고 들어간 Core1은 최초로 지각 층, 맨틀, 외핵을 지나 마침내 내핵에 도달합니다.”
“…….”
“하지만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외핵과 내핵의 경계인 레만불연속면에 박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4000도에 육박하는 고온에 견디는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내핵에 완전히 진입하기 위해서는 1000마일의 철과 니켈 덩어리를 뚫어야 한다는 것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탓이죠. Core1에 탑승한 대원들은 액체 질소가 고갈되자마자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사망했습니다.”
―Help! Help, please! I don't want to die!
―살려 줘! 아흐으으! 뜨거워, 뜨거워! 아악, 아아아악!
화면이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커다란 비명 소리에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 안에서 돌아가는 동영상은 온통 아비규환이었다.
카메라의 화면을 보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남자, 더운 열기를 참지 못해 발가벗고 내부를 뛰어다니는 한국인 여자.
―Holy Father, Holy Jesus……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화면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은 채 주기도문을 외는 미국인 남자가 보였다.
그들이 믿는 신은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내려 준 시간의 여신일 텐데, 죽기 직전에 다른 신을 찾으며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모습이 기괴했다.
“땅 위에 있던 본부에 마지막으로 전송된 조종석 내부입니다.”
여준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불타는 지옥 속으로 자처하여 들어가 죽어 가던 그들의 모습은 ‘아아아악—!’ 하는 여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뚝, 스크린에 암전이 찾아왔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입이 바짝 마르고 입꼬리가 바르르 떨려 와서 이예주는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녀와는 달리 다시 말을 하는 여준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평이했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밑거름 삼아 더 볼보는 레만면에서부터 내핵을 뚫는 새로운 굴착 기술과, 화씨 12000도에서 20시간 동안 견딜 수 있는 방화 슈트를 개발합니다. 이미 Core1으로 내핵 깊숙이 진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레만면부터는 진입 방법을 바꾼 것입니다. 20시간 동안 인간이 직접 일직선으로 금속 층을 뚫으며 나아가는 방법으로요.”
이예주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앞서 진입에 실패하고 끔찍하게 타 죽어 버린 대원들을 본 탓일까.
검은 파편을 찾기 위함이라고 보기엔 너무 무모하고 맹목적이며 어리석었다.
숨쉬기도 벅찰 만큼 펄펄 끓는 밖으로 나가 직접 뚫는다고?
그게 어떤 건지 상상조차 잘 가지 않는 그녀를 위함인 듯, 화면이 스르륵 바뀌었다.
앞쪽에 거대한 삼각형 드릴을 붙인 새로운 Core1이 다시 지구 속을 파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들을 장착한 Core1은 2017년도의 해가 밝자마자 다시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다시 땅속 깊숙이 들어간 Core1은 16년도와 마찬가지로 레만면을 가로지르던 와중에 박혔고, 그 안에 탑승했던 대원들은 밖으로 나가 내핵을 뚫고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대체.”
하, 한숨과도 같은 침음을 내뱉은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내핵 안에 들어간다 해도 검은 파편이 어디 있는 줄 알고요? 그리고 찾는다 해도…… 찾아서 뭘 어쩌려고 그런 건데요?”
“글쎄요. 그들에게 20시간이란 제한 시간은 별로 중요치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찾을 때까지 뚫고, 실패하면 되풀이해 찾고 또 찾는 것이죠. 그리고 기록들을 보면 당시 저들은 검은 파편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된 나머지, 찾고 난 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해 보였습니다. 그저 찾을 뿐이죠. 그 후의 일은 찾고 나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거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소모품도 아니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찾을 뿐이라고?
이예주는 도무지 시간족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은 한국의 후손들을 보며 인간의 입장을 납득하고 공감했다.
어쩔 수 없다고. 인간을 박멸하려는 람에게 대응하기 위해서 그들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거라고.
하지만 2017년도에는 아니었다.
람이 인간들을 박멸하기 위해 활동한 것도 아니었으니.
활동은커녕 그 시기의 그는 깨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블랙 웨이브? 남극의 온도가 높아져? 그게 뭐 어쨌다고. 인간들이 당장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억지스럽고 불합리하다.
이예주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좋지 않은 기세를 기민하게 알아챈 여준이 마치 제 선조들을 변호하듯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새해가 밝자마자 그들이 서둘러서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이유는, 당시 더 볼보의 공동 대표이사였던 눈족 족장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보는 눈족 여족장 말입니다.”
대형 스크린에 다른 동영상이 재생됐다.
맞으면 베일 듯 날카로운 칼바람이 쌩쌩 부는 설원 위에서 눈을 까뒤집은 금발 머리 여자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검은 파편을 깨우는 동시에 인류는 멸망할지어다!
멸망. 멸망. 멸망!
손톱으로 철판을 긁듯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연달아 멸망을 울부짖는 여자는 자다가 뛰쳐나온 사람처럼 얇은 내의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급히 휴대폰을 꺼내 몰래 찍은 동영상인 듯 화면의 초점이 불분명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흔들리는 영상으로도 꼿꼿이 서 있는 여자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책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여자의 모습이 너무도 오싹했다.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오로지 우리의 유일한 신! 위대한 여신, 시간의 환생체뿐!
그 말을 끝으로 여자의 몸뚱이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픽 쓰러져 눈밭을 굴렀다.
족장님! 족장님! 한쪽에서 우루루 사람들이 몰려오자, 눈족 여족장이 예언을 내리는 장면을 몰래 찍던 이가 황급히 카메라를 숨긴 듯 화면이 깜깜해졌다.
누군가 커다랗게 외쳤다.
여신이 눈족 족장으로 환생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여신이시여! 우리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여신님이 족장으로 환생했어! 검은 파편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려고! 오오, 여신님! 족장님!
무슨 사이비 종교의 예배 같은 광신도들의 외침들이 잇달아 흘러나오더니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찍는 이가 동영상 촬영을 멈췄기 때문이리라.
“눈족 여족장은 미래를 보는 희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눈족 전체의 큰 신임을 얻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내핵 진입을 앞두고 저런 예언까지 내려 거의 여신처럼 떠받들어졌지요. 그녀는 이후 본인의 Core1 탑승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자신만이 인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는 소리였습니다. 한 다리족 연구원의 연구 일지에 따르면 눈족 여족장은 연기를 하는 것 같았고 협력하던 눈족은 모조리 미친놈들 같아 보였지만, 그들의 주장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그때까지만 해도 다리족이 아는 것이라곤 저 여자가 쓴 검은 동화책의 내용처럼 시간족에 관한 고리타분한 전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리족은 그녀의 탑승을 허락합니다. 그리하여 Core1은 단 두 달 만에 빠르게 재건설되었고, 2017년도 1월 1일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황급히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일의 시초이자 원인이 된 저 여자를 탑승한 채로 말입니다.”
여준이 레이저 포인트를 든 손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방화 슈트를 입고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눈족 여족장의 사진이었다.
대략 사십 대 초반, 못해도 삼십 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미모였다.
그러나 이예주는 여자의 웃는 얼굴이 흉측하고 역겹게만 느껴졌다.
엄마도 미래를 보았어. 비록 가까운 제 미래만을 내다보았고, 그조차 이예주를 낳으면서 소실되었지만.
하지만 엄마는 자살로 위장한 채 살해당했다.
시간족 중에서도 전례 없던 능력을 가진 이예주를 지키고 보듬기 위해 정신없이 살았던 엄마였다.
그런 그녀가 생활고 비탄과 같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자살할 리 없었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일족에게 버림받은 엄마가 일족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것을.
예전에는 그들이 엄마를 죽였다고 짐작했어도 그저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되살리는 것에만 연연했다.
하지만 눈족 여족장을 보자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엄마가 빌어먹을 눈족 놈들에게 대체 왜 살해당한 건지.
시간족은 힘이 담긴 부위를 식인하면 그 힘을 빼앗을 수 있다.
드물게 태어나 무척 희귀하다는 미래를 보는 눈족.
그러나 이예주가 1000년 후로 넘어와서 보고 들은 눈족 중 완전하게 모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눈족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당장에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비명을 삭였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는 주머니의 매듭이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지만, 이예주는 그 주머니의 주둥이를 콰득 움켜쥐고 봉했다.
인정하기 싫었다.
람에 관한 이야기들도 간신히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우겨 넣고 있는데, 엄마의 일까지 파헤치게 된다면 이예주는 너무 끔찍해서 게거품을 물고 죽어 버릴 것이다.
이예주는 대형 스크린 화면을 차지한 눈족 여족장의 얼굴에 엄마의 웃는 얼굴을 덧씌워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에 뿌연 성에가 낀 듯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엄마의 마지막 얼굴은 어땠지?
공중에 매달린 채 하늘하늘 움직이던 엄마는, 두 눈을 꾹 감은 채 차갑게 식은 엄마는, 평온한 얼굴이었던가?
집에 그녀를 홀로 두고 학교에 가 버린 자신을 원망하진 않았을까?
“……자님?”
목이 죄이고 코끝에 맴도는 숨결이 서서히 희미해질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낄낄거리며 새 친구들을 사귀던 자신을.
수업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며 앞으로 제가 겪을 즐겁고 찬란한 고등학교 생활을 그리던 자신을…….
“……원자님! 구원자님!”
이예주는 불현듯 어깨를 흔드는 억센 손길에 화들짝 놀라 화면에서 눈을 떼었다.
여준이 옆에서 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준의 뒤쪽에 우루루 서 있던 철수, 유나,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예, 예?”
“여러 번 불렀는데, 심각한 얼굴로 화면만 노려보고 계셨지 말입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연달아 퍼부어지는 물음에 붕 떠 있던 이예주의 정신이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다.
다리족 족장의 눈에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희게 질린 낯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저 여자의 남편은요?”
“예? 남편이라면…….”
“저 시기에 눈족 족장은 두 명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두 사람은 부부 사이였다고…….”
“아.”
그녀가 말하고자 한 말을 뒤늦게 이해했는지 여준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곧바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