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최초로 이상 파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천운이었습니다. 한국은 남극의 자연환경이나 기초 과학 분야 연구보다는 부존자원 개발에 적을 두어, 얼음밖에 없는 땅 위가 아닌 땅 밑부터 파고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덕분에 다리족 또한 늦지 않은 시기에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땅덩어리 하나만이 달랑 있는 입체적인 3D 지도였다.
여준이 굳이 부연 설명 하지 않아도 이예주는 그것이 남극대륙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1977년도, 처음 파견된 한국인 연구원들은 남극해 근처의 수산자원을 조사하던 중 남극 반도 부근에서 이상 증상을 발견합니다. 일부 특정 지역에 생물들이 잔뜩 밀집되어 있던 것입니다. 당시 연구원의 기록에 따르면 해양 생물, 육지 생물, 동식물 가릴 것 없이 모두 유독 그쪽에 치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그곳이 생명의 샘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연구원들은 그 지역을 자원 체취 목적지로 잡아 조사하였고, 그 지반의 온도가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것을 알아내게 됩니다.”
남극 대륙에 붙은 꼬리처럼, 호리하고 얇게 휘어진 왼쪽 윗부분이 화면 속에서 붉게 달아올랐다.
온도를 나타내듯 다른 쪽 땅의 색깔도 노랗고 푸르스름해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곳도 남극 끄트머리에 달린 반도와 같이 뚜렷한 붉은색을 띠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기후가 온화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결론이 지어졌지만, 다음 해인 1978년도가 되자 그 지역의 온도가 전년보다 더욱 상승했습니다. 게다가 그 지반의 범위 또한 넓어진 겁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연구원들은 1마일까지 땅을 파내고 에너지를 측정합니다. 그 결과 그 지역에서 측정이 불가한 미지의 에너지 파동이 지각층보다 훨씬 밑인 깊은 땅속에서부터 조금씩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여준의 말에 답하듯 화면 안의 붉은색 지역의 범위가 조금 더 커졌다.
남극 지도 옆의 남은 공간에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 그래프가 떠올랐다.
좀 더 쉽게 나타내기 위해 수치화한 것은 알겠는데 ‘수포자’인 이예주로선 아무리 봐도 그게 뭘 나타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최초로 그것을 발견한 한국인들은 시간족과 관계없는 일반인들로 꾸려진 연구팀이었기 때문에 지반 밑에서 새어 나오는 이상 파동을 선이라 명명합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미지의 수 를 붙인 것입니다. 이상 파동 감지를 바탕으로 1986년 한국은 남극 조약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1988년 기지를 건설하여 본격적인 선 연구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남극 대륙을 보여 주던 화면이 전환되어 흑백 사진을 스크린 위에 띄웠다.
‘경. 대한민국 남극 과학 기지 준공식. 축’이라는 플랜 카드와 함께 안전모를 쓴 인부들의 사진, 가위를 들고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는 말쑥한 차림새의 사람들과 세워진 건물 앞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는 대원들의 사진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이예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아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극지방 연구 기지의 모습이었다.
“선이라 불리던 이상 파동은 1995년도, 한국과 미국 양국의 연구 정보 공유 목적으로 한국 기지에 파견된 눈족 연구원에 의해 검은 파편을 나타내는 블랙 웨이브로 새로이 개명됩니다. 이때쯤 눈족은 이미 남극대륙의 이상 증세와 미지의 에너지 파동이 검은 파편과 관련된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블랙 웨이브…….”
다시 바뀌는 화면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이예주는 중얼거렸다.
블랙 웨이브라는 것을 최초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한 눈족 인간인 듯 고지식한 남자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떴지만,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라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눈족은 검은 안개를 가진 탓인지 기이할 정도로 검은 파편에 집착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검은 파편을 없애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다리족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눈족과 협력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다리족은 인류의 멸망을 막고 지금까지 전례에 없던 지상 최대의 적을 제거하는 것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두고 있습니다.”
대놓고 눈족과 차별화된 점을 여준이 강조했다.
그러나 눈족과 다리족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이예주는 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눈족이 검은 파편에게 기이할 정도로 집착한다는 말에만 신경이 쏠렸다.
“소유한다고요?”
“네. 그들은 검은 파편의 제거가 아닌 소유를 원하더군요. 까마득한 과거의 저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요?”
파멸과 소유는 엄연히 달랐다. 따지고 보면 반드시 제거하겠다는 여준의 포부가 더 무서운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소유하길 원한다는 눈족 이야기가 더 섬뜩하게만 다가왔다.
인간들이 아무리 기를 써도 람을 없애지 못할 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기 때문일까?
그러나 람에게서 검은 안개인지 뭔지까지 빼앗아 씹어 먹은 게 바로 눈족이 아니었던가.
분노하여 인간들을 다 죽였으면 죽였지, 인간의 손아귀에 휘어 잡힌 람은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기에 이예주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람을 상상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에 간헐적으로 손을 떨었다.
“대체 왜, 무슨 소유를…….”
“그들이 어째서 그토록 검은 파편을 소유하기를 원하는지는 세기말 대폭발 이후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눈족은 검은 파편과 관련된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기에 다리족과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
“그들이 절대로 깨워선 안 될 괴물이 눈을 뜨도록 과거의 모든 일들을 조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둠 속에 위치한 여준의 얼굴이 어느새 굳어 있었다.
이예주를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사무적이었고, 잠시나마 굳게 다물린 입술은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그녀는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쾌활함 뒤에 감추어져 있던 다리족 족장의 본모습을.
“다리족이 블랙 웨이브 연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은 1995년도 말부터입니다. 그동안은 눈족에서 한국 기지에 지나치게 관여하였고 검은 파편과 관련된 실제 연구 자료들을 기밀에 부쳤으나, 남극 반도의 이상 증세가 95년도에 들어서 갑작스럽게 심화되어 버렸습니다. 온도가 매년 높아지는 특수 지역이 넓어진 것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남극 대륙의 전체에 걸쳐 온도가 높은 지역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눈족들은 더 이상 숨기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스크린에 다시 온도로 나타낸 남극 지도가 펼쳐졌다.
아까와는 달리 대륙 전체가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남극 땅을 내핵까지 파헤칠 만한 기술이 전무했고, 눈족은 일반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감시까지 피해 일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결국 95년도 말, 눈족 족장들은 한국 정부에게 일부 연구 자료를 넘기는 조건으로 일시적인 협력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영어로 쓰인 문서들이 화면에서 휙휙 넘어갔다.
모두 해석할 순 없어도 문서 아래쪽의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국기와 그 옆에 휘갈긴 듯한 서명이 보여 어떤 조약서로 추정이 되었다.
숨죽인 채 여준의 말을 듣던 이예주는 화면이 바뀌는 틈을 타 불쑥 질문했다.
“한국 정부의 감시를 피해 일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인데, 한국 정부에 협력을 요청해요?”
“아, 제가 한국 정부라고 했습니까?”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던 듯 여준이 말을 멈추고 한동안 놀란 얼굴로 이예주를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그는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땅이 넓고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던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땅이 작고 인구수가 적은 나라였습니다. 또 지리적으로 강대국 사이의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침략과 전쟁이 쉴 틈 없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 정착했던 다리족 선조들이 국정이 혼란스러운 틈에 정부 고위급이 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의 고위급 인사 대부분 다리족이었으니 한국 정부가 다리족이나 결국 다름없다고?
이예주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덧붙여진 여준의 말이 그 추측에 못을 박았다.
“전쟁이 일어나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하여 잠시 몸을 피했다가, 잠잠해졌을 무렵 다시 돌아오면 굳이 힘 들이지 않아도 자리가 비어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허, 나 참.”
이예주는 1000년 후인 지금에야 모국의 엄청난 기밀 사항과 음모를 알게 되었다.
연신 혀를 차며 혼잡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여준이 경탄하듯 말했다.
“역시 구원자님은 지혜롭고 날카로우십니다.”
제발 그 입 닥쳐.
다행히도 지끈지끈 아파 오는 두피를 부여잡은 채 간절히 바란 기도가 통한 건지 여준은 그녀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어쨌든 다리족은 블랙 웨이브의 존재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수준이라 판단했고, 1996년에 눈족과 협력하여 미국계 한국 기업 ‘더 볼보’라는 굴착 신기술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스크린에 뜬 화면은 어느덧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어 있었다.
TV 뉴스 기사와 신문 기사들이 어지러이 스크린에 떴다 사라졌다.
……(주)미래를 보는 회사, 더 볼보. 남극에서 작업 착수.
더 볼보, 굴착 신기술 발표.
대한민국 기업 더 볼보, 굴착 회사 중 유일하게 121번째 특허 등록…….
“더 볼보?”
들어 본 적 없는 회사 이름이었다.
들어 보았다 하더라도 굴착 관련 기업이니 이예주와는 하등 관계없는 직종이고 기술이라 금방 잊어버렸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었다.
이예주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인 눈족 족장 두 명을 필두로 더 볼보는 약 이십여 년간 남극 땅을 파헤쳤습니다. 검은 파편을 찾기 위한 굴착 기술 개발에 수치로 나타낼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인 액수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눈족 족장 두 명이요?”
“네. 현재 눈족 족장은 한 명뿐이지만, 본래 눈족 족장은 두 명일 수도 있다더군요. 눈족은 과거를 보는 왼쪽 눈의 힘을 가진 자와 미래를 보는 오른쪽 눈의 힘을 가진 자로 나뉘니까요. 물론 미래를 보는 눈족은 극히 드물어 대부분 눈족 족장들은 한 명이었지만, 특수하게도 이때는 두 명이었습니다.”
“으.”
동쪽 대륙 지하 굴에서 보았던 눈족 장로의 경악스러운 몰골을 떠올리며 이예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족 족장이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두 명이나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시기의 눈족 족장 두 명은 부부 사이였다는 겁니다.”
여준이 들고 있던 작은 레이저로 화면을 가리켰다.
눈 깜짝할 새 화면은 다른 사진으로 바뀌었다.
화면은 놀랍게도 그녀 또한 익히 아는 인물로 가득 찼다.
이예주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저, 저 여자는……!”
탐스러운 황금색 머리가 물결치듯 굽이쳤다.
정면을 보며 초연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
그녀는 팔족 족장의 저택에서 본 검은 책 속의 여신이었다.
일리야인 척 자신을 유인하여 팔족 족장의 마수 속에 처넣었던!
“저, 저 망할 년이 왜 저기에…….”
입까지 떡 벌린 채 스크린 화면을 삿대질하는 모습에 여준은 몹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구원자님께서도 검은 동화책을 보셨습니까?”
“……검은 동화책?”
“예. 검은 파편과 시간의 여신 그리고 시간족의 탄생과 관련된 동화책입니다. 저 여자가 바로 그 책의 저자이자 작화가인 미래를 보는 눈족 족장이지요. 2016년 경, 마침내 수많은 실패를 딛고 내핵 굴착 기술 개발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딱 세 권의 책을 써서 각 족장들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다리족과 눈족이 가지고 있던 책은 안타깝게도 500년 전 불시착으로 인해 소실되었습니다. 하나 남은 책이 팔족 땅 어딘가에 있다고는 들었는데, 구원자님께서 찾아내셨나 보군요.”
이예주는 창백한 얼굴로 팔족 족장의 저택에서 찾은 검은 책을 떠올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검은 파편, 람에 관한 것들을 정반대의 입장에서 완전히 왜곡해 서술한 내용을.
책을 찾은 이후 있었던 역겹고 끔찍한 일들을 되새기자면, 그녀는 스크린 속 여자의 명치를 당장 한 대 세게 때려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