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서 오십시오, 구원자님.”
다른 군인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여준이 A동 본부의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이예주를 보고 반색했다.
쾌활한 미소는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새벽의 일로 다리족의 이중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이제는 석연치 않게만 느껴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예, 예.”
이예주는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별일 없긴. 아주 큰일이 있었지.
“구원자님께 속히 보여 드리려고 밤새 급히 남은 데이터를 복원하고 연도별로 정리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예주의 눈에 띄는 서먹한 반응에도 여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계단의 가장 끝으로 이예주를 안내했다.
여준을 따라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곤돌라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질서 정연했던 어제와는 달리 사람들이 하나같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쁘게 몸을 놀리는 와중에도 그녀가 지나칠 때마다 곁눈질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바빠진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밤을 샜다는 여준의 말이 사실인지 벌겋게 충혈된 눈들이 제게 닿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기괴한 빛을 뿜어 대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구원자’라는 존재가 이제 무언가를 해 줄 차례라고 기대하는 걸까?
그들이 바라는 터무니없는 것에 소름이 끼쳐 이예주는 연신 제 팔을 쓸어내렸다.
“구원자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과거는 어느 시점이십니까?”
앞서가던 여준이 불쑥 뒤를 보며 물었다.
이예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시점요?”
“네. 과거의 데이터는 정확히 세기말 용암 대폭발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아…….”
“데이터 복구가 어느 정도 완료되었지만 세기말 용암 대폭발 이전의 데이터들은 일정 범위 이상 알 수 없습니다. Ark-17는 처음부터 검은 파편으로 인한 인류 멸망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비행선이고, 때문에 이곳의 데이터들은 모두 검은 파편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준은 그 사실이 매우 애석하다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렇지만 용암 대폭발 이후 천여 년 간의 기록은 95퍼센트 이상이 남아 있으니 웬만한 자료는 모두 열람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구원자님이 알고자 하시는 과거는 정확히 어느 때입니까? 세기말 용암 대폭발이 일어난 2017년도입니까? 아니면 검은 파편이 본격적으로 인간 학살을 시작한 시점일까요?”
“어…….”
이예주는 그저 입술만 뻐끔거렸다.
실은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맞아, 모든 과거를 알 순 없으니 알고 싶은 시점을 말해야겠지.
이예주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2017년, 그녀가 살던 때였다.
학교 갔다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거리를 배회하던 중, 무슨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용암 해일이 도시를 덮쳤다.
기실 그녀는 그동안 거의 현실을 부정하다시피 지내 왔다는 것을 자각했다.
유구했던 인류 문명이 어떻게 망했는지, 눈깔 시뻘건 미친놈이 왜 인간 박멸을 목표로 하여 사람들을 쳐 죽이고 다니는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알 게 뭐란 말인가. 망할, 내 앞가림하기도 급급한데.
“나는…….”
하지만 이제는 제 알 바 아니라고 넘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검은 파편이 이예주가 아는 그 남자인 이상, 이미 너무 깊숙이 관여돼서.
그 남자가 그녀에게 지나치게 중요한 인물이 되어 버려서.
“……나는.”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여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느새 본부가 훤히 보이는 가장 높은 층에 도달한 후였다.
이예주는 마침내, 자신이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이미 태풍의 핵 근처까지 와 버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검은 파편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왜 그 사람이 인간을 이렇게 증오하는지, 왜 당신들은 그 남자를 없애지 못해 안달인 건지.
그 남자가 대체 무슨 존재고, 어디서 왔고, 지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예주는 여준의 검은 눈동자를 똑똑히 바라보며 느릿느릿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여준의 눈에 경탄 어린 빛이 서렸다.
“역시! 구원자님의 깊은 혜안을 따라가려면 저는 아직도 먼 것 같습니다.”
“예, 예?”
“맞습니다! 적에 관해 모조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고대 선조들은 전투에 나설 때 이런 속담을 내뱉곤 했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그는 갑작스레 손뼉을 마주치며 환호성을 지르듯 외쳤다.
“구원자님께 필요한 것은 과거의 데이터가 아니라 저희를 돕기 위한 검은 파편의 정보들이었는데, 제가 미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아니요. 저기요, 그게…… 검은 파편이 중요한 건 맞는데요. 그런데…….”
“철수 상병!”
그녀는 네놈들을 돕기 위함은 전혀 아니라고 정정해 주려 했지만, 그것을 가뿐히 무시한 여준은 다급히 철수를 찾았다.
“상병, 철수!”
대체 어디에 서 있었던 건지 모를 철수가 벼락같이 대꾸하며 튀어나왔다.
아이는 제대로 데려다주긴 했을까. 그를 보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B구역에서 만난 눈족 어린아이와 우악스럽게 끌고 가던 철수의 모습이. 냉정한 얼굴로 아이를 ‘저거’라고 칭한 여준 또한.
낙천적이고 쾌활한 것 같으면서도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여준을 바라보는 이예주의 얼굴에 또다시 한 줄기 의구심이 서렸다.
“준비는 끝났나?”
“네. 명령하신 것 또한 대기 중입니다.”
“좋아.”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철수 또한 마찬가지로 옆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인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한 명이 흰색 쟁반을 들고 이예주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다리족 족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쟁반 위에 낯익은, 네모난 스탬프 모양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구원자님, 죄송하지만 제게 손목을 한 번 더 내주시겠습니까?”
“왜, 왜요?”
“데이터 열람을 위한 코드 마킹을 해야 합니다. 안전이 확증된 사람들만 자료 열람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증표와 같은 것이지요.”
역시나 여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이예주에게 전혀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어제 했는데 왜 또!
“어제 맞았잖아요. 이거 아픈데 또…….”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료 열람을 위한 인원수를 입력하고 그 수만큼 각기 다른 마킹 자국을 입력하지 않으면 암호를 해제할 수 없습니다.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선조들이 만든 장치로, 구원자님이 오시기 전 본부 내 전원 거쳤습니다.”
여준이 제 두 손을 들어 손등을 보여 주었다.
본인도 다 겪은 일이라는 걸 보여 주는 의도답게, 그의 양 손등에 모기가 두 번씩 연달아 문 듯한 벌건 자국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예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손등을 내밀었다.
여준이 신속히 마킹 기구를 집어 들었다.
철컥, 종이에 스템플러 찍는 듯한 소리와 더불어 불똥에 데인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손등에서 피어났다.
“아! 살살 좀!”
“끝났습니다.”
이예주가 더 타박을 잇기 전에 여준이 깔끔하게 손목을 놓아주며 뒤로 물러났다.
마킹 기구를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얄미웠다.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제 손등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제보다 바늘구멍이 더 크잖아……. 피도 더 많이 나는 것 같은데요.”
“하핫, 기분 탓일 겁니다.”
여준이 웃어 넘겼다.
하지만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반대쪽 손등과 비교해 보니 정말 방금 찍은 마킹 자국이 더 크고 뚜렷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잠시였다.
“이제 여기에 손등을 가져다 대시면 됩니다.”
여준이 철수에게서 넘겨받은 것을 들이밀었다.
현대에서 익히 보던 태블릿 PC와 생김새가 비슷한 네모난 화면의 기기였다.
어쩌면 진짜 1000년 전에 쓰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기기를 바라보는 그녀를 재촉하듯 여준이 두어 번 화면을 흔들었다.
옅은 하늘색 바탕 화면 안에는 손등을 가져다 대야 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동그라미가 있었고, 그 주위에 알 수 없는 문자와 숫자들이 적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예주는 망설임이 가득한 몸짓으로 화면에 제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피는 닦고 대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이 무색하게 액정에 손등이 닿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질금질금 흘러나온 그녀의 피가 마법처럼 화면 안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화면 안에 비쳤다 사라지길 반복하던 문자들과 숫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나열되기 시작했다.
초마다 휙휙 바뀌는 태블릿 화면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을 즈음 ‘기이익, 쿵― 철컥, 철커덕.’ 하고 둔중한 소음이 곤돌라 전체에 걸쳐 울려 퍼졌다.
퍼뜩 화면에서 눈을 뗀 이예주가 주위를 둘러보자 여준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데이터 잠금 해제를 하면 유출을 막기 위한 출입구 잠금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됩니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모든 문 앞으로 두터운 철로 이루어진 셔터가 내려왔다.
A구역 3층 곤돌라 전체가 원천 봉쇄 되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 등 뒤에 있는 출구, 이중 유리문 사이에 철제 방호책이 내려앉는 것을 확인한 이에주의 얼굴에 일말의 불안감이 맴돌았다.
완전히 갇혀 버렸다. 데이터를 모두 확인할 때까지 본부 밖으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을 거란 사실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중요한 정보기에. 아, 괜히 알고 싶다고 한 거 아니야, 이거.
“이쪽 의자에 먼저 앉으시죠.”
여준이 그녀의 주위를 환기했다. 끝 층의 정중앙에 미처 보지 못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며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꽤 긴 여정이 될 겁니다. 준비되셨습니까, 구원자님?”
“아. 예, 뭐…….”
뭘 준비까지야. 이예주는 대충 얼버무리며 앞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위이잉― 때마침 어제 보았던 대형 스크린이 우중충한 창을 가리며 천장에서 내려왔다. 조명이 어두워졌다.
여준을 뺀 나머지 인간들이 각기 자리로 돌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싸늘한 긴장감까지 뿜어내는 그들과 영화관에라도 놀러 온 것 같은 족장의 얼굴이 대조되었다.
그녀는 조금씩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천천히 저를 위한 의자에 착석했다.
흰 스크린 위로 팟 하고 빔이 쏘아지는 것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스크린에 낯익은 지도가 떴다.
이예주가 태어나 상식으로 알고 자란 21세기의 세계지도였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대륙 끝에 코딱지처럼 작달막하게 달려 있는 한국.
오랜만에 보는 지도는 처음 본 것처럼 낯설면서도 코끝이 찡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넋을 놓고 화면을 보는 이예주를 깨우듯 여준이 나직이 속삭였다.
“구원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시간족은 팔족, 다리족, 눈족, 세 개의 일족으로 분류됩니다.”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한 배려인지 그의 손에서부터 빨간 레이저 빛이 쏟아져 나와 스크린 위를 가리켰다.
“세기말 용암 대폭발 이전의 시간족들은 각각 일정 주둔지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다리족은 대부분 아시아 대륙에 정착했고, 북아메리카 대륙 쪽에는 눈족들이 거주했습니다. 팔족들은 원래 다 함께 뭉쳐 사는 습성을 지녔기에 일족 전체가 유럽 대륙에 살았고요. 이렇듯 용암 대폭발이 있기 전까지는 각 일족이 뚜렷한 경계를 유지해 온 듯합니다.”
레이저 빛이 세계지도의 대륙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붉은 점을 수놓았다.
그것이 과제 발표처럼 느껴져서 이예주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여준의 말을 멈추자 대형 스크린 안의 세계지도가 한 지역을 확대했다.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어지럼증이 일어 눈을 감은 것도 잠시, 다시 뜬 눈앞에는 마치 그곳에 있듯 생생한 눈밭이 펼쳐졌다.
칼로 깎아 내린 듯한 생김새의 거대한 빙산, 거센 바람이 부는 듯 땅 위에 깔려 있던 눈가루들이 부스스 흩어져 뿌연 안개를 일으키는 영상이 흑백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남극에서 처음 이상 파동을 발견한 것은…… 아, 이전에는 남쪽 대륙을 통칭하여 남극이라고 불렸습니다.”
여준의 입을 통해 확대된 지역이 남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극에서 처음 이상 파동을 발견한 것은 세기말 용암 대폭발 이전, 1978년도였습니다. 꽤 많은 다리족 선조들이 정착하여 살아가던 한국이란 나라가 처음 남극 연구를 시작했던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