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2017년에서 이와 같은 범죄 현장을 목격했다면 나서서 피해자를 도와줄 수 있었을까.
이예주는 짧은 순간 고민해 보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과거도 현재도 제 코가 석 자인데. 제 앞길이 구만리인데.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되살리기 위해서든 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든 간에 제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지만, 2017년에서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진 못해도 112에 전화 정도는 해 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얼른 뛰어가서 주변에 다른 사람을 불러오는 것 정도는…….
그냥 내 일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해 버리면 자신도 그 범죄에 일조해 버리는 거니까.
게다가 옷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땐 이것저것 따질 정신도 없었다.
“네 얼굴 좀 안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래, 결국 내가 오지랖이 태평양만 한 병신인 것이 문제지. 도덕심에 대한 짧은 고찰은 자신이 사서 일을 벌이는 부류라는 깨달음만 안겨 준 채 끝이 났다.
이예주는 음울해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 같아.”
했을 거야, 그렇게 단정 짓지 못했다.
다음번에 똑같은 일을 목도한다 해도 오늘처럼 나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음번에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못 본 척 도망가 버리지 않을까.
이기적이고 못돼 먹었단 소릴 들어도 할 말 없었다.
자신은 그저 모든 것의 우선이 본인인, 지극히 이기적이고도 평범한 사람이니까.
유나는 어느새 뒤로 돌아 이예주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감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도자기 같은 얼굴에 언뜻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눈 한 번 깜빡하니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꽤 한참 동안 메마른 동공으로 이예주를 바라보던 유나는 돌연 카드 키를 꺼내 문 옆의 카드 리더기에 긁었다.
지잉― 문이 빠르게 열렸다.
“들어가.”
그녀가 문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덧 자신이 머무는 객실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이예주는 유나의 얼굴을 한 번 슬쩍 바라보고 이내 제 객실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열린 문턱을 지나치자 거짓말처럼 몸이 축 늘어지고 피곤이 몰려왔다.
“앞으로 내가 부르기 전엔 객실 밖으로 나오지 마.”
아직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유나가 엄포를 두듯 경고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제 방으로 갈 요량인지 그녀는 이예주가 객실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계속 문 앞에 서 있었다.
감시하는 듯한 유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해했다.
말도 없이 객실 밖으로 나온 저 때문에 큰 변을 당할 뻔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 초 후, 지잉―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구원자도 뭣도 아닌 여자의 창백한 얼굴이 문에 가려지기 바로 직전 그 찰나의 순간, 바람 소리처럼 아스라한 목소리가 유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볼, 꼭 치료해.”
달칵. 문이 닫히면서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복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유나는 그 소리가 정말로 문이 닫히면서 난 소린지, 아니면 제 가슴속에서 난 소린지 가늠할 수 없었다.
* * *
빅, 비익, 비이익—
객실 안으로 불쑥 소음이 끼어든 것은 푸르스름한 새벽 여명이 가시고 아침 해가 솟아올랐을 때였다.
연달아 울리는 벨 소리에 화들짝 깬 이예주는 그제야 제가 뜬눈으로 남은 밤을 지새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거지?”
창을 타고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훤히 보이는 객실 내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훑어보며 그녀는 당황했다.
잠시 유나 생각을 한다는 게 그만 날밤을 새 버리고 만 것이다.
유나와 복도에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침대에 닿자마자 바로 쓰러져 졸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심신이 축축 늘어지고 피곤에 절어 당장 죽을 것 같은데도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빅, 비익—
그 찰나의 상념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다소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벨 소리에 이예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저딴 식으로 괴팍하게 도어 벨을 울리는 인간은 이 비행선에서 딱 한 명뿐이다.
“아, 나간다고!”
그녀는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문으로 쿵쾅쿵쾅 다가갔다.
날밤을 지새운 탓에 정신이 영 몽롱했다.
도어 락을 해제하고 벌컥 문을 열자 몇 시간 전에 마주쳤던 로봇 같은 여자애가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히도 벨을 눌러 대더니 막상 마주한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복도 빛에 드러난 유나의 말간 얼굴은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와 있는 이예주와는 퍽 상반되었다.
멀쩡한 유나의 모습에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이예주는 불퉁하게 물었다.
“아침부터 왜 또.”
“족장님의 전언을 전달해 드리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어째 또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네. 시시각각 달리하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전언? 무슨 전언?”
“구원자님의 준비가 끝나시는 대로 저와 함께 본부로 와 주셨으면 한다는 전언입니다.”
“왜?”
“과거에 관한 데이터를 구원자님께 보여 드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가 올 것이지, 왜 또 귀찮게.’까지 생각했던 이예주는 유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멈칫했다.
과거에 관한 데이터. 2017년에 하늘로 띄워진 이 거대한 방주와 그 시간대에 있었던 일들에 관한 정보.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들을 알고 타임머신을 보면 과거로 돌아가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보았자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간밤에 남자 하나 때문에 과거로 가지 않는 쪽으로 인생의 목표를 대책 없이 변경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준을 만나서 과거의 데이터는 됐고 이제 그만 자신을 놓아 달라고 이야기 해 볼까.
어차피 대가 없이 과거에 관해 알려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욱 알고 싶지 않았다.
유나는 이예주의 기색이 어제와는 묘하게 달라졌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가 무뚝뚝하게 덧붙인 말에 손바닥 뒤집듯 이예주의 생각이 바뀌었다.
“과거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 보았자 검은 파편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일 겁니다.”
“검은 파편?”
람에 관한 이야기? 지나가듯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의미심장했다.
이예주는 일순 눈을 가늘게 뜨고 유나를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무감각한 표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람과 자신이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챈 유나였다.
아니, 망할, 눈치챌 것도 없지. 누구라도 그녀의 목에 남은 야살스러운 자국들을 본다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어제의 수치에 이예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고, 곧 준비하고 나갈게!”
이예주는 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별로 준비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라는 말이 작게 들려온 것 같았지만, 그것을 알아들을 정신조차 없었다.
세수를 끝내고 대강 준비를 마쳤을 땐 꽤 오랜 시간이 지체된 후였다.
객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까와 별다를 바 없는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는 유나의 모습이었다.
이예주는 흠칫했다.
제 객실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거참,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했던 것치곤 자신을 모셔 가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 같지 않은가.
어째 자신이 낚싯바늘에 낚여 끌려가는 물고기 신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끝에 도달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유나의 뒤를 따라 승강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이예주는 온몸의 촉각을 세워 기색을 살폈다.
유나는 새벽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아무런 감정 없이 버석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무엇에 대한 안도인지는 저도 잘 몰랐다.
그녀가 괜찮다는 것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깊게 생각하며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관한 건지.
두 사람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승강기에 올라탔다.
이예주는 그 순간 유나의 일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로 결심했다.
새벽의 일은 그냥 무서운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원래 시간족들은 하나같이 정신 나간 인간 놈들이고, 다리족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일 뿐…….
“족장에게 전달되기 전에 5층 복도에서 대화를 나눈 CCTV 기록은 처음 5층으로 왔을 때 찍힌 것으로 덮었어.”
승강기 문이 닫히자마자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예주가 흠칫 놀라 머리 위로 늘어놓던 상념들을 멈췄다.
“……뭐?”
뭘 해? CCTV 기록을 덮어?
이예주는 해괴한 표정으로 유나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너무 뜬금없고 당황스러워서 유나의 말투가 또 반말로 탈바꿈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간밤 일은 B구역을 구경하고 싶다는 네 변덕으로 나와 동행한 상태에서 비상구를 이용하여 이동한 것으로 보고해 두었으니까, 족장 앞에서 말조심해.”
“…….”
“족장에게 괜히 너 혼자 객실을 무단이탈했다는 걸 들켜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유나는 묵묵히 앞만 바라보길 고수하며 마저 말을 마쳤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는 말은, 족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새벽에 이예주가 멋대로 돌아다니며 찍힌 CCTV 기록들을 지워 주었다는 소리였다.
간밤에도 복도에 늘어선 CCTV에 포착될 각오 정도는 했다.
유나가 굳이 나서서 증거를 인멸하고 거짓 보고까지 해 가며 뒤처리를 해 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서로 싫어하던 사이였잖아. 물론 저보다 5살이나 어린애가 버릇없이 구는 것을 자신도 의연히 넘기지 못했지만……
B구역으로 오자마자 계속해서 이어졌던 유나와의 다툼을 생각하던 이예주는 정말 순수하게 물었다.
“……왜?”
“…….”
“나 혼자 저지른 일이잖아. 비상구에서 일도 나 때문에 어제 그 새끼들한테…….”
이예주는 흘긋 유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멈췄다.
사실 유나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말을 멈춘 것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굳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다.
유나의 하나뿐인 파란 눈이 어떠한 이채를 띄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이예주는 분명 어제의 일을 넘겨 버리고 그녀를 완전히 떨쳐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여전히 메마르고 건조했지만 기묘한 빛이 흐르는 눈을 정확히 이예주에게 고정한 채 유나가 말했다.
이예주는 그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혔다. 뭔가 달라졌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달라진지는…….
띵.
어느새 1층에 도달한 건지 벨 소리와 함께 스르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무슨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유나는 열린 문 사이로 먼저 내려 버렸다.
그러고는 승강기 앞에 서서 여전히 그 안에 있는 이예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리시죠, 구원자님.”
그녀는 순식간에 예의 바른 다리족 일병으로 돌아갔다.
재촉 아닌 재촉에 이예주는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소름 끼치게 광활한 B구역 1층이 그들의 앞에 펼쳐졌다.
유나, 여준, 과거, 정보, 람. 다시 유나.
유나.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에 이예주는 어수룩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