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이건 너무 무섭잖아.
람이 보고 싶었다.
나 이렇게 무서운데, 무서워서 죽을 것 같은데. 제발 나 좀, 제발 나 좀 데려가 줘요. 나 좀 찾아 줘…….
“일어나. 방으로 그만 돌아가게.”
문득 감정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차갑게 떨어졌다.
이예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그렇게 큰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여자애는 변함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 조금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조금만 있다가…….”
“여기 있다간 방금 전이랑 비슷한 놈들한테 또 걸릴지도 몰라.”
“……뭐?”
“그러니까 혼자 다니지 말라고 족장이 말했잖아. 멍청하게 있지 말고 일어나.”
일순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예주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유나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 비행선은 뭐하는 놈들 소굴이지? 방금 전처럼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또 있다고?
위화감이 몇 번 들었지만 다리족은 지금까지 겪어 온 다른 인간들에 비해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들이 보였으니까.
전시인데도 버림받은 눈족 아이들을 구해 데리고 온다는 것 또한 멋있었다.
그 생각은 방금 전의 일로 모조리 끝이 났다.
여기 인간들도 결국 다른 시간족 놈들과 똑같아. 더럽고 비열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 천지야.
그렇지만 머리는 아는데, 이예주는 좀처럼 그 간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A구역과는 차원이 다른, 험악하고 끔찍한 B구역의 인간들.
비행선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설득하며 이예주를 B구역에 집어 처넣은 여준.
그리고 일말의 동요 하나 없는 유나.
“넌…….”
무슨 로봇이냐?
이예주는 묻고 싶었다.
아니, 실은 진짜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너는 어째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게 과연 유나가 강심장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새삼 놀랄 것도 없어서 그런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빨리 가자.”
이예주는 계단 난간을 짚고 비틀비틀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도와줄 만도 하건만, 유나는 그녀가 스스로 일어나 똑바로 설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예주 또한 유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유나의 퉁퉁 부어오른 몰골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침묵에 잠겨 5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벽에 커다랗게 쓰인 ‘5’가 보일 때쯤 이예주는 드디어 바짝 얼어붙었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상구의 철문을 열자 객실을 나왔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5층 복도가 보였다.
드디어 길고 긴 계단을 올라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이예주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 층 어딘가에도 잔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상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더럭 겁이 나 서둘러 복도에 들어섰다.
그 뒤를 유나가 뒤따랐다.
뚜벅뚜벅, 오직 이예주와 유나의 걸음 소리만이 5층 복도 공간에 울려 퍼졌다.
새벽녘의 복도는 공허했다.
과연 또 다른 사람이 있을까 의심이 들 만큼 작은 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올 때보다 객실로 가는 길이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걷다 보니 어느덧 뒤에 있던 유나가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이예주는 흘긋 그녀를 곁눈질했다.
자신보다 반 뼘 정도 키가 작은 유나의 노란 정수리가 보였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서양인이었으나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열일곱 살 적 저는 뭘 하고 있었던가.
엄마가 죽고 정신이 반쯤 빠진 채로 살았다.
국가 유공자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연금과 엄마의 생명보험 액수가 꽤 되어 그 와중에 생활고까지 겪어야 하는 최악은 면했다.
만약 당장 먹고살 돈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면 이예주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전에 자살했을 테니까.
같은 나이 때에 불행한 일을 겪고도 유나와 제 처지는 너무나도 달랐다.
누가 더 불행한지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이예주는 엄마가 죽은 후에도 나름 잘 살아왔다.
자의적, 타의적 왕따였지만 학교도 잘 다녔고, 공부도 나름 해서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다.
가끔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혼자라는 사실이 미칠 것처럼 괴롭고 엄마가 보고 싶어서 아득까득 밤을 지새운 것 빼고는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이 애에게는 대체 뭐가 있을까.
죽지 않고 질긴 목숨 연명할 만한 버팀목이 뭐가 있을까.
“불쌍해?”
곰곰이 생각에 잠겨 걸음이 느려졌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이예주의 귓가에 불쑥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느려진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같이 걸음을 멈춘 유나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나뿐인 파란 눈이 생기 없이 척박했다.
가뭄이 들어 생물이 살아갈 작은 습기조차 남지 않은, 가망 없는 사막 같았다.
“……뭐?”
“내가 불쌍해서 동정하고 있느냐고.”
“그게 무슨…….”
“네가 그런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 눈? 내가 동정하는 눈으로 보고 있다고?
이예주는 유나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딱히 그런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었어.”
정말이었다. 자신은 그냥…… 아직 어린 유나가 겪기에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현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한다.
이예주는 그런 것을 할 만한 처지도 못 되었고, 그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해도 별로 그런 오지랖 넓은 감정을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너는 눈족이었더라도 이제는 같은 다리족 군인이잖아. 그리고 아직 많이 어린데…… 왜 아까 같은 취급을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다리족 새끼들이 지껄였던 헛구역질 나올 만큼 더러운 말들이 귓가에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소릴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유나의 얼굴도.
자신을 향해 내뱉은 말이 아님에도 이토록 역겹게 느껴지는데, 왜 당사자는 터럭만큼도 불쾌함이나 수치심을 보이지 않는가.
참는 건가, 아니면 애초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이예주는 하얀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유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유나가 정면으로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어. 여기로 온 눈족 아이들은 대부분 그런 취급 받으니까.”
“뭐?”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그래서 이예주는 처음엔 제가 헛소리를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왜? 왜 다른 일족의 아이들을?
여준이 말했다.
인명 하나하나가 아까운 위급 상황에 식인은 중범죄나 마찬가지라고.
이곳은 여타 대륙과는 달리 범죄가 허용되지 않는 기본적인 법과 도리가 존재한다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다리족의 새로운 이면에 이예주는 혼란스러워졌다.
마치 달의 뒷면을 보게 된 것 같았다.
여준이 보여 주었던 인간 멸종을 막기 위한 무수한 노력, 그리고 그 밝은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잔인하고 참혹한 다리족의 모습.
“다리족은 압도적으로 남자 성비가 높아. 여긴 부족이 아닌 하나의 군대니까.산꼭대기라 창녀들이 따로 찾아오기 힘들기도 하고, 성욕을 배출할 곳이 마땅치 않지. 그리고 눈족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은 죽임당하거나 다시 내쫓기지 않으려면 제 쓸모를 찾아야 하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유나가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이예주는 경악하면서도 납득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쓸모를 입증하는 것이 옳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것만 해도 다리족의 이중성에 치가 떨릴 지경인데, 그게 끝이 아닌지 유나는 더 섬뜩한 말들을 쏟아 내었다.
“여자아이뿐만 아니라 가끔 쓸모가 없는 남자애들도 성욕 처리 도구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이용돼. 그런 애들은 이곳에 있는 눈족들 사이에도 제일 최하층, 밑바닥에 속하는 거야.”
“어떻게, 어떻게 그런…….”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나은 일이지.”
유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예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그게 죽는 것보다 나은 일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팔족 여자들은 계속된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도시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애는 어째서…….
그녀는 유나에게 그다음을 성급히 물었다.
관심 갖고 싶지 않았지만 묻지 않고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럼, 그럼 아까 그 미친놈들이 너한텐 왜 그런 건데? 넌 눈족이긴 해도 다리족으로 귀화했잖아. 다리족처럼 이름도 지었고 족장 밑에서 일도 하고 있고…….”
“나와 내 동생이 그 밑바닥에 있었으니까.”
“……뭐?”
이예주가 순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멈췄다.
그게 무슨…….
“그 진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다리족으로 귀화했다.”
“…….”
“그러니까 너도 불쌍한 걸 본다는 눈으로 볼 필요 없어. 힘없고 버려진 인간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건 당연한 거잖아. 넌 구원자도 뭣도 아니니까 신경 꺼.”
굳이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하지 않아도 이예주는 애초에 제 앞의 여자애에 대해 신경 끄려고 했다.
처음부터 유나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자신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다.
상대해 봤자 자신만 피곤해지니 앞으로 이 비행선에 있는 동안 쭉 없는 사람처럼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사람은 없다.
그 말을 해 주고 싶은데,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게 관여하게 되는 걸까 봐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허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엔 유나 쪽에서 물었다.
“넌 아까 왜 그런 거지?”
“……뭘?”
“나서서 날 도와줄 필요 없었잖아. 어차피 넌 구원자 같은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한테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
알긴 아는구나. 그 와중에도 드는 생각에 이예주는 실소했다.
그녀에게서 대답할 기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유나는 이예주 쪽으로 향했던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싸늘하게 지나치며 말했다.
“힘도 없으면서 얼굴 좀 안다고 아무 때나 끼어드는 건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야.”
어쩜 저렇게 미운 말만 골라 할까.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미웠지만 유나의 말이 모두 맞았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구리를 당하던 제드를 도울 때와는 달랐다.
그야말로 범죄 현장이었다.
유나가 족장의 명령을 들먹거리며 놈들을 저지하지만 않았어도 이예주는 9시 뉴스에서나 볼 법한 일의 당사자가 되었을 것이다.
폭행, 강간 후 치사.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드는 흉악 범죄들.
그도 모자라 제 앞의 여자애가 바로 누구던가.
여준과 헤어지고 난 이후 바로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약을 박박 올리던 계집애였다.
버릇없고 못돼 처먹었다. 짜증 나는 애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데도…….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혼잣말처럼 작은 중얼거림이었는데 그걸 용케 알아들었는지 앞서 걸어가던 유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예주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아무리 제가 살던 곳이 아니라 1000년이 지난 세상이라도, 살인과 식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정신이상자들이 판을 치는 미친 세상이라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잖아.
“나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위험에 처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못 본 척 할 순 없는 거잖아.”
멍청한 짓이란 걸 알았다.
손쉽게 남자를 제압한 유나를 보니 제가 또 조롱이를 죽음에 처하게 했던 미친 오지랖을 부렸구나 싶었다.
하지만 못 본 척 뒤돌아서 후에 얻을 죄책감을 생각하니 도저히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위험에 처한 유나를 그대로 두고 갔다간 버거운 악몽이 하나 더 추가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