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09)화 (211/319)

“시간이 별로 없으니 용무는 다음에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켜 주십시오.”

“허.”

“이 계집이 지금 뭐라는 거야? 비켜? 비켜 줘?”

여자가 가리키는 임무가 없어진 자신을 찾는 것이란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없어진 그녀를 찾으러 나왔다가 질이 안 좋은 남자들에게 걸려 비상구까지 끌려온 것이다. 

“족장 밑에 몇 주 있다 보니 정신이 좀 나갔나 보네. 네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걸어 다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 은혜도 모르고. 눈깔도 하나뿐인 걸 예쁘다, 예쁘다 해 주니까 주제 파악이 잘 안 되지?”

“중요한 임무니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망할…… 야, 잡아!”

이예주의 머리 위가 분주해졌다. 

살벌해진 남자들의 기세가 보지 않아도 생생히 느껴졌다. 

여자를 우악스럽게 제압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이예주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더럭 겁이 났다. 

TV나 인터넷 기사로만 접하던, 자신과는 먼 범죄 상황이 바로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 도망가야 되는데. 이대로 있으면 언제 들킬지 모르는데. 

그런데 귀신이라도 쓰인 것처럼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놓아주십…….”

철썩―! 

여자가 미약한 반항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헉, 이예주의 입술 새로 얕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명령하지 마!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명령질이야, 이게. 오랜만이라서 좀 나긋나긋해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앙칼지네.”

“윽.”

“까라면 까라는 대로 해라. 그게 눈족인 네년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라고.” 

놈들이 번갈아 가며 윽박질렀다. 여자의 낮은 신음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폭행, 강간, 겁탈. 듣기만 해도 찝찝하고 불편한 단어들이 머릿속에 마구마구 떠올랐다. 

게다가 상대는 미성년자였다. 

아직 어린 여자애에게 지껄이기에 너무 과격하고 무서운 말들이 연신 울려 퍼졌다.

“안 되겠다. 오늘부터 재교육 들어간다.”

“칼 있냐? 옷부터 먼저 자르자고.” 

놈들이 두런두런 사이좋게 섬뜩한 말을 주고받았다. 

이예주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쿵쾅거려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많이 남았다. 

소리가 좀 나더라도 3층으로 뛰어 내려가서 사람을 데리고 와야…….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가장 현명한 건지 미친 듯이 생각을 거듭할 무렵, 불현듯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3층은 비상구 문이 아예 잠겨 있었다. 그나마 문이 열려 있던 2층은 텅 빈 복도와 잠겨 있는 문 하나뿐. 

2층으로 가는 사이에 놈들에게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어쩌지. 어떡하지.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에 나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들켜서 같이 싸잡혀 휘말리지 말고 지금 저 새끼들 주의가 쏠려 있을 때 2층으로 빨리 내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불러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조금 더 현실적이고 안전한 방법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 때였다. 

찌지직, 천 조각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할 새도 없이 이예주의 몸이 펄떡 튀어 올랐다. 

“저, 저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몸은 어느덧 4층 비상구에 근접한 계단 위에 서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망할, 순간 이동이라도 했나? 세 쌍의 눈이 온통 자신에게로 쏠린 것을 보고 이예주는 적잖이 당황했다. 

한 층 내려가는 것은 그렇게 힘들고 버거웠는데, 대체 어느 틈에 자신이 계단을 훌쩍 뛰어넘었는지 알 수 없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니 허옇게 굳은 유나의 얼굴이 보였다.

“걔, 걔 놔줘.”

군복을 입은 족제비상의 남자가 뒤에서 유나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 앞에 훨씬 덩치 큰 남자가 주머니칼로 유나의 옷 어깨 부분의 이음새를 막 자르려 했다. 

정욕과 흥분으로 범벅된 놈들의 눈이 자신에게 닿자 온몸의 털이란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미친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무모하고도 대책 없는 행동을 한 자신에 대한 욕설이었다. 

‘어쩌자고.’

두 번째는 막막함이었다. 

하나뿐인 벽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미쳤어? 어쩌자고.’

하지만 파란색이 분명한데도 꺼멓게 죽은 유나의 눈동자를 보니 다시 한번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왜, 왜 그런 눈빛을.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이제 고작 17살 먹은 애가 왜 그런 눈을.

“그 손 놓으라고!”

두려움에 가슴이 죄여 왔다. 

하지만 이예주는 대관절 무슨 배짱이 생겼는지 돌연 비상 통로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이젠 모르겠다. 시발, 어떻게든 되겠지. 이렇게 소리 지르다 보면 누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름 머리를 쓴 전략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떨리는 두 주먹을 뒤로 숨긴 채 그들과 맞서는 데 사활을 건 이예주를 비웃었다.

“저건 또 뭐야? 쥐새끼처럼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요즘 들어 소란스럽더니 새로 들어온 눈족 계집인가 보군.”

놈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예주의 존재에 대해 저들끼리 추측하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까지 유나의 팔을 꺾어 잡고 있던 족제비가 이예주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놈의 눈동자가 기이한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얼굴도 반반하니 귀여운데. 왜 너도 같이 놀고 싶어?”

“그 애 안 놔주면 소리 지를 거야.”

“어이구, 그러셔요?”

다부진 이예주의 말에 놈들이 한껏 빈정대며 낄낄낄 웃었다. 

“당신들, 군대에서 범죄 저지르면 영창 가는 거 몰라? 나 하루 종일 당신들 족장 옆에 붙어 있다 왔어!”

“…….”

“내, 내 말 한마디면 족장이 당신들 잡아서 모조리……!”

“씨발.”

자신 없는 투로 놈들을 협박하던 이예주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마저도 나지막한 욕설에 뚝 끊겨 버렸다. 칼을 들고 있는 남자가 눈에 살기를 담고 이예주를 노려봤다.

“이 미친년이 뭐라는 거야? 안 그래도 몇 년째 갇혀 있어서 기분도 좆같은데. 회포고 뭐고 그냥 콱 죽여 버릴까.”

정말로 고민된다는 듯 손에 쥔 주머니칼과 이예주를 번갈아 가며 고민하는 놈의 모습에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놈에게서 동쪽 대륙에서 보았던 용병 대장의 냄새가 났다.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즐기는 듯한.

“이봐, 참으라고. 눈족 계집들은 약해 빠져서 금방 죽어 버리니까.”

그때 족제비가 서둘러 칼 든 남자를 말렸다. 

이예주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 듯 그녀를 훑어보는 시선이 끈적끈적하고 더러웠다. 

“후, 그렇지. 요즘은 계집들 씨가 말라서 눈 씻고 찾아보기가 어렵단 말이야. 참아야지, 참아야 하고말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족제비의 말에 덩치는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만 이예주에게 전혀 좋지 않은 방향이었다.

“그래도 이 계집년은 너무 괘씸하단 말이지. 몇 대만 쥐어박으면 고분고분해지겠지? 계집들이란 원래 길들이는 맛이 있으니까.”

“적당히 해, 적당히.”

족제비의 타이름을 뒤로한 채 놈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에 두세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오는 탓에 그녀와 남자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예주는 뒷걸음질 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소리 지를 거야! 소리 질러서 여준 씨한테……!”

“질러.”

놈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예주의 다급한 외침에 답했다. 

“지금도 지르고 조금 있다가도 질러. 그럼 더 흥분되니까.”

점점 더 다가오며 놈이 칼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을 위로 높이 쳐들었다. 

손바닥이 거의 솥뚜껑만 했다. 

저걸로 후려 맞으면 그냥 맞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무서워. 무서워.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남자의 손을 보며 이예주는 턱 밑까지 차오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휘익,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맞는다, 하고 생각한 그 순간.

“아악! 이 망할 년이!”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족제비의 찢어질 듯한 괴성이 들렸다. 

이예주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덩치 큰 남자와 대조되는 가녀린 뒤태를 조우할 수 있었다. 

“뭐야, 너도 맞고 싶냐?”

남자가 물었다. 철컥, 대답 대신 차가운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관자놀이를 따라 주르륵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이예주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렸다. 

흘긋 곁눈질로 계단 위의 족제비를 보니 쭈그려 앉아 한쪽 발등을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유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팔이 뒤로 꺾인 채 저 남자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러나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순식간에 이동해 제 앞에 서서 덩치 큰 사내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체 어느 사이 꺼내 들었는지 모를 총으로 덩치 큰 남자의 머리를 겨누었다. 

“족장님이 친히 모셔 오신 구원자님입니다.”

이예주는 유나의 뒤에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고작 17살 먹은 여자애의 목소리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무런 동요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구원자란 말이 확실히 이 미친 곳에선 중요한 요소로 통하는지 남자들이 흠칫했다.

“……이 쥐방울만 한 계집이 구원자라고?”

믿기지 않는 듯 이예주를 훑어보는 시선이 미심쩍었다. 

“이 영악한 것, 내가 너처럼 눈깔 하나뿐인 병신인 줄 알아? 저런 비루먹은 계집 따위가 구원자일 리가 없잖아!”

“구원자님을 무사히 보필하고, 그녀를 해치려는 모든 요소를 적으로 간주, 즉시 제거한다.”

“이게 뭐라 지껄이는……!”

“임무를 방해하는 겁니까?”

놈이 손을 쳐들고 유나를 위협했다. 

이러다가 아까처럼 또 맞으면 어떡해. 

금방이라도 내려칠 것처럼 아슬아슬한 남자의 손을 올려다보며 이예주는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그 위협은 하등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지, 유나는 여전히 미동 하나 없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다리족 전체에 내려진 구원자 보필 임무 수행을 방해하는 겁니까?”

“그딴 거, 알 게 뭐…….”

“이, 이봐! 그만둬! 족장이 직접 데리고 온 계집이라잖아!”

그때였다. 

뒤쪽에서 바닥을 뒹굴던 족제비가 번뜩 소리치며 험상궂게 생긴 남자를 저지했다. 

“우리 재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족장이 구원자에게 얼마나 공들였는지 B구역까지 소문이 파다했는데. 어떻게 받은 감형인데 여기서 죽을 때까지 썩을 순 없잖아!”

“……제기랄! 아오!”

족제비의 말에 놀랍게도 덩치가 쳐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나 분에 못 이기겠는지 ‘쾅, 쾅!’ 하고 옆벽을 부술 듯이 몇 번 내리쳤다. 

‘재판? 감형?’

덩치보다 좀 더 이성적인 족제비의 말이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리송했다. 

“구원자는 얼어 죽을!”

한 번 더 벽을 내리친 덩치가 눈을 부릅뜨고 무표정한 유나와 그 뒤의 창백하게 굳은 이예주를 희번덕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한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일단 알아본다. 알아본 후에 만약 거짓이면 네년들은 내 손에…… 특히 너.”

남자의 벌건 눈동자가 이예주를 훑고 유나에게 못 박혔다.

“이게 감히 나한테 총을 겨눠? 넌 곧 죽었어. 야, 가자!”

계집애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 쓸모없는 새끼. 

덩치가 계속해서 욕설을 퍼부으며 바닥에 퍼질러 있던 족제비의 멱살을 잡고 4층 비상구 입구로 사라졌다.

쾅―! 

철문이 닫히는 굉음이 들리고 비상 계단구 안에 비로소 정적이 찾아왔다.

“하.”

이예주는 놈들이 사라지자마자 저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100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호흡이 가팔랐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풀리자 겨울바람을 맞은 것처럼 몸에 한기가 들었다. 

이 미친 세상으로 넘어와 볼꼴 못 볼꼴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무서워졌다. 

이예주는 두 손으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제 몸을 감싸 안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