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08)화 (210/319)

이예주는 텅 빈 복도를 바라보며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문 앞으로 가 볼까, 말까. 

장난치듯 복도 위에 발을 얹었다 떼었다 하던 그녀는 “에라, 이렇게 고민하는 시간에 후딱 갖다 오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대담하게 한 발자국 나아갔다. 

순식간에 복도를 건너 문 앞에 섰다. 

벽 한 면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문이었다. 양문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았다. 

대신 눈높이에 잠금 화면이 붙어 있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달려 있는 화면에는 아무런 숫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대신 두 개의 동그라미 안에 각각 ‘Marking’과 ‘Card’라고 적혀 있는 패드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열리는지 그 두 단어만 보고도 대충 감이 왔다. 

A구역에 있는 본부 앞에서 철수가 행했던 것처럼 마킹 자국과 카드 키를 둘 다 스캔 해야 열리는 자동문인 것이다. 

“……잠겨 있겠지.”

손잡이도 없어서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이미 잠겨 있을 것을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탈력감이 들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 몇 분 뒤로 가더라도 이예주는 똑같이 복도를 가로질러 기어코 문을 확인해 보았을 것이다. 

그냥 구조만 확인하려고 나왔으면서, 막상 문 너머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키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떻게 생겼는지 호기심도 들고, 보고 싶고. 

진짜 타임머신이 만들어지긴 했나. 

만들어지고 있다면 완성도가 얼마쯤 되나……. 

왠지 조바심이 들었다. 

“……내 거 한번 대 볼까?”

마킹 자국이라면 제 손등에도 선명하게 있었다. 

마치 빨간색 사인펜으로 두 개의 점을 찍어 놓은 것 같은 왼쪽 손등. 

그뿐만이 아니라 객실을 나오면서 제 방 카드 키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온 사실이 생각났다. 

혹시 몰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니 딱딱한 플라스틱 모서리가 바로 손끝에 닿았다.

“안 맞으려나.”

정말 꺼내서 대 볼까 싶어 카드를 한 번 꽉 쥔 그녀는 곧바로 그 행동을 관두었다. 

마킹 자국은 둘째 치고, 아무 카드키나 가져다 대었다가 비상벨이라도 울리면 큰일이었다.

이예주는 음울한 눈으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과거와 멀어졌다. 

뭘 해야 할지, 당장 제가 우선시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타임머신이 정말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건지. 

기분 나쁠 정도로 질척하게 구는 다리족 놈들의 정체부터 파악해야 하는 건지.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람이 올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죽치고 기다려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리족 인간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원래의 목표였던 엄마에게로.

“모르겠어.” 

빌어먹을. 어쨌든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발길이 문 앞에서 쉬이 떼어지지 않았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과거로 가는 길이 확실한지 알아 둬야 한다는 강박과 그만 돌아가자는 마음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문은 잠겨 있고, 제 카드키는 아무 쓸모가 없는 걸 잘 인지하고 있는데. 

그리고 만약 문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다리족 놈들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어쩌게, 이예주. 타임머신이 있는 것을 확인한다 치더라도 어차피 당장 과거로 돌아갈 생각도 없으면서.

“아.”

이예주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도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홉떴다. 

타임머신이 있다 하더라도 과거로 돌아갈 생각도 없다고……? 내가? 

“어…….”

한숨인지 탄성인지 모를 바보 같은 침음이 입술 새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한 번도 꽉 쥐고 있던 과거를 놓은 적이 없었다. 엄마가 죽은 후, 지금껏 근 7년을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보고 살았다. 

포기한 척 자기 자신을 숨긴 적은 있어도 실은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그것은 ‘문’을 넘어 1000년 후 세상에 온 후에도 변함없었다. 

그냥 죽어도 될걸. 어차피 죽어도 자신이 있었다는 거 잘 모를 텐데. ‘이예주’란 인물이 생존했었단 사실 같은 거 알아줄 사람 하나 없는데. 

그렇지만 이예주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남았다. 

제 곁에는 아무도 없건만 꼭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경쟁이라도 하듯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래야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과거로 돌아가서 엄마를 되살려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 하나뿐인 삶의 목표를 성취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어째서? 왜?

2층 복도 한가운데에 우뚝 선 채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자문했다. 

그러나 묻고 또 물어도 딱히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누가 당장 네가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지체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살아남았노라고. 

그런데 왜…… 

왜 자신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이후를 상상하지 못하는 걸까.

이예주는 결국 자신도 알고 있는, 마음에 덜컥덜컥 걸려서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단 하나를 자문했다.

그럼 너는 그 남자를 두고 과거로 갈 수 있어? 

람을 두고 그가 없는, 조롱이도 대왕 바퀴벌레도,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과거로. 모든 걸 두고 과거로 가서 죽을 수 있어?

“아니.”

곧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내뱉고도 너무 빠르게 말한 것 같아 깜짝 놀라긴 했지만, 이예주는 번복하지 않았다. 

당장은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눈에 띄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명쾌했다.

“안 가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니, 못 가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그 남자와 저 사이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다. 

“그래, 못 가.”

다시 그 자식의 시뻘건 눈깔을 보기 전엔 절대. 절대로. 

이예주는 제게 확신을 불어넣는 양 연달아 읊조렸다. 

그녀는 문에서부터 뒤를 돌았다. 

이제야 눈 뜬 채로 가위에 눌린 것처럼 떼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떼어졌다.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꼭 눈앞에 있는 엄마에게서 등을 돌리는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다리족이 람에 의해서 박멸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과거로 가는 방법 하나쯤은 남아 있겠지만, 당장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시 람을 만날 기회는 없을 텐데. 

과거로 가면 이예주는 되살린 엄마와 함께 용암 폭발이 일어나는 날에 죽을 것이다. 

그 말은 람과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거라는 말과 일치했다.

“그건 싫어.”

그녀는 얼버무리듯 중얼거렸다. 

만나서 진짜로 날 버린 건지, 버린 거면 왜 몸뚱이에 이런 망할 것들을 잔뜩 남겼는지 물어나 봐야겠다. 

그래서 정말 버린 거라면, 버리기 전에 잠깐 갖고 놀았다는 소리라도 지껄인다면……. 

그 잘난 얼굴에 죽빵을 세 번 갈겨 주고 그때 가서 과거로 돌아가도 늦지 않겠지. 

달칵, 이예주의 손에 의해 비상구의 문이 열렸다. 

그제야 조금 걱정이 들었다. 

타임머신이고 과거고 일단 모두 람보다 뒤로 밀어 버리긴 했는데. 

……이렇게 인생을 한순간에 막 결정지어도 되는 걸까. 

그것도 다름 아닌 남자 때문에.

비상계단 안은 여전히 어두침침하고 적막했다. 

환한 복도에 있다가 한순간에 컴컴한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도 이예주는 불안하기보단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복도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컸는데, 여긴 어두워서 카메라가 있어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대충 구조는 다 파악한 것 같고. 이제는 객실로 고이 돌아가는 것만 남은 것인가. 

“하…….”

그러나 수많은 층계를 올라갈 생각을 하니 그녀는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망할, 그러고 보니 밥도 제대로 안 먹었지.”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이란 말이오. 이예주는 난간을 부여잡고 5층으로 가는 대장정의 초입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오로지 계단과의 싸움이었다.

“……헉, 흐, 헉. 나 죽어.”

이제 막 4층으로 가는 길의 중간쯤 도달했을까. 

역시나 예상대로 이예주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였다. 

난간을 부여잡고 계단 위에 쭈그려 앉자니 눈앞이 노래졌다. 

“헉, 헉…… 뭔 놈의 계단이 이렇게 많아.” 

이예주는 그간 자신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조금쯤 정신도 체력도 단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전혀, 조금도 단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친 쇳덩이라도 삼킨 듯이 목이 칼칼하고 따끔거렸다. 

아직 그녀의 객실이 있는 5층으로 도착하려면 반 층 하고도 1층이나 더 남았다. 지금이라도 4층까지만 올라간 후에 나머지 한 층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갈까.

그렇게 숨넘어갈 듯 호흡하며 다시 계단을 오를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편한 승강기를 선택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철커덕, 쾅―!

불현듯 둔탁한 소음과 함께 머리맡이 환해졌다.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쭈그렸던 몸을 바로 했다. 

“이리 와!”

“이봐, 벌써부터 그렇게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어차피 이 계집이 도망갈 구석은 아무 데도 없으니까 말이야.”

이예주는 숨을 멈췄다. 

위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4층 비상구를 통해 들어온 것 같았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반 바퀴만 더 돌았다면 비상구 문밖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에 그녀의 둥그런 머리통이 보였을지 모른다. 

기척을 숨긴 채 천천히 계단 한 칸을 내려갔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빛이 바로 코앞이었다. 

위쪽에서 자신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넌 문이나 빨리 닫아, 이 새끼야.”

“굳이 닫을 필요 있나?”

“나도 상관없지만 이쁜이가 부끄럼 타는 것도 생각해 줘야지.”

들키면 안 되겠구나. 남자 둘이 주고받는 말소리에 이예주는 직감했다. 

그들에게 걸리면 제게 전혀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질 것을. 

그녀는 숨을 참으며 살며시 계단을 한 칸 더 내려갔다. 

그냥 이대로 한 칸씩 한 칸씩 천천히 내려가다 보면 들키지 않고 3층까지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3층 복도로 나가서, 승강기를 타면 들키지 않고……. 

“요즘 A구역에만 처박혀 있어서 이쁜이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네? 그동안 족장 놈이랑 얼마나 열심히 재미를 보셨기에 B구역에는 얼굴 한번 안 비췄을까?”

앞서 문이나 빨리 닫으라고 했던 놈보다 조금 더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쁜이라니.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호칭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것을 흘려 넘기려고 노력했다. 

이 음침한 밤에 놈들이 무슨 이유로 비상 통로로 들어왔는지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다리족은 일족 전체가 체계적인 계급으로 나누어진 군대였다. 

그러니 제 머리맡에 있는 놈들도 훈련받은 군인들이겠지. 

작은 인기척으로도 그들이 금방 자신을 알아차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손바닥 안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소리 없이 한 칸을 내려가는 데 성공한 이예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긴장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왜 말이 없냐? A구역에서 재미 좀 보았냐고!”

남자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답 없는 상대를 향해 남자들이 커다랗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예주는 그 덕에 안전하게 두 칸 더 내려갈 수 있었다. 

그녀가 슬쩍 남은 계단이 얼마나 되나 내려 보는 사이, 이번에는 좀 더 가는 목소리를 가진 놈이 지껄였다.

“에이, 고운 얼굴에 벌써부터 생채기 내면 조금 이따 재미없지.”

뱀처럼 은밀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놈이 속삭였다. 

최대한 신경을 끄려던 이예주의 팔에도 소름이 일 만큼 기분 나쁜 의도가 남자의 목소리에 짙게 배어 있었다.

“왜 B구역으로 오라고 전보 쳤을 때 무시했어? 응? 너 때문에 오빠들 달아올라서 죽을 뻔했잖냐, 흐.”

“임무 수행 중입니다.”

놈들의 소름 끼치는 말투만 들어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시바삐 비상구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새 귀에 익어 버린 무미건조한 목소리 때문에 이예주의 오른발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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