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07)화 (209/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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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꿈을 꾼 것도 잔 거라고, 탁자 위에 앉아 잠깐 졸은 것이 원인이 되었는지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대자로 뻗은 채 멍하니 천장 위만 올려다보던 이예주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에 결국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진짜 람이 날 두고 간 거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녀는 울적한 얼굴로 다시 람을 찾아갈 방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자신을 찾으러 올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길도 모르는데 무작정 람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검은 파편과 전쟁을 준비하는 여준에게 가서 다시 산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비행선에서 빠져나간 후엔 혹시 검은 파편이 어디 있는지 아냐고 수소문이라도 해야 할까. 

워낙에 가는 곳마다 커다란 일을 벌이고 다니는 남자니 가장 신빙성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먼저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여기선 또 어떻게 나가…….”

이예주는 아이처럼 울먹이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만히 있어 보았자 결국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리족이 시키는 일만 해 봤자 그들이 제게 과거로 돌아가는 법이나 람에게로 가는 법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언제나 그랬듯 선택과 행동을 해야 했다. 

망할, 선택과 행동. 사나운 꿈자리 때문에 잠시 미뤄 뒀던 타임머신을 떠올리니 잊고 있었던 고뇌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점령했다.

“잠깐 둘러봐야겠어. 여준 놈도 그러라고 하기도 했고.” 

물론 정확히는 ‘유나 일병과 함께’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기실 다리족의 근거지인 비행선은 철통같은 보안 때문에 여준의 허락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나 언제가 될지 모를 탈출에 대비하여 내부 구조를 알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과 천지 차이다. 

이예주는 결국 방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나갈 채비를 하며 그녀는 창밖을 살폈다. 빛 한 점 보이지 않은 창밖은 완전한 어둠에 점령되었다. 

“새벽 같은데…….”

방 내부에는 시계가 없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낮에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겠지.

이예주는 다른 층들을 대충 둘러보고 올 심산으로 부산스럽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는 먼저 욕실로 가서 제가 벗어 놓은 옷들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람이 사 준 포대를 입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과감히 포기했다. 

비행선 내부는 온도가 쾌적하여 굳이 껴입고 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

선반 안에 그토록 혐오하던 로브를 소중히 개어 넣던 이예주는 문득 변기 위 천장에서 아까는 보지 못한 네모난 환풍구를 발견했다. 

한껏 고개를 쳐들고 위를 바라보던 그녀는 불쑥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올라섰다. 

가까워진 천장과의 거리 덕에 환풍기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화장실 스위치와 일체형인 것일까. 촘촘한 철창 안에서 먼지 낀 프로펠러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보다 더 안쪽은 어떨지 몰라도 생각보다 입구가 컸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 큰 구멍을 발견하지 못했나 의문이 들 만큼. 

“웅크리면 쑤셔 넣을 수 있으려나?”

환풍기 구멍과 제 몸 크기를 대조해 보던 그녀는 손을 뻗어 먼지 떼가 덕지덕지 끼어 있는 뚜껑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열리긴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건 안 열리겠지……?”

환풍기 뚜껑 가장자리 네 곳에 십자 나사가 단단히도 박혀 있었다. 

만능열쇠가 드라이버인 것도 아니고 나사의 작은 십자 틈에 쑤셔 넣어 봤자 돌아갈 리 만무했다. 

어차피 환풍구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뚜껑이 쉽게 열린다 하더라도 바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괜한 아쉬움에 나사를 한참 바라보다 변기 위에서 내려왔다. 

“어디부터 가야 하나…….”

제 방 카드 키 하나 달랑 들고 나온 이예주는 방문 앞을 나서면서부터 막막함을 느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개미 새끼 하나 나다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때문에 어쩐지 조금 섬뜩해졌다. 

수십 개의 객실이 있는데 막상 여기에 묵고 있는 사람이 정작 자신뿐이면 어쩌나, 하는 괜한 상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507호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어떻게 하면 더 싸가지 없게 말을 해 구원자의 속을 박박 긁을 수 있을지 고심하는 여자애가 있으니. 

“아오.” 

이예주는 마치 눈앞에 유나가 보이는 듯 507호를 향해 여러 번 주먹을 날렸다. 

그러고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복도 끝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복도 끝에 다다른 그녀는 승강기 근처에 멈춰 잠시 고민했다. 

초록색 등이 켜져 있는 비상계단 입구가 엘리베이터와 나란히 있었다. 

선택지가 갈린 것이다.

일단 자신이 있는 5층은 최상층이었다. 

대충 훑어보아도 객실만 있는 것이 확실하니 B구역의 전체 구조를 알려면 한 층, 한 층 내려가면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B구역은 A구역보다 훨씬 넓고 층수도 많아 일일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대충 각 층이 어떻게 생겨 먹었고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만 보면 되는데. 

그러기엔 엘리베이터가 비상계단보단 훨씬 편리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다른 층에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다간 자칫 최악의 상태에 이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여준의 말처럼 어떤 층이 실험실이라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유독가스가 가득하다거나, 아니면 군인들이 모여서 무기 실험을 하고 있다거나. 

게다가 층마다 버튼을 다 눌러 놓고 내리지도 않는 건 너무 티 나잖아. 염탐하는 게. 

이예주는 CCTV 화면에 비칠, 누가 봐도 수상쩍을 제 모습을 상상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올라올 때 좀 고생하더라도 변명할 여지나 도망갈 통로가 있는 비상계단이 낫지. 

마침 들어오라는 듯 활짝 열려 있는 비상계단 입구의 철문 또한 그녀가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짧은 시간 동안 깊은 고민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 계단 입구로 발길을 떼었다. 

“올.”

그동안 온갖 고생 하더니 좀 똑똑해졌어, 이예주. 

계단 통로에 들어서며 자기 자신을 셀프 칭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타닥, 타닥. 비상 통로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이예주의 발걸음 소리가 자못 경쾌했다. 

1층은 아까 전 보았으니 2층부터 4층까지만 확인하면 된다. 

세 층을 빠르게 둘러봐야 했기 때문에 걸음을 연신 재촉했다.

다행이도 비상구는 계단이 끊기는 구간마다 벽에 초록빛의 LED등이 붙어 있어 시야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층과 층 사이의 거대한 높이 때문인지 고작 한 층 내려가는 것임에도 계단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아 금방 숨이 찼다. 

“헉, 헉…….”

4층에 막 도착했을 때 이예주는 난간을 붙잡고 한참 헥헥 거려야 했다. 

활짝 열려 있던 5층과는 다르게 4층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예주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혹시 문 앞을 누가 지나다니고 있을까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철컥, 비상계단 안이 너무 쥐 죽은 듯 조용한 탓에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천둥 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이예주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4층의 복도는. 

“하.” 

허탈함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뭐야. 다 자는 건가? 그녀는 긴장을 풀고 마저 남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고개를 빼꼼 밖으로 빼냈다. 

4층은 5층과 같은 구조였다. 

비상계단 입구와 엘리베이터 정면의 복도, 그리고 복도 양옆의 벽에는 ‘4’로 시작하는 호수가 적힌 객실 문들이 마주 선 채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놀라울 만큼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4층의 모습에 이예주는 곧바로 흥미를 잃고 다시 문을 닫았다. 

4층, 일반 객실 층. 그녀의 머릿속에 B구역의 정보 하나가 입력되었다.

이예주는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기분 탓인지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길의 계단이 방금 전보다 더 많게만 느껴졌다. 

아니면 이미 체력이 고갈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내려오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2층에서 5층까지 올라갈 땐 얼마나 죽을 것 같을까. 

“망할.”

다시 걸어 올라갈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을 때쯤 그녀는 벽에 ‘3’이 선명하게 쓰여 있는 통로에 도착했다. 

이미 위층에서 한 번 겪고 왔기 때문에 문을 여는 손에서 더 이상 망설임이나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문고리부터 잡은 그녀는 곧바로 대담하게 그것을 돌려 잡아당겼다.

“뭐야.”

그러나 허무하리만치 쉽게 열렸던 4층 문과는 달리, 3층의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컥, 철커덕. 몇 번을 더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헛고생을 한 탓인지 허탈하면서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비상시에 대피로로 이용해야 하는데 왜 잠가 놓고 난리야.”

이예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3층, 문 잠겨서 확인 못함. 

확인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지 않고 계속 문 앞에 서서 미적거렸다. 

실은 가장 확인해야 할 곳이 바로 B구역의 2, 3층이었다. 

본부에서 여준이 뭐라 했던가. 

―B구역의 2, 3층은 아까 말씀드렸던 최첨단 장비들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습니다.

최첨단 장비들. A구역에는 없었으니 필시 이쪽에 타임머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개발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이예주는 여준의 말을 다 믿진 않았다. 

놈은 처음부터 입 안의 혀처럼 굴면서 그녀가 원할 만한 미끼들만 계속 던져 대었다. 

그러니 타임머신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의심해 볼 만했다.

물론 2, 3층에 온다고 바로 여준이 말한 최첨단 기기들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걸었기 때문일까. 마지못해 2층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묘하게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래도 이제 2층 하나 남은 거네.”

힘내자, 예주야. 

또다시 수많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그녀의 발길이 어느 순간 평평한 바닥에 닿았다. 

더 이상 내려갈 층이 없는 것을 깨닫자 숫자 ‘2’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벽이 보였다.

“하! 이제 마지막이야, 드디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탄성을 내질렀다. 

고작 서너 층 둘러보는 것쯤이야 힘 안 들이고 금방 할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 보니 모든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층과 층 사이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계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려오는 내내, 아니 이 비행선 안으로 들어온 내내 단 한 번도 풀지 못했던 긴장 때문이었다. 

이예주는 2층의 비상구 문의 문고리를 지체 없이 움켜쥐었다. 

“여기에 그 타임머신이라는 게 있으려나.”

과거로 갈 수 있는 단서. 가슴이 마구 수런거렸다. 

사실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나름 필사적으로 고군분투해 왔던 것 같은데. 

다리족에 와서 그토록 찾았던 과거의 흔적과 단서를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명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타임머신이 실존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달라진다면 그건 어느 쪽? 

어차피 멸망할 과거, 깨끗이 포기하고 이 1000년 후 지구에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이를 악물고 살아남는 쪽, 아니면…… 

그 남자를 포기하고 그가 없는 과거로 돌아가서 죽어 버리는 쪽.

철커덕. 그녀는 일단 성급히 문고리를 돌렸다. 

3층과 달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앞선 경험을 토대로 고개를 내밀 수 있을 만큼만 틈을 벌린 채 이예주는 그 사이로 제 머리통을 비집어 넣었다.

타임머신이 있을지도 모를 다리족의 실험실을 볼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생각 외로 간단해도 너무 간단한 구성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문 너머로는 끝없이 늘어서 있는 하얀색 벽뿐이었다. 

복도 구조가 가로로 돼 있다는 점과 객실 문이 없다는 것이 다른 층과의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비상구와 엘리베이터는 끝없이 늘어진 벽의 중간 지점이었다. 

꽤 넓은 폭의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비밀 번호를 입력하는 장치가 달린 문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무슨 층이 이렇게 생겨 먹었다냐…….”

B구역 2층의 모습은 꼭 팔족 족장의 서재를 연상시켰다. 

그곳에도 길쭉한 복도에 문만 하나 달랑 있어서 들어갈 또 다른 곳을 찾느라 갖은 고생을 했지 않았나. 

그땐 무슨 패기로 당장 귀신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헤치며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과거’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이 뒤집혔으니까……. 

지금의 자신은 훨씬 밝은 조명 아래 있지만 그때와 같이 다른 문이 있나 알아보고 다니는 짓거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팔족 족장의 저택에 비해 이곳의 규모가 몇 배는 더 크거니와,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굳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조차 없었다. 

원치 않아도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제 앞에 있는 것이 다리족의 실험실이 분명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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