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란 답변은 생각지도 않는 것인지 샤워 가운 틈새로 보이는 가슴팍까지 바짝 미는 폼이 역시나 싸가지가 없었다.
피부에 와 닿는 플라스틱 쟁반 모서리가 차가웠다.
이예주의 반사적으로 흉악하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내리 누르며 후욱, 후욱 심호흡했다.
참자, 예주야. 애가 좀 힘들게 자라서 그런 거야.
안 그래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시시한 기 싸움에 더 이상 소모할 신경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예주는 치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히고 나름 상냥하게 거절했다.
“안 먹을래.”
“드십시오. 구원자님을 생각해서 족장님이 특별식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특별식? 그녀의 시선이 흘긋 아래로 내려갔다.
견갑골 살이 눌릴 만큼 들이밀어진 쟁반 덕에 쉽게 특별식이라는 것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플라스틱 쟁반 위에는 플라스틱 식판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한눈에 봐도 셀 수 있을 만큼 조악한 음식물뿐이었다.
이것을 과연 음식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밥을 놓는 자리에는 밥 대신 꿀꿀이 죽 같은 허여멀건 죽이 자리했다.
반찬을 놓는 자리에는 건빵 몇 개와 군용 식량인 듯한 네모난 은색 포장지, 그리고 정체불명의 알약이 놓여 있었다.
죽의 옆자리, 국을 놓는 자리에는 알약보다 더 심각한 것이 놓여 있었다.
A구역 생산실에서 보고 온 에너지 바라는 빌어먹을 것들이 무려 3개나 쌓여 있는 게 아닌가!
“특별식? ……이게?”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생산 과정을 확인하고 온 에너지 바를 보고 있자니 이예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비꼬는 어조에 유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 저도 양심이 있지. 이런 걸 무슨 특별식이라고 거짓말해.
차라리 미끼가 돼야 하는 끔찍함을 감수하더라도 인면어를 한 마리 더 잡아먹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예주는 불퉁한 표정으로 식판을 내려다보며 흘긋 턱짓했다.
“이 알약은 또 뭐야.”
“영양 캡슐입니다. 인체에 필수적인 영양소들을 모아 알약 형태로 응집시킨 것입니다. 구원자님의 영양이 많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에, 족장님께서 이것을 밥과 함께 꼭 드시길 당부하셨습니다.”
“그냥…… 안 먹을래.”
이예주는 문 안쪽으로 반걸음 슬쩍 물러서며 가슴팍에 바짝 붙은 쟁반에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떨어졌다는 착각도 잠시, 유나가 반걸음 훌쩍 다가와 다시금 가슴팍에 쟁반을 들이밀었다.
“받으십시오.”
“나중에 배고프면 따로 말할게. 지금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 일단 도로 가져가.”
“지금 받아서 드십시오. 받으시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아, 안 먹는다니까?”
거듭된 거절에도 제 뜻을 굽히지 않고 식판을 들이미는 유나 탓에 이예주가 기어이 큰 소리를 냈다.
아, 난 몰라. 분명 안 먹는다고 했어.
이예주는 그녀가 쟁반을 들고 밤새 서 있든 말든 관심 끄기로 결정했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서 있으니 몸이 금세 서늘해졌다.
일단 빨리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 다음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제 몸에 난 자국들에 대해 심도 있게 고뇌를…….
하. 다시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각에 이예주는 눈을 질끈 부여 감으며 문에서 뒤돌았다.
“어쨌든 나 별로 생각 없으니까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 내가 밥 안 먹어서 한 소리 듣는 거면 내가 내일 여준 씨한테 잘 말할게. 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문은 네가 알아서 닫고…… 어, 어!”
이예주는 불현듯 제 어깨를 밀치고 저 대신 제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간 인물 때문에 마음 편히 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어찌나 거세게 밀쳐졌는지 그녀의 몸뚱이가 힘없이 벽 쪽으로 퍽 처박혔다.
그 앞을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지나친 것은 다름 아닌 유나였다.
“야, 야! 너 뭐 하는 거야! 허, 참.”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기 방이야?
어쩜 저렇게 방 주인보다 더 당당한 기세로 침입할 수 있지? 양해조차 구하지 않은 채로.
잘못이라곤 없다는 듯 걸음걸이에 힘이 가득 담긴 침입자는 방주인을 밀치고 침투한 것도 모자라 침대 옆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놨다.
탁. 힘을 줘서 내려놓은 탓에 둔탁한 소리가 커다랗게 내려앉았다.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둘째치더라도, 여러 번 거절했는데도 식사를 강요하는 계집애의 예의 없는 행태는 참고 넘길 수 없었다.
“야! 안 먹는다고 했잖아!”
이예주는 재빨리 유나가 있는 쪽으로 쪼르르 뛰어가며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안 먹는다는데 왜 이래!”
“왜 안 먹어?”
유나는 밥을 안 먹는 이예주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일순 ‘이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냐. 너 같음 이딴 것을 밥이라고 먹겠냐!’ 하고 본심을 토로하려던 이예주는 순간 멈칫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는 이게 주식일지도 모르는데.
어떤 사람들인지 다 파악도 못한 상태에서 감정이나 생각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녀는 앞니로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후…… 알았어. 그럼 두고 나가. 이따가 먹을 테니까.”
“왜 안 먹으려고 하는데.”
“그야 먹기 싫으니까 안 먹지. 근데 이게 왜 또 반말이야? 쥐똥만 한 게!”
말꼬리를 잘라먹는 유나의 말본새를 이제야 깨달은 이예주가 버럭 버릇없음을 꼬집었다.
그러나 열일곱 난 어린 여군은 아직 교육이 덜 됐는지 여준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구원자님의 지적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비꼬는 건지 아닌지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좋겠다. 그렇게 배부른 소리도 할 수 있어서.”
“뭐야? 이게, 배부른 소릴 하긴 누가……!”
“구원자랍시고 갑자기 네가 나타나 버려서 여기 얹혀 사는 눈족 아이 세 명은 오늘 쫄쫄 굶어야 돼.”
배부르긴 개뿔, 밥 한 끼 굶는 것에 제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몰라 인상을 쓰던 이예주가 덧붙여진 유나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누가, 몇 명이 굶어? 굶는다고?”
이예주가 얼뜨기처럼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유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 위에 내려놓은 식판을 가리켰다.
“그 애들이 먹을 에너지 바 3개가 네게로 다 배당되어 버렸으니까.”
이예주의 시선이 그녀의 펼쳐진 검지를 따라 움직였다.
그 끝에 도토리묵을 잘라 놓은 것 같은 모양새의 가무잡잡한 네모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먹어? 걔네는 없어서 못 먹는 것들이 다 네 식판으로 쏟아졌는데 왜?”
“…….”
“역겨워? 더러워서 먹기 싫어? 그래도 주린 배 잡고 밤새 끙끙대는 것보단 나아. 이런 거라도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어투에 이예주는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정확히는 말 때문이 아니라 유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드러난 감정 때문이었다.
이게 특식인 거냐고, 너 같으면 먹겠느냐는 소리가 입 밖까지 나오긴 했다.
황급히 말을 멈췄지만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유나 또한 어떤 제조 과정을 거쳐 에너지 바가 탄생되는지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역겹고 더럽다는 적나라한 말들을 입에 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너무 미미하게 드러난 탓에 꿈틀거리는 눈살에 담긴 그것이 정확히 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노인가? 아니면 짜증? 경멸?
아니, 아니다. 미동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나의 표정이 꼭…….
절박하고 억울해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데, 너는 왜 우리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하는 것처럼.
“쥐 대가리로 만든 이거랑, 기어 다니는 아무 벌레나 잡아 으깨 만든 이 죽 먹는 것보다 굶어서 죽는 게 훨씬 더 역겹고 더러워. 이걸로도 부족해서 겨우겨우 버티다가 죽어 나가는 인간들이 태반이야.”
희멀건 죽의 정체를 유나가 제 입으로 먼저 토로했다.
죽의 정체성을 알게 된 이예주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런데 넌 왜 안 먹어? 넌 구원자라며. 구원자는 원래 다 너처럼 그래?”
“…….”
“우릴 구원해 준다며. 아, 너무 고귀하셔서 이런 더러운 건 못 먹겠다는 건가? 아무것도 안 먹어도 풍족해? 구원자라고 사람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줄 테니까, 이딴 거 안 먹어도 풍족하겠지. 그렇지? 너는 깨끗하다 못해 고결하고, 우리는…….”
“너.”
이예주는 점점 격양되는 유나 일병의 말을 황급히 끊었다.
정말 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밥을 먹네 안 먹네와 같은 잠깐의 실랑이에도 힘이 쭉쭉 빠지는데, 이 망할 곳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과연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너……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 웅얼거리듯 쏟아내는 이예주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가라앉았다.
“뭐?”
유나가 반말로 되물었다.
그녀의 예의를 지적하는 것을 이예주는 이제 체념했다.
“아까는 내가 구원자가 아니니 착각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망할 놈의 구원자란 소린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너희들이 말한 구원자라고 해도 말이야. 네가 나 먹는 것 하나까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어.”
“…….”
“나 때문에 굶는 애들이 있다고? 그럼 이거 다 가져다줘. 안 먹는다고 했는데도 굳이 가져다준 건 너잖아. 그리고.”
이예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흘끗 유나 쪽을 흘겨보았다.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새파랗게 눈을 치켜뜨고 이예주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너야말로 왜 아까부터 시비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나 눈여겨보고 있더니…… 꼭 트집 잡지 못해 안달 난 애같이.”
“그건…….”
“너희 족장이 날 구원자라고 불러서 화가 나는 건 이해하는데. 나도 나 같은 애를 왜 그렇게 거창하게 부르는지 잘 모르겠지만…….”
허, 나 참. 이예주는 자신이 왜 이렇게 자기 비하까지 하면서 변호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연신 실소가 튀어나왔다.
“하여간 그래. 마음에 안 드는 애 시중까지 들려니 짜증도 나겠지. 네 맘은 이해해. 그렇지만 뭐 별 수 있어? 내가 시중들 사람을 너로 지목한 것도 아니고. 너도 결국 명령받아서 하는 일인데…… 아, 아까 여준 씨가 바꿔 준다는 말에 내가 거절 안 해서 그래?”
이예주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나 유나는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이예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유나의 얼굴은 하얗고 무감각했다.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 순 없어도 얼굴 위에 드러냈던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런 거라면 내가 정말 미안하고. 그리고 지금 내가 정말 밥 생각이 없어. 이건 역겹고 더러운 걸 떠나서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픈 거니 오해하지 마. 이거 안 먹은 건 내가 내일 여준 씨한테 따로 말할 테니까 너도 지내는 동안 굳이 나 챙기려고 들 필요 없어. 진짜, 진짜로.”
진짜 필요 없다고.
이예주는 강조하듯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자칫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냉정한 선 긋기였다.
제 입으로 내뱉고도 이예주는 기분이 얼떨떨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필요 없나? 어쨌거나 과거의 흔적과 가장 가까이 관계돼 있는 시간족인데. 유나를 빼면 지금까지의 대우도 그리 나쁘지 않고.
이런 텃세야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인류들이 있는 곳에 가도 언제나 겪었던 것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조금만 참으면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진심이었다.
과거로 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어차피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텐데. 굳이 내숭 떨면서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 필요 없어.”
평이한 어조였지만 이곳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 말이었다.
그 안에 담긴 속뜻을 눈치 챈 유나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지만 이예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예주의 발언 이후로 유나에게선 답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차가운 정적이 스며들었다.
유나는 여전히 하나뿐인 눈을 또렷이 뜬 채 노려보고 있었고, 이예주는 나름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 마주 서서 대치하는 형상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예주가 퍼뜩 상념에 깨어났을 즈음, 앞에 서 있던 어린 여군이 먼저 딱딱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앞이나 좀 가리지.”
“……뭐?”
뜬금없는 말에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유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얼굴이 여전해서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검은 파편이랑 놀아나는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것도 모르냐?”
“뭐, 뭐…….”
유나는 이해하지 못해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예주에게 마지막으로 톡 쏘아붙인 후 쌩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저게 갑자기 뭔 헛소리야.”
순식간에 홀로 남은 이예주는 멍하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별생각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잘 여미고 나왔는데, 어느새 벌어졌는지 샤워 가운 사이로 제 쇄골과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자국들도.
단 몇 초 만에 이예주의 얼굴이 핏기가 싹 가시고 하얀 도화지처럼 변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곧 터질 홍당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
저 못된 년이 어딜 보고!
“야! 너, 너 이리 와 봐! 야! 야, 이년아악—!”
그녀가 화다닥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뒤늦게 괴성을 질렀지만 이미 유나는 수치심만 잔뜩 심어 준 채 방을 빠져 나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