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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205)화 (207/319)

잠깐 잠든 새에 수두라도 걸린 걸까? 

목과 가슴 주변에 붉고 퍼런 반점들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이건 혹시 꿈의 연장선인가? 

이예주는 다시 두 손을 들어 어푸어푸 마른세수를 했다. 

“흐, 으으! 정신 차려!”

그녀는 신들린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찹찹, 볼 따귀를 두어 번 때렸다. 

아직도 꿈에 빠져 있는 정신을 깨워야 했다.

따끔한 고통에 정신이 얼추 맑아지자 그녀는 오만상을 쓰며 감았던 두 눈을 슬며시 떴다. 

그리고 거울 속 제 모습과 마주했다. 

“아악! 이, 이게 뭐야?!”

하지만 거울 속의 제 모습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몸에 난 검푸른 울혈들이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만 보였다. 

미치고 펄쩍 뛸 제 모습에 정신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그거, 꿈 아니야……?” 

빼곡하게 자리한 자국들이 너무 야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목과 쇄골 부분에는 띄엄띄엄 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예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브래지어 끈을 내렸다. 

마담 페니의 가게에서 산 속옷이 스르륵 내려갔다. 

밝은 화장실 조명 아래,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

“……미쳤어.”

꿈속에서 람에게 물렸던 것과 일치했다. 

핏기가 가신 이예주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아아악! 미쳤어―!”

*       *       *

“으, 으흐으!”

쏴아아―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추위로 파랗게 변색된 입술 사이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 시린 감각에도 이예주는 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제 발끝을 응시하려 애썼다. 

곁눈질로 보이는 제 몸뚱이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아니, 피한 것이 아니라 차마 보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이예주는 왜 제 피부 위에 키스마크 같은 것들이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서, 성인 영화에서만 보던 야, 야하고 나, 남사스러운 것들이…….

“뭐야. 대체 뭐야…….”

너무 람 생각을 많이 해서 사실 심각한 욕구불만이었던가? 

그 남자와 키스 이상을 하고 싶어서 그딴 망할 꿈을……. 

하지만 제 몸에 있는 것들이 그게 꿈이 아님을 여실히 알려 주었다. 

자신이 정신이 나가 잠결에 제 몸을 깨물지 않는 이상! 

호, 혹시 요즘 너무 몸을 혹사한 나머지 기력이 쇠해서 귀접이라도 당한 건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며 이 어마어마한 사태 원인을 파헤쳤지만, 그나마 신빙성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귀접설이었다. 

언젠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귀접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꿈에서 성관계를 통해 귀신이 인간의 기를 빼앗아 갔다고. 

그래. 기가 너무 허약해져 람의 얼굴을 뒤집어쓴 귀신에게 홀린 거야. 

그렇지 않은 이상……. 

그렇지만 그 인터넷 글에 꿈의 흔적이 이렇게 현실로 남기도 한다는 말이 있었나? 

“미친, 미친! 무슨 1000년 후에도 색귀가 있어!”

이예주는 물을 흠뻑 머금은 채 늘어진 머리를 발작적으로 흔들었다. 

샤워 박스의 유리벽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찬물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한참을 고스란히 맞고 있자니 추위에 몸뿐만 아니라 머리도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수도 밸브를 잠갔다. 찬물은 정신 차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밸브를 온수 쪽으로 바꾸었다.

쏴아아― 차게 식은 피부와 뜨뜻한 물이 만난 탓에 유리 박스 안은 금방 수증기로 가득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몸뚱이에 일어난 일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뜯어도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예주는 이제 그만 이성을 차리고 제 몸을 정면으로 마주할 결심을 굳게 다졌다. 

“일단 화, 환부가…….”

환부의 범위가 어느 정도 되는지, 또 얼마나 심한지 알아야 하니까……. 

두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이예주는 엄지발톱에 고정해 둔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곧바로 탄식 어린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하, 어쩐지…….”

아침에 말려 둔 옷을 입을 때 천에 쓸리기만 했는데도 미친 듯이 아프더라니. 

“지, 지가 무슨 좀비야? 뱀파이어라도 되냐고!”

왜 남의 귀한 살을 이렇게 물어뜯고 그래! 흐엉엉! 

눈물을 찔끔 나왔다. 아침부터 이미 존재하던 이것들을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정말 대단할 지경이었다. 

그렇담 람의 탈을 쓴 색귀가 아침에 이어 두 번째로 자신을 찾아왔단 소리란 말인가. 

이예주는 아직도 실제처럼 생생한 꿈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애써 침착하게 그 내용을 돌아보자 묘하게 아침의 꿈과 내용이 비슷했다. 

하나의 공통분모를 찾자 두 번째부턴 쉬웠다. 

두 꿈 모두에서 람은 자신에게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지껄여 대었다. 

어떤 기한을 정해 주었던 것 같은데. 개화기가 끝나는 사흘까지라고 했던가?

“어.”

생각을 거듭하던 이예주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뤼미에르. 뤼미에르의 개화기는 딱 사흘간이었다. 

개화기는 사흘. 

사흘간 기다리겠다…… 

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개화기가 사흘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이것은 1년 중 딱 사흘간, 해가 지기 전 약 3시간가량만 개화하고 바로 진다. 세 번이란 그 얼마 안 되는 기회 동안 꽃을 피우면서 봉오리 끝에 있는 자방을 터뜨리는데, 인간들은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꽃봉오리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꺾어 가더군.

흉측스럽게 변해 버린 뤼미에르 뿌리의 모습에 대경실색하던 자신에게 대수롭지 않게 설명해 주던 남자의 목소리가 스치듯이 떠올랐다. 

“그치만…… 아니야.”

고작 그 한마디로 자신이 개화기가 사흘이라고 이토록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그럼 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어디서, 어디서! 

가슴이 쿵, 쿵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꼭 꿈처럼 기분이 묘하고 껄쩍지근한 것이…….

―그러니 나를 선택해.

람이 제 턱을 와득 움켜쥐고 눈을 마주한 채 한 자, 한 자 짓씹듯 말했다. 

훌쩍훌쩍 울며 아프다고 웅얼거려도 놔주지 않았다. 

자신을 한 입에 삼켜 와득와득 씹어 먹을 것처럼 검붉은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맞아! 눈이 검붉었어.”

이것도 꿈의 공통점이었다. 

눈이 탁하고 음습하리만치 검붉어서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개화기가 끝나는 사흘간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니 내 인내심이 끊기기 전에, 내게로. 돌아와, 예주야.

꿈의 연장선인지 무의식적 상상인지 모를 장면들에 환장할 것만 같았다.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뜨니 장면이 전환되었다. 

생소한 검붉은 눈,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던 남자가 어느덧 욕정이 가득 밴 표정을 한순간에 숨겼다. 

그러고는 성직자 같은 금욕적인 얼굴로 제 단추를 하나하나 상냥하게 채워 주기 시작했다.

―잊지 마, 예주야. 개화기가 끝날 때 까지다.

예주야. 개화기 끝날 때까지. 그렇지 않으면. 예주야, 예주야…….

“으으! 그만해! 그만해!”

소록소록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이예주는 정면에 있는 거울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손등이 찌르르 아파 왔다.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꿈의 잔영인지, 아니면 람을 원하는 제 음심이 만들어낸 상상인지, 아니면 진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들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 비행선까지 오게 되었더라? 

어제저녁만 해도 그 남자는 분명 다리족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자신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또 뭐라 했더라. 

다리족은 위험하니 자기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그리고…….

하나가 이상하자 모든 것이 다 이상하게만 다가왔다. 

그 남자의 예상치 못한 말에 심장 구타를 당한 자신은 분명 정상으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산장을 뛰쳐나와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가다듬으며 그동안 그에게 거짓말하고 숨겨 왔던 능력에 대해 모조리 실토할 결심을 했지 않나.

그런데 자신이 람에게 정상으로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어젯밤의 기억들을 되살리기 위해 이예주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으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람에게 제 능력이나 산꼭대기로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왜지? 왤까. 

모조리 말하겠다고 알콜 딸기들까지 다 주워 먹고서 왜 말한 기억은…….

“헐.”

알콜 딸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딸기들을 꺼내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던 여자의 잔영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이.

“아, 알콜 딸…… 흐, 흐읍!”

새어나오는 비명에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서, 설마. 나 그 알콜 딸기 처먹고 일 친 거 아냐? 갑자기 그 남자한테 달려들어서! 막, 막 덮치고! 

―이건,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

꿈속의 람인지, 지워진 기억 속의 람인지 모를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뤼미에르 들판에 갇힌 후 설풋 웃는 모습은 몇 번 보았지만 그렇게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음.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게다가 그의 눈. 평소처럼 빨갛긴 빨간데, 어딘가 이상한 람, 그의 눈이. 

―그럴 필요 없겠군.

기괴하고 음습한 웃음을 띤 얼굴이 제 쪽으로 훅. 

시시각각 다가오는 빨간 입술, 검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겁고, 야한. 야한…….

“아악! 아악, 미쳤어! 그만해!”

이예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모기들이 집중 공략한 것 같은 이 자국들은 뭐야. 

그놈의 귀접 같은 야한 몽정은 다 뭐고, 사흘 안에 돌아오라는 소리는 또 뭐냐고! 

쭈글쭈글해져 가는 제 발끝으로 다시 고개를 내린 이예주의 얼굴이 벌게졌다 파래졌다 결국 창백해졌다. 

폭우같이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살을 느끼며 이예주는 벽에 머리를 툭 가져다 대었다. 

타일 벽의 서늘한 감각이 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한결 식혀 주었지만, 터질 것처럼 과열된 머릿속은 식혀지지 않았다. 

“으흐으으…….”

그녀의 입술 새로 귀신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와 샤워 박스 안에 텅텅 메아리쳤다. 

아무리 고민하고 되새김질해도 결국 답은 하나였다.

알콜 딸기를 먹고 맛이 간 사이에 아무래도 남자와 상상도 못할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일이 대체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아니 꿈속에까지 나타나 개화기가 끝나기 전에 오라고 협박하는 람이 무서워서라도, 이예주는 속히 산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압박감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사흘. 

망할 다리족놈들의 근거지인 이 비행선에 올라탄 후 이제 하루가 져 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었다.

*       *       *

비익, 비익, 비이익─ 

샤워기를 잠그기 이전부터 쉴 새 없이 울리는 벨 소리에 이예주는 물기를 닦지도 못한 채 서둘러 샤워 가운을 걸쳤다.

비익, 비익, 비익! 

수건으로 대강 머리를 감싸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그녀는 결국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 나가요! 나가!”

지긋지긋한 다리족 놈들! 

안에서 답이 없으면 잠을 자거나 어디 갔으려니 해야지, 몇십 분간 계속 저렇게 미친 듯이 벨을 눌러 댈 건 또 뭐래. 

자신의 말을 끊고 끈질기게 제 말만을 지껄여 대던 다리족 족장놈과 족장이 사라지자마자 있는 싸가지 없는 싸가지 싹싹 그러모아 본성을 드러냈던 유나가 떠올랐다. 

이예주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드르륵, 쾅! 

물기 묻은 손으로 허겁지겁 욕실 미닫이문을 연 이예주는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방문을 향해 달려갔다. 

비익, 비이익. 

그 와중에도 울리는 벨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이렇게 끈질긴 것을 보면 여준이 틀림없을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자식, 별일 아니면 죽어!

“누구세요!”

쿵쾅거리며 방문 앞까지 도착한 이예주는 곧 방문을 열려면 카드 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우당쾅쾅 협탁까지 되돌아갔다. 

헐레벌떡 현관에 도착해 숨을 몰아쉬며 리더기에 카드를 긁고 난 후에서야 벨소리가 끝이 났다. 

“누구…… 뭐야.” 

마찰음과 함께 열린 문 앞에는 가장 보기 싫은 인간 두 명 중 한 명이 언제 시끄럽게 벨을 눌러 댔냐는 양 무표정한 낯으로 서 있었다. 

연달아 울려 퍼지던 벨 소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은 이예주 혼자뿐인 것 같았다.

“저녁 식사입니다.”

유나였다. 

이예주를 역겹다고 칭한 새파란 계집애가 융통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들고 있던 사각 쟁반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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