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04)화 (206/319)

그것이 뭘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쓸모가 없어진 이예주를 가지 쳐 내듯 쳐 낸 것이다. 

그 괴팍한 성격에 쓸모가 없어졌다고 자신을 죽이지 않고 온전히 버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인가. 

이미 모든 정황들이 버림받은 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한편으론 그럴 리가 없다고,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자신이 우스웠다.

“정말…… 정말 버린 건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실제로 입 밖에 내니까 그동안 부인했던 것이 부질없을 만큼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단어가 주는 현실감에 애써 괜찮은 척했던 이예주의 얼굴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진짜 자신을 버린 거면, 그럼 뤼미에르 들판에 갇혀 있던 사흘간의 일들은 다 꿈이란 말인가? 

그 행동은 다 거짓말이었던가?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긍정적인 대답은 받지 못했지만, 차갑게 내치진 않았다. 

내쳤을 거면 애초에 역성을 냈겠지. 꽃을 좋아하지 않느냐 묻지도 않았을 거고, 배고프다 했을 때 인면어를 잡아 친히 밥을 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면 용기 내서 손을 잡고 뽀뽀를 했을 때 티를 내지 않았을까.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안아 주며 달래 주지도 않았을 테고…….

“버릴 거면 나 같은 거한테 잘해 줄 필요 없었잖아.”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하자니 바로 어제 일인데도 벌써 요원한 옛일 같게 느껴졌다. 

이예주는 울적한 얼굴로 창턱에 기댄 팔에 얼굴을 묻었다. 

“좋았는데…… 정말 좋았잖아. 우리 사이, 괜찮았잖아.”

그런데.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고? 

그냥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불쌍해서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깐 잘해 준 거야?

“진짜 나 버렸어요?”

그녀는 두 팔에 묻었던 고개를 슬쩍 들어 다시 먼 창밖을 바라보며 어차피 대답을 듣지 못할 사람에게 물었다.

“……진짜 나 버렸냐고요.”

대답은커녕 이제 다시 볼일이나 있을까 싶었다. 

남자를 영영 못 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속에서 울컥 뜨거움이 치솟았다. 

“대답해 봐요! 진짜 나 버린 거예요?”

이예주는 마치 새벽녘 ‘자니.’ 하고 보낸 문자에 답 없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구남친처럼 애절하게 외쳤다.

“왜 대답을 못해, 이 자식아! 단물 다 빼먹으니까 이제 필요 없어져서 버린 거냐고!”

점점 흉포해지던 기세가 한순간 사라졌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울먹거렸다.

“……흑, 그럼 난 어떡해.”

이렇게 좋다고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를 포기하는 걸 고민할 만큼. 

그동안 꼭꼭 숨겨 왔던 능력에 대해 토로하고 그 곁에 있고 싶었던 사람이 이전에는 한 명도 없어서, 이예주는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떡하지?”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두 팔에 얼굴을 와락 묻었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혼자가 될 줄은. 

게다가 자신을 구원자라고 떠받드는 것도 모자라 람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 미친놈들 소굴에 갇힐 줄이야.

“나 진짜 이제 어떡해…….”

하루 동안 꾹 눌러 참았던 불안함과 두려움이 둑 터지듯 터져 나왔다. 

길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이예주는 두 팔에 고개를 더욱 깊이 묻었다. 

람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커다란 바위가 되어 위에서 한껏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무겁고 무섭다.

 그래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       *

“으, 으응…….”

가슴이 따끔따끔 따가웠다. 

마치 속옷을 안 입고 꺼끌꺼끌한 재질의 상의를 걸친 것처럼 불편하고 오묘한 감각이 계속됐다. 

왠지 아랫배 깊숙한 곳이 찌르르 아프도록 저려 왔다. 

아니, 아픈 건가? 간지러운 건 아니고? 

제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인데, 꼭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멀어졌다가 일순 선명해지는 감각에 이예주는 간지럼인지, 통증인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으, 하, 하지…….”

심장께가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져 오는 기묘함에서 벗어나고자 이예주가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이가 이예주의 말캉말캉한 살덩이에 콰득 박혔다. 

악! 이예주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흐익, 숨을 멈췄다. 

아파! 그만해, 그만하라고!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통증에 고개를 내저으며 몸부림치자, 깨무는 힘이 약해졌다.

통증이 가시고 이내 또 다시 간지러운 감각이 몰려왔다.

오감 전체가 불분명하고 어질어질했다.

그녀가 잔뜩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볼 때쯤이었다.

“예주야.”

눈물이 날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허공으로 향했던 이예주의 풀린 눈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스르륵 움직였다.

“……람?”

까만 머리가 보였다. 하얀 얼굴에 대비될 만큼 검붉게 타오르는 두 눈,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로 바알간 혀끝이 아롱거렸다. 

그의 눈이 이렇게 검붉었던가? 붉긴 붉었는데, 왜 이렇게 다른 때에 비해 탁하고…… 음습하지? 

멍하니 달라진 람의 눈동자 색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문득 가슴결이 서늘하게 시려왔다.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 본 이예주는 소스라쳤다. 

“아악! 지, 지금 뭐하는……!”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모기집이라도 투척 받은 것처럼 가슴에 온통 붉고 푸른 자국이 가득했다. 

제가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그 자국들이 모두 모기에 물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환장할 상황에 경악하고 있는 이예주가 가소롭다는 듯 람이 피식 웃었다. 

붉은 입 꼬리가 위로 슬쩍 들어 올라갔다. 

그는 뱀처럼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검붉은 눈을 하고 말했다.

“보낼 생각 없었는데. 어쩌면, 너도 가서 직접 보고 겪는 것이 낫겠지.” 

“흐으! 뭐, 뭘요?”

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전기라도 통한 사람처럼 찌르르하고 소름이 끼쳤다.

온 몸의 잔털이란 잔털이 홀딱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만나려는 놈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악한 것들인지.”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것들이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너는 결국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놈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겠지. 과거는커녕 과거로 가는 법의 근처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야.”

그거 물 흐르듯 유려하게 말하며 이예주 반쯤 일어서 있던 이예주의 몸을 조심스레 눕혔다. 

바닥에 뭘 깔아 놓았는지 차가운 바닥대신 까슬한 천의 촉감이 맨 등에 느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예주는 그저 그가 밀면 미는 대로 발라당 넘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냐.’ 싶다가도 제 위로 올라와 안아 주는 람의 따뜻한 몸이 너무 좋았다. 

그의 손이 이예주의 목덜미를 질척하게 쓰다듬었다.

“그게 무슨 소리…… 으악!”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적에 그가 불쑥 고개를 내려 속삭였다.

“왜냐면 놈들은 나만큼이나 인내심이 꽤 강하거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네가 결국 좌절하고 절망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네 힘을 빼앗기 위해…….”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그의 손이 비단결처럼 슬금슬금 움직였다.

“너의 어여쁜 팔, 다리, 머리, 온 사지를 하나하나 게걸스럽게 뜯어서 산 채로 으득으득 씹어 먹을 것이다. 그놈들은 그렇게나 위험한 것들이지. 그러니.”

“흐악!”

“그러니 나를 선택해.”

“자, 잠깐! 잠깐만!”

람이 고개를 들고 음험하게 웃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그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이예주는 일순 눈앞이 혼미해졌다.

“개화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개, 개화기요?”

“잊지 마. 사흘, 그 때까지 내게로 돌아와.”

붉은 입술에 대조되는 하얀 송곳니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왠지 모르게 보면 안 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만약 그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으아악!”

이예주는 아래로 떨어지는 아찔한 느낌에 팔다리를 미친 듯이 휘저으며 번쩍 눈을 떴다. 

떨어지고 있어! 떨어지고 있어! 

그녀의 몸은 정말로 테이블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상체부터 바닥으로.

“아, 으헉!”

간신히 균형을 잡아 몸을 바로 한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람의 밑에 깔려 더운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자신은 비행선 객실 안, 탁자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서 객실 안이 껌껌했다. 

분명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밖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가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턱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든 것이다.

“이게 무슨…….”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손을 들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꿈. 꿈이었던가. 그에게 연인처럼 다정하게……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이 퍼부어진 것은.

“……욕구 불만인가.”

두 손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로 이예주가 중얼거렸다. 

진짜 람을 좋아하다 못해 몸이 달아오른 건가. 

흐으, 정말 욕구 불만이야, 뭐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딴 꿈을 꾸다니. 

손바닥에 닿은 얼굴 피부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하도 정신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아침 산장에서 깨어났을 때도 이런 꿈을 꿨다는 것을.

아침의 꿈에선 람이 뭐라고 지껄였던가. 오지 않으면 뭘 다 때려 부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번 꿈에선 또 뭐라 했더라. 

자기를 선택해? 

사흘 동안 기다리고 있겠다고?

“미친, 미친!”

꿈속에서 제게 했던 람의 말이 바로 앞에서 들려오듯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예주는 뜨거워지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부여잡고 절규했다. 

무슨 사춘기 남학생도 아니고 모, 몽정을! 몽정을 다 해! 

“안 되겠어. 냉수마찰이라도 해야겠어.”

이런 건 옳지 않아. 매우 불건전해. 이예주는 한순간에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앉아 있던 탁자에서 허겁지겁 내려왔다. 

그리고 출입구 옆에 위치한 화장실로 우당탕탕 달려갔다. 

미닫이문을 벌컥 여니 들어올 때 확인했던 깔끔한 현대식 욕실이 그녀를 반겼다. 

이렇게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때는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 뜨끈하게 몸을 지져야 하는데. 

아쉽게도 화장실에는 변기, 세면대, 그리고 한 계단 위의 샤워 박스가 전부였다. 

그녀는 문 근처에 서서 꾸물꾸물 옷을 벗었다. 

털푸덕, 람이 사 준 두꺼운 장포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 앞에 떨어졌다. 

마담 페니의 수제화를 벗고 맨발로 화장실 안에 들어서니, 타일의 시린 감촉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내의를 마저 벗던 이예주는 불현듯 갈아입을 속옷이나 세면도구가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되는데. 옷은 몰라도 샴푸랑 비누는 있어야지!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면대 위쪽 선반을 열어 보았다. 

제 상체만큼 커다란 거울 두 개가 문 양쪽에 달린 형식이었다. 

다행히도 세면도구는 물론이고 갈아입을 속옷 세트와 수건, 샤워 가운까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다리족 놈들, 영 속모를 괴이쩍은 놈들이지만 그래도 이런 센스는 있군그래! 

이예주는 한쪽 어깨에 걸쳐 놓았던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바닥의 타일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했고, 어차피 샤워 박스 안에도 물이 빠지는 수챗구멍이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옷을 둬도 젖을 걱정은 없었다. 

흡족하게 새 칫솔과 치약이 담긴 플라스틱 컵을 꺼내 든 그녀는 선반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자 거울이 그녀의 벗은 상체를 비췄다. 

이예주는 속옷만 걸친 제 몸뚱어리를 보고 기염을 토했다.

“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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