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03)화 (205/319)

“하나뿐인 후계자의 잔인한 죽음을 목격한 선대 족장은 더 이상의 인명 피해가 나오지 않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특단의 조치요……?”

“도망을 가면 다시 잡기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붉은 개들의 허리 부근을 뚫어 척추에 사슬을 고정시켜 두었습니다.”

“흐으!”

이미 앞서 람에게 들었던 이야기지만 그것을 행한 당사자와 가까운 인물에게서 그 참혹한 이야기를 듣자니 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예주가 몸서리치자 여준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 반인륜적인 조치였지만, 제가 그 당시 족장이었어도 붉은 개들을 잡아 두기에 그보다 확실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 번 척추가 상한 붉은 개는 예전만큼 잘 달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슬을 끊으려다 척추가 끊어지면 안 되니, 함부로 도망칠 수도 없을 것 아닙니까? 하핫.”

놈은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인 양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아랑곳 않고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조부께서 너무 과하게 포획하고 죽인 나머지, 안타깝게도 붉은 개들은 씨가 말랐지요. 게다가 붉은 개들은 결국 신인류가 아닌 걸로 밝혀져 당시 관계자들이 엄청나게 허탈해했다고 합니다. 신인류도 아닌데 괜히 멸종시킨 것이 돼 버렸잖습니까.”

“…….”

“……그래도 조부께서 이 우두머리 하나만큼은 절대로 몸에 상처를 내지 말라고 명하셨다고 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듬직한 수문장이 되어 침입자로부터 B구역을 지키고 있지요.”

그렇게 말하는 여준은 이예주의 기준으론 정상인이 아니었다. 

유리 케이지 안에 박제된 붉은 개를 바라보며 그녀는 한없이 착잡해졌다. 

이 우두머리는 인간을 지능적으로 유인해 물어 죽일 만큼 증오했는데, 죽어서도 그 증오하는 인간들이 거주하는 곳을 지키는 꼴이 돼 버렸다. 

반려견도 한이 맺힌 채 죽으면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눈도 감지 못한 채 박제된 이 붉은 개는 어떨까. 

좋은 곳으로 갔을까. 이 비행선 근처를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이예주는 정말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원인은 인간이 제공하긴 했는데, 아들의 끔찍한 죽음으로 분노한 선대 족장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해서 선대 다리족 족장이 붉은 개 포획을 과연 멈췄을까? 

“그럼 붉은 개는 완전히…… 멸종되어 버린 거예요?”

“완전히.”

여준이 단언했다. 

이예주의 머릿속에 해안 마을을 당당히 걸어 다니는 붉은 머리 계집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모를 것이다.

“유전자 배열로 복원하려면 못할 거야 없겠지만요. 이미 수십 년 전에 완전히 멸종된 개체입니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말투였다. 

―릴리는 이제 뛰지 못한다. 척추를 뚫리면서 폐가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폐활량이 늘어나면 큰일이지. 호흡을 하다가도 언제 폐가 터져 버릴지 몰라 항상 두려움에 질려 있으니, 가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곤 한다.

모두 죽고 유일하게 홀로 살아남은 붉은 개에 대한 람의 설명이 생각나 이예주는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여기서부터는 유나 일병이 객실까지 안내해 드릴 겁니다, 구원자님. 유나 일병의 객실을 구원자님 바로 옆방으로 배치하였으니 객실에만 있기 답답하시다면 그녀를 통해 B구역 구경을 하셔도 좋습니다.”

여준이 유리 케이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주춤주춤 엘리베이터로 몰았다. 

띵, 1층에 있었는지 버튼이 눌린 직후, 금방 문이 열렸다.

“다만 이삼 층에 위치한 실험실은 인체에 해로운 물질들이 있을 수 있으니, 따로 준비가 되기 전에는 가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나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탄 이예주에게 여준이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진이 빠질 때로 빠진 탓에 어디 가자고 해도 더 이상은 못 간다. 

여준은 고분고분한 구원자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부담스러울 만큼 그녀와 눈을 마주한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럼 쉬십시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예주는 비로소 끊임없이 말을 쏟아 내던 다리족 족장의 주둥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

시야에서 여준이 차단되니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풀리면서 흐물흐물해졌다. 

그녀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며 흘끗 유나를 바라봤다.

“열일곱 살이라고 했나?”

여준에게서 이예주의 신병을 건네받은 어린 여군은 그녀를 등진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표정 없고 무뚝뚝했지만 그나마 같은 여자란 사실이 퍽 위안이 되었다. 

열일곱에 엄마를 잃고 저도 참 힘들었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고, 하나 남은 눈이 측은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예주는 여준을 대할 때에 비해 훨씬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냥 유나……라고 불러도 되지?”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예주의 눈엔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상명하복이 명확한 군대에 속한 유나는 영 불편한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나 때문에 객실까지 옮기게 된 것 같은데 미안해.”

“…….”

“객실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 거니까. 어, 너무 여준 씨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시끄러워.”

“……응?”

처음으로 유나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게 너무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이예주는 제가 헛소리를 들은 줄 알고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했니?”

유나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한쪽은 검은 안대로 가려져 있어 오른쪽만 남은 푸른색의 눈동자. 

몇 번 마주쳤던, 아무런 감정을 띠지 않는 그 무감각한 눈동자가 그대로인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말간 눈동자와는 딴판이었다. 

“족장이 구원자, 구원자 떠받들어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어, 어?”

“네가 구원자도 뭣도 아니란 거 잘 알아. 그러니까 모두가 널 구원자라고 여길 거라는 착각은 집어치워. 아니면 진짜 네까짓 게 구원자라도 된 것 같아?”

“…….”

이예주는 입을 벌린 채 유나의 얼굴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을 벌리자 어버버 거리는 소리만 튀어나왔다. 

독설을 내미는 얼굴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제가 들은 게 과연 저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온 것이 맞을까,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당황스럽고 기가 막혀 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던 이예주에게 여자애는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리고 휙 몸을 돌렸다. 

“역겨워.”

와. 멀쩡했던 혈압이 수직 상승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지금 입을 열어 봤자 괴성 섞인 욕설만 튀어나올 것 같기 때문에 이예주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 앞의 버릇없는 여자애가 제게 했던 폭언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떠받들어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냐고? 모두가 널 구원자라 여길 거란 착각은 집어치우라고?

자신이 구원자도 뭣도 아니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았다. 

이예주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든 허약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을 멋대로 구원자라고 칭하면서 납치하듯 데리고 온 건 너희들이잖아! 

내가 언제 내 입으로 구원자라고 한 적 있어? 근데 네놈들 때문에……! 

“그런데 말을 왜 그렇게…….”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것이 말을 왜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니?’ 하고 물으려던 이예주의 말은 ‘띵!’ 울려 퍼지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흐지부지 공중분해 되었다. 

으으, 이 분을 당장 풀어야 하는데! 

그러나 어떻게 하면 어린애를 화내지 않고 찍어 누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구원자님이 묵으실 객실은 508호입니다. 따라오십시오.”

그사이 유나는 채 잡을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으로 먼저 빠져나가 버렸다. 

“저, 저……!”

이예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한순간에 변모한 어린 계집의 영악함에 뒷목을 부여잡으며 서둘러 따라 내렸다. 

“저기! 저기…… 야!”

이예주가 한 소리 할 것을 눈치챈 건지 유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경이로운 속도로 휙휙 복도를 걸어 나갔다. 

B구역은 복도도 넓고 객실 간격도 넓었다. 

유나를 부르며 허겁지겁 따라가던 이예주는 복도 중간에 이르렀을 때에야 간신히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야, 너 나랑 잠깐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

“복도 끝은 휴게실입니다. 저는 옆 507호에 있을 테니 필요한 사항이 있으실 때만 부르십시오.”

이예주는 자신이 구원자가 아님을 역설하기 위해 유나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간단하게 그 손을 털어 버리고는 주머니에서 네모난 카드를 꺼내 객실 문 옆 리더기에 긁었다. 

미닫이문이 빠르게 열리자 유나는 들고 있던 카드키를 떠넘기듯 쥐여 주곤 재빠르게 제 객실로 이동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야, 야, 야!”

어찌나 빠른지 잡을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이예주가 뒤늦게 호통치듯 부르며 뒤따랐지만,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나 필요한 것 있다, 이것아!’ 하고 외치려던 이예주는, 곧 아무도 없는 복도 안에서 시끄럽게 구는 것은 자신뿐이란 사실을 깨닫고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못된 계집애.”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망할 인간들만 있을까. 

*       *       *

객실은 널찍했다. 

침대와 탁자까지 놓여 있는데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넓었지만, B구역 특유의 어두운 계열의 색 때문에 오히려 답답하고 좁아 보였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탁자 옆에 있는 동그란 창과 침대가 싱글이 아니라 트윈 사이즈라는 것뿐이었다. 

터덜터덜 내부로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안에서 문을 열 때도 카드를 긁어야 하는지 문 옆에 바깥쪽과 같은 모양의 리더기가 달려 있었다. 

문에서 오른쪽에 화장실이 있었다. 슬쩍 미닫이문을 열어 안을 보니 청소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타일이 청결하고 깔끔했다. 

욕조는 없었지만, 현대에서 쓰던 것과 일치하는 모양새만으로도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침대 옆의 작은 협탁 위에 대충 카드키를 던져 놓은 그녀는 바로 널따란 침대 위로 몸을 던질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탁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창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의자를 옮겨야 하나. 그러나 곧 그마저도 귀찮아져서, 그냥 탁자 위에 신발 신은 발을 떡 올렸다. 

굼실굼실 탁자 위에 올라 철퍼덕 주저앉으니, 창문턱이 가슴에 알맞게 닿았다. 

이예주는 맥없이 창턱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땐 정오쯤이었는데 어느덧 창밖의 하늘은 붉은 노을이 점령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산 정상의 거대한 비행선, 그 안에서도 최고층에 올라서 그런지 아래가 까마득했다. 

노을이 내려앉은 산등성이를 영혼 없이 바라보던 이예주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람이 찾을 수 있을까…….”

이 거대한 비행선의 수많은 객실 중 하나에 들어온 자신을, 람이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검은 파편에게서 숨겨 준다는 RTBD라는 약물 주사까지 맞았다. 

차라리 내가 먼저 여기서 나갈까. 하지만 객실 밖은 온통 CCTV투성이였다. 

그렇기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유나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것일 테고……. 

이 창문으로라도 뛰어내려야 하나.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남자를 찾아 산을 헤치며 내려가야 하나. 

그러나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 작은 창에 제 몸을 욱여넣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이 있는 객실은 5층 높이였다. 

창문을 통해 객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추락사할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상상하던 그녀는 냉정하게 현실을 일깨우던 여준의 말을 떠올렸다.

―검은 파편은 다리족의 거주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구원자님이 비행선으로 오신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공습경보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뭘 뜻하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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