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00)화 (202/319)

복잡해진 그녀의 얼굴이 뜻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여준이 냉큼 이어 말했다.

“근친혼은 허용되었지만 암묵적으로 매우 가까운 촌수와는 연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도 심각한 유전병은 없었습니다. 색맹이나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행선이란 제한된 공간 특성상 생명에 위협이 될 만큼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할 일이 별로 없어 문제가 없었고요.”

“…….”

“산 정상에 터를 잡은 후에는 다른 시간족이나 일반인과 교류를 하면서 혼혈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렇기에 두 글자로 이름을 짓는 방법은 변함없이 이어져 왔지만, 성(姓)의 구분이 무의미해졌고 결국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복원된 데이터를 보면 까마득한 옛날의 선조들은 무려 300개에 달하는 종류의 성씨로 엄격히 나뉘어졌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까지는 데이터화되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의 저희들로선 세 글자의 이름이 어떤 건지 잘 상상 가지 않습니다.”

여준이 말을 마치고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예주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연달아 당황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성씨로 사람을 구분했다. 

21세기에 들어섰어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왕족이나 유서 깊은 양반 가문 출생이라고 뽐내기도 했으며, 때론 상대방을 족보 없는 놈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했다. 

이들은 고국의 사람들 같다가도,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사이 여준이 씩 웃으며 이예주의 이름을 찬탄했다.

“그러고 보니 구원자님은 요즘 세상에 이례적으로 성을 가지고 계시군요. 이 씨는 우리 선조의 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은 성씨로 알고 있습니다. 구원자님의 선조들은 성씨를 물려준 좋은 사람들이군요. 이름도 성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구원자님.”

“아…… 예, 예.”

“혹시 알고 있는 성씨가 있다면 구원자님께서 나중에 유나 일병에게 성을 붙여 주시겠습니까?”

“네? 제가 서, 성을요?”

생각지 못한 제안에 이예주는 깜짝 놀라 여준과 유나를 번갈아 보았다. 

제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유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 저나 철수 상병이야 태어나서 계속 이 이름으로 불려 익숙하지만, 유나 일병은 한글 이름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성을 부여받아 새로이 불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한글 이름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원래 이름은 한글이 아니었어요?”

이예주가 아리송하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유나를 바라보았다. 

제 이야기가 한창임에도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유나를 대신해서 여준이 그녀의 과거를 설명해 주었다.

“사실 유나 일병은 다리족이 아닙니다. 얼마 전 눈족에서 버려져 다른 눈족들에게 잡아먹힐 뻔한 눈족 소녀와 그 동생을 작전을 수행하던 장병 한 명이 구출해 왔지요.”

“버, 버려져? 그리고 잡아먹힐 뻔했다고요?!”

깜짝 놀란 이예주에게 그는 몹시도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 일병은 짧은 범위이지만 근시일 내의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고 일족에게서 쫓겨난 후 하나뿐인 동생과 구걸을 해 가며 살았지만, 운 나쁘게도 질 나쁜 눈족에게 걸려 버렸지요. 유나 일병은 동생 대신 어쩔 수 없이 미래를 본다는 것을 밝히고 눈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아…….”

“그렇지만 비록 그 사고로 한쪽 눈을 잃게 되었어도 유나 일병은 다리족에겐 소중한 인재입니다. 다행히 그녀 또한 귀화를 원했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 유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왜요? 왜, 왜 버리는 건데요? 무슨 죄라도 지어서 쫓겨난 거예요?”

“눈족이 왜 자신들의 일족을 내쫓는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도 유나 일병같이 어린아이들을 말입니다. 게다가 유나 일병은 1000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다던 미래를 보는 눈족인데…….”

의미 모를 얼굴로 유나를 바라보며 여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예주는 새롭게 다가온 충격에 잠겼다. 유나를 가만히 바라보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같은 일족, 그것도 저렇게 어린아이들을 버리기까지 해. 

하긴 식인까지 덥석덥석 하는 마당에 쓸모없는 아이들을 버리는 것쯤이야 뭐 대수일까. 

잡아먹지 않고 온전히 버려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렇게 담담하고 무감각한 표정인 것인가? 

일족에게 내쫓겨진 것도 모자라 눈까지 잃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고작 17살인데.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한창 공부하고 놀러 다닐 나이인데. 

이예주는 지금까지 겪어 왔던 제 주변의 모든 죽음을 단 하나도 잊지 못한 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살아왔다. 

그 정도로 죽음의 냄새는 역겹고 끈적하게 몸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물며 본인이 직접 겪은 죽음이다. 

산 채로 눈알이 뽑히던 그 당시엔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럽고, 또 제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무 표정 없는 유나를 대신하듯 이예주의 표정이 수십 개의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이렇게 구원자님을 보필하게 된 기념으로 성을 지어 주시면 유나 일병 또한 영광일 것입니다. 안 그런가?”

“예. 영광입니다.”

마치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만 같은 영혼 없는 대답이었다. 

흐뭇한 여준과 대비되는 유나의 표정 없는 얼굴에 이예주는 머쓱해졌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깟 성 따위 얼마든 지어 줄 수 있겠지만, 유나는 성을 받는 것을 전혀 기대하거나 원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예주는 상관의 말에 거부할 수 없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 적당히 회피했다.

“그런데 어, 성을 알고 있긴 하지만…… 이름이랑 어울리는 게 있는지 여러 성이랑 대조도 해 봐야 하고, 또 성씨란 게 원래는…….” 

“하핫, 객실로 돌아가셔서 천천히 고민하십시오. 시간은 많지 말입니다.”

이예주는 거절을 거절하는 여준의 철저한 철벽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제가 점쟁이나 작명가도 아닌데, 왜 본인이 원치 않는 성씨를 지어 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서부터 B구역까지는 유나 일병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B구역으로 향하는 중앙 통로는 저쪽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가시면 바로 이어집니다.”

“아, 네…….”

여준이 본부 안 우측 하단을 가리켰다. 본부 안에 미리 발견하지 못한 엘리베이터가 또 있었다. 

어차피 유나가 가는 길을 따라가면 될 테니 이예주는 그의 설명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무성의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여준은 상담원처럼 친절한 얼굴로 거듭 강조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필요하신 물품이나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부담 갖지 마시고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객실 안에 웬만한 건 다 구비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었다. 

쿠루루룽―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굉음과 함께 불현듯 선체가 크게 진동했다.

“어, 어!”

곤돌라 내부의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진동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이예주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으려고 주변에 붙잡을 만한 것을 서둘러 찾았다. 

그러나 그 시도가 무색하게 격렬한 진동은 금방 잠잠해졌다. 

그때 ‘위이이잉, 위이이잉―’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본부 안을 메웠다. 

내부를 밝히던 형광등이 꺼지고, 벽과 기둥에 달려 있는지도 몰랐던 빨간 조명등이 깜빡깜빡하기 시작했다. 

―비상사태. B사이트 패시지 손상 감지. B사이트 패시지 손상 감지. B사이트 패시지 손상 감지.

시끄러운 경고음 사이로 SF 영화에서 듣던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뭐가 손상됐다고? 이예주는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족장님!”

그때 아래층에서 한 군인이 허겁지겁 뛰어 올라왔다.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었다.

순식간에 계단 맨 위까지 올라온 남자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여준에게 바짝 붙어 무언가를 다급히 보고했다.

“B구역…… 폭주…… 통로가…….”

뭐라고 보고하는 건지 듣고 싶었지만, 너무 작은 소리로 속삭여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 없이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서 있던 여준은 보고가 끝나자마자 딱 한 마디만을 물었다.

“RTBD는 투여했나.”

남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하고 답했다.

‘RTBD 투여?’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다는 것이 티 나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던 이예주는 그 순간 누군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유나였다. 

꽤 오래전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무표정한 그 여자아이는 눈이 마주쳤음에도 아무런 동요 하나 없었다. 

왜 저렇게 날 바라보고 있지. 

지레 찔끔한 이예주는 유나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선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구원자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B구역에 잠시 일이 생겨서 그만.”

“예? 아, 아니에요. 실례는요.”

그 짧은 사이 모든 대화가 끝난 건지 여준이 굳어진 낯으로 사과했다. 

고개까지 정중히 숙이는 바람에 이예주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무슨 일이 생겨 봤자 그네들만의 일인데. 

하지만 선을 긋는 그녀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듯 여준은 미안한 얼굴을 하고 연달아 고개를 조아렸다.

어느새 귀가 따갑도록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사라지고 환한 조명이 돌아왔다. 

손상 감지를 알리던 기계음도 꺼졌는지 장내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B구역의 이삼 층은 아까 말씀드렸던 최첨단 장비들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습니다. 작고 세밀한 충격에도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는 물질들과 장치들이 많아서 종종 이렇게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그렇지만 B구역은 특수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웬만한 폭발에도 끄떡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그, 그게 무슨……! 제가 묵을 객실이 B구역에 있다면서요!”

여준의 말에 이예주의 표정에서 없던 걱정이 샘솟았다. 

뻥뻥 터지는 폭발물들이 바로 아래층들에 있으면 나보고 자다가 뒈지란 소린가? 

그러자 여준이 급히 덧붙였다. 

“B구역 자체는 끄떡없지만, B구역과 이어진 통로는 일반 비행체의 소재로 쓰이는 두랄루민(Duralumin)으로 이뤄져 있어서 강한 물리력에 약한 편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위치 또한 B구역에 근접한 중앙 통로입니다. B구역은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설계된 것이기 때문에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1000년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걸요.” 

“그, 그래도…….”

“A구역까지 통틀어서 이 비행선 안의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B구역 최상층입니다.”

더 불안함을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어졌다. 

더 반론할 새도 없이 여준이 앞장섰다. 

“가시죠. 아무래도 B구역 입구까지는 제가 직접 모셔다 드려야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       *       *

결국 이예주는 여준과 철수, 유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본부 안에서 2층으로 내려오자 중앙 통로가 엘리베이터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중앙 통로는 둥근 원통 형태로 폭이 넓고 길이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아 쾌적했던 A구역과는 달리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마자 서늘한 냉기가 얼굴을 스쳤다. 

“죄송합니다. 폭발로 인해 통로의 외벽이 손상되었습니다. 담당 소관의 말로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뿐, 통로 이용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곧 수리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구원자님.” 

갑작스러운 온도 차에 이예주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자 여준이 사과의 말과 함께 손상 범위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처럼 통로의 끝부분에 장정 넷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쪽에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B구역을 향해 여준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뒤로는 일정 거리를 두고 철수와 유나가 따라왔다. 

어디 도망갈 틈도 없건만 그녀는 본의 아니게 앞뒤로 도망 길을 사전에 차단당한 채 중앙 통로를 가로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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