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9)화 (201/319)

모처럼 여준의 입에서 나온 희소식에 이예주가 다급히 물었다. 

그는 특유의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2017년부터의 정보야 이 비행선이 바로 살아 있는 증거지요.”

“왜요?”

“이 비행선이 2017년도에 완성되어 약 500여 년간 하늘을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용암 대폭발 후 대륙력 512년에 연료가 다 떨어져 이 산에 불시착했지만 말입니다.”

“……예?”

이예주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그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괴상한 형상의 비행선이 2017년에 완성되어 500년을 하늘에서 떠다녔다고? 

500년이면…… 조선 왕조가 바로 500년이다. 

이예주의 입술 사이가 점점 커다랗게 벌어졌다.

“Ark는 영어로 방주를 뜻합니다. 용암 대폭발보다도 까마득한 오래전, 창세기에 한 인간이 신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대재앙 후에도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여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최초의 인류가 타락하자 신이 일으킨 대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아에게 방주 짓는 것을 계시한 신. 

그렇게 지어진 거대한 방주에는 모든 생물들이 암수 두 마리씩 올라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Ark라는 영단어가 그 방주를 뜻하는지 이예주는 전혀 몰랐다. 

알았다 치더라도 비행선과 방주를 연결할 창의력은 없었다.

“Ark는 바로 거기서 따왔다고 합니다. Ark-17에서 17는 2017년을 뜻하죠. 즉 이 비행선은 세기말 용암 대폭발이 일어났던 2017년도에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하늘로 띄운 방주입니다.”

이예주의 입이 속을 내보이며 떡 벌어졌다. 

“……이 모든 것들이 2017년에도 있던 것들이라고?”

곤돌라 안의 모든 장비들에 향해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먹먹히 젖어 들어갔다. 

이 모든 것들이 그때부터 쭉 이어져 온 것들이라면. 

내가 2017년에서 왔는데. 그런데 2017년에는 용암 대폭발이 일어나서 인류의 97퍼센트가 죽어 버렸다고 여준이 그랬는데. 

그러면, 그러면.

“정말 멸망한 거잖아…….”

자신이 알던 2017년이 멸망했다. 

돌아갈 수 있는 여지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짐작은 하고 있었다. 과거의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용암 폭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토록 통렬하게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사실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나 무감각했느냐면 얼른 돌아가서 고국인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해야지 따위의 헛소리를 할 만큼.

하지만 이예주가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죽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은 엄마를 되살리고 자신이 흡수한 그녀의 능력을 도로 돌려주는 것. 

거기서 더 허락된다면 수학여행에서 죽은 애들도, 봉구도 되살려서 꼬인 인생을 바로잡는 것. 

그게 바로 이예주가 지금까지 무던히도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목표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멸망한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어떤 일인 건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이예주의 능력에는 이동한 시간만큼 기억을 지워 주거나 추가해 주는 옵션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여기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엄마가 아직 살아 있을 때로 돌아가 엄마의 죽음을 피한다 하더라도 그 후엔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용암 대폭발로 인해 엄마와 같이 죽는 것이야 별 상관없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이를 악물고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차라리 한날한시에 같이 죽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니까. 

그러나 엄마는 이예주의 능력이 각성된 이후 오로지 그녀 하나만을 보고 살았다. 

혹시나 ‘문’을 잘못 넘어 위험에 처하진 않았을까, 어디 엉뚱한 곳에 떨어져 당황해 울고 있진 않을까 하며. 그녀에 한해서 엄마는 365일 대기조였다. 

공부 못해도 좋으니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 주어라.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탈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오래만 살아 달라고. 

그렇게 맹목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키웠던 엄마를 앞에 두고 과연 자신이 ‘우린 곧 다가올 2017년에 용암 폭발로 죽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하더라도, 오로지 자신 하나만을 희망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그녀 앞에서 과연 완벽하게 불안과 동요를 숨길 수 있을까?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멸망할 날까지 얼마 남았는지 재고 계산하지 않을 자신, 살아갈 미래를 꿈꾸는 엄마 앞에서 담담히 죽음을 기다릴 자신이 있을까? 

“아니…….”

이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라면 모를까, 산전수전 다 겪고 되살린 엄마가 얼마 안 가 다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다그칠 것이다. 

그날이 온다면 자신을 두고 지체 없이 바로 ‘문’을 넘으라고.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에 가까이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암경을 끝없이 건너고 건너 이제야 비로소 과거로 가는 ‘문’과 마주 선 것 같았다. 

그러나 과거로 가는 문 안쪽은 펄펄 끓는 용암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시간,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든 마찬가지였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구원자님? 피곤해 보이십니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 충혈된 눈. 

창백한 얼굴로 오도카니 서 있는 이예주에게 여준이 걱정 어린 소리를 했다.

“어디 아프신 것은 아닙니까?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먼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준과 만난 이래 최초로 그가 공감이 가는 말을 했다. 

지치고 피곤했다. 

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어마어마한 정보와 충격적인 사실로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A구역의 객실들은 크기가 작고 좁아 구원자님을 모실 만한 공간이 못 됩니다. 그래서 구원자님께서 지내실 동안 사용하실 객실은 B구역의 최상층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준의 말에 이예주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최상층이라면 좋은 것이겠지. 

“제가 직접 B구역의 객실까지 보필해 드리고 싶지만, 정말 죄송하게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오늘은 본부를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대신 객실까지 구원자님을 보필해 드리고 말동무도 해 드릴 장병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그냥 혼자 알아서…….”

“철수 상병, 유나 일병은 어디 있나?” 

이예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절했지만 철수는 그새를 참지 못했다. 

족장의 명령에 그는 신속한 움직임으로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 앞쪽에 앉아 있던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철수가 데리고 온 여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수의 서양인 중 한 명으로, 칼 같은 단발머리의 소녀였다. 

공교롭게도 입이 가벼운 일리야와 동일한 금발에 푸른 눈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녀의 왼쪽 눈은 검은색 가죽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가죽 끝이 해진 것으로 보아 눈병과 같이 단순한 이유로 눈을 가린 게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유나 일병은 다리족의 여군 중 최연소입니다. 구원자님과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유나 일병,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열일곱입니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여자아이가 여준의 질문에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예주는 내심 놀랐다. 

이렇게 어린 여자애가 군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17살이면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잖아. 눈은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건가? 

한참 예쁠 나이에 고생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니, 이예주는 처음 보는 여자애에게 조금 연민이 들었다. 

그러던 중 여준 놈이 또 제멋대로 결론을 지었다.

“구원자님의 또래가 맞는 것 같군요.”

“허, 저는 스물셋이에요.”

“예? ……성인, 이셨습니까?”

그래, 이 새끼야. 너보다 무려 천 몇 살은 더 먹은 누님이니 깍듯이 대우하라고. 

이예주는 혀끝에서 아롱이는 말들을 애써 씹어 삼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과거에서는 어려 보인다는 소리 따윈 들어 본 적 없는데, 이곳 사람들의 안목은 정말 요상하게 통용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또래의 다른 인원으로 교체해 드리겠…….”

“아,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안 그래도 돼요.”

이번엔 이예주가 더 빨랐다. 

두 손까지 내저으며 세차게 거절한 덕인지 철수를 부르기 위해 반쯤 돌아갔던 여준의 몸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예상치 못한 이예주의 나이에 조금 난처한 듯 웃다가 이내 별수 없이 유나로 확정했다.

“그럼 유나 일병이 구원자님을 객실까지 보필해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필요한 것은 모두 유나 일병에게 말씀하시면 바로 구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객실 안에는 저와 직통인 인터폰이 설치되어 있으니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주십시오.”

“네, 네.”

제게 베풀어지는 과분한 처사에 그녀는 되레 불편해지는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냥 A구역의 수많은 객실 중 한 칸이나 달라고 할까.

그때 망설이고 있는 그녀에게 한 인영이 불쑥 고개를 수그려 인사했다.

“일병 유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예주와 여준이 나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철수와 같이 묵묵히 서 있던 여자아이였다. 

여자애치곤 참 과묵하고 표정이 없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유나의 푸른 눈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불쑥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두 사람도 성이 없는 거예요?”

여준의 등 뒤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철수와 유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예주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보통 군대에서 관등성명을 댈 때면 계급하고 성을 다 말하지 않나?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질문인 듯 지금까지 일반인처럼 말하던 여준에게서 이례적으로 군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아니…… 여준 씨도 그렇고, 철수 씨도, 유나 일병도 모두 성은 안 알려 주는 것 같아서…….”

“그러시군요. 하지만 구원자님께 성을 알려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네? 그럼…….”

“구원자님과는 달리, 아쉽게도 저희 모두에겐 성이 없습니다.”

“왜, 왜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묻지 않아도 굳이 먼저 나서서 의욕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려 들던 여준이 어쩐지 그 이유에 대해서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2017년대에 Ark-17에 올라탄 선조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하늘에서 떠 있었습니다.”

2017년에서 온 자신과, 2017년부터 건재해 온 비행선. 

이예주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여준의 말을 들었다.

“살아남은 그들은 짝을 이뤄 후손을 낳았지만, 제한된 식량과 연료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게다가 한정된 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또 그 대의 한정된 사람들과 짝을 이뤘기 때문에 대를 거듭할수록 상대를 고를 수 있는 폭이 좁아졌지요. 대륙력 512년,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불시착할 때쯤엔 동복이 아닌 이상 근친혼도 가능했다고 합니다.”

“엑?! 근친이요?!”

이예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되물었다. 근친혼이 금지돼 있는 시대에서 살다 온 그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끈질기게 대를 이어 온 사람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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