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8)화 (200/319)

물론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라는 강렬한 유혹에 홀려 이 순간만큼은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이 미친 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완성된 자료와 장비들을 보여 드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자님께서도 저희를 어느 정도 신뢰해 주시고, 알고 계시는 정보들을 최대한 저희에게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

“대단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구원자님. 그저 검은 파편을 무찌르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적을 알아야 저희도 그에 맞춰 검은 파편을 타격할 전략을 짤 테니까요.”

미친. 그게 대단한 게 아니면 뭐가 대단한 건데……! 

누군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이예주는 서서히 과거로 돌아간다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아까 미리 머리 굴려 지레 짐작해 놓고도 속아 넘어갈 뻔했다. 

결국 여준이 요구하는 것은 한결같았다. 

첩자 질을 해라. 

“저, 저는…… 도와주고 싶어도 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검은 파편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아직도 그 사람이 인간 박멸 말고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만…….”

이예주는 기력을 잃고 다시 우물쭈물했다. 

검은 파편을 타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약점? 허점? 그딴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왜 아직도 그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거야. 

아직도 람을 이길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는 여준이 이제는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안다고 해도요. 왜 아까부터 자꾸 람을 죽이고 격파하려는 그런 계획만 말하는 거예요?”

“예? 그건…….”

“그 사람한테 대항하는 건 정말 미친 짓이에요. 그러니까 밖에! 저기 밖의 절벽에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거랑 같다고요! 당신들도 정상까지 오르긴 쉬워도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가긴 어려울 거 아니에요!”

말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이예주는 차광막이 쳐진 유리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제 네놈이 말하는 게 얼마나 심각하고 미친 소린지 이해 됐지? 언더스탠드?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저보다 키가 훌쩍 큰 여준을 올려다보았다. 

속에 있는 말들을 다 꺼내 놓으니 명치끝이 다 시원해졌다. 

“찬물 끼얹어서 죄송한데요. 당신들이 그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진짜 잘 몰라서 그래요. 마음만 먹으면 동쪽 대륙 하나를 부순다고 그랬다고요. 난 죽기 싫어!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이예주는 고개를 마구 뒤흔들었다. 

남자를 만난 이후 뛰고 뒹굴고 엎어지며 온몸을 아낌없이 굴렸던 지난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을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쩜 그렇게 무심하고 무책임한 놈이 다 있을까 싶다. 

그 정도로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친 남자였지만.

……그래도. 

그래도 항상 죽기 직전에는 구해 주었다. 

우니까 이상한 돌멩이 같은 것을 쥐여 주며 울지 말라고 다독여 주기도 했고, 상이랍시고 뽀뽀도 해 주었다. 

비록 자신을 미끼로 쓰는 미친 짓을 저질렀지만, 배가 고프다 하니 친히 낚시도 해 줬다. 

악몽에서 깼을 땐 이름을 불러 주며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안아 주며 다시 재워 주었다. 

그랬다. 언제나 정을 떼려다가도 뗄 수 없도록 이예주의 심장을 쥐고 뒤흔들었다. 

“그리고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무, 물론 인간 박멸이 목표라는 미친 소리를 하긴 했지만…… 또 지 맘대로 지진을 일으키고, 번개를 내리치고, 모래로 밧줄을 만들고, 물을 걷는 기행도 했지만…….” 

이렇게 말하다 보니 정말 세기의 또라이잖아. 

어째 말할수록 점점 옹호가 아닌 욕 같아서 이예주는 황급히 정리했다.

“그래도 약한 인간들까지 무분별하게 죽이고 다니진 않는 다구요.”

아, 맞아. 제가 말하고도 그 사실을 방금 막 깨달은 사람처럼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잖아. 

람이 정말로 인간 박멸을 원했다면 동쪽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신인류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인류에게 퍽 불리한 마을 분위기를 보고도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표정한 람의 얼굴을 떠올리자, 이예주의 입새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쯤 날 찾고 있을 텐데…….”

시뻘건 눈을 살기등등하게 번뜩이며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을 것이다. 

잡히면 죽일 거라고,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온 대륙을 때려 부술 거라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주야.’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던 모습도 덩달아 떠올랐다. 

결론은…… 너무 보고 싶어. 

여긴 너무 무섭고 이상하고, 람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요. 제 말은, 자꾸 대항하고 전쟁을 할 그런 생각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잘못을 빌어 보면 어떨까 하는 거죠. 약해 보여서 벌을 감면받을 생각을 좀 해 보면 어떨까 하고…….”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예주는 불현듯 경악에 휩싸인 시선들을 마주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보는 거지? 나름 저들이 원하는 구원자에 부합할 만한 방향을 제시해 준 것 같은데. 

그녀의 일장연설이 끝난 뒤 장내는 무섭도록 침묵에 잠겼다. 

이예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검은 파편은.”

그때,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여준이 묵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인류 최대의 적입니다.”

“…….”

“다른 대륙의 인간들은 우리 다리족의 비행선 Ark-17를 보고 대륙의 인간들 중 가장 발달된 문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여준은 어느덧 호의적인 가면을 집어치운 채 차갑고 이성적인 다리족 족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비행선에 남은 데이터를 복구해 과거 천여 년 전 인류 문명이 얼마나 창대한지 보았습니다. 사진이나 짤막한 영상으로만 보아도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은 과거의 터무니없이 작은 일부에 불과할 만큼 대단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요.”

그 1000년 전의 인간인 이예주도 지금의 생활이 얼마나 쇠퇴했는지 잘 알았다. 

그 찬란했던 현대의 모습을 그 또한 보았던 걸까. 

여준은 두 주먹을 꽈악 움켜쥐고 암담한 얼굴로 말했다.

“검은 파편으로 인해 죽어 간 인류는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수치라고 짐작만 할 뿐이지요. 1000년 전, 용암 대폭발에서 전 세계 인류의 97퍼센트가 사망했습니다. 지금의 인간은 간신히 살아남은 3퍼센트의 자손입니다. 검은 파편으로 인해 그 양조차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97퍼센트……?”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건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 세계 인구가 60억이었나, 70억이었나? 그중 97퍼센트면 대체 얼마나 죽었단 거지? 57억? 67억? 

뇌가 돌아가지 않았다. 암산에는 자신이 없어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그러나 어림짐작하기에도 엄청난 숫자라는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인간들은 계속 죽어 가고 있습니다. 검은 파편은 우리들을 없애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라면 인간은 곧 멸종입니다.”

멸종. 

동물한테서나 듣던 그 말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을 듣자니, 참 이상하게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미 말씀드렸듯, 산 중턱의 뤼미에르 들판 지역에 검은 파편의 기운과 파동은 없었습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검은 파편이 저희가 구원자님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잖습니까? 이전에 사막에서 있었던 구출 작전을 떠올려 보십시오. 저희가 구원자님을 구출하려 들었을 때 놈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예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람은 ‘문’을 통해 도망가려는 그녀에게 네 도망 길은 죽음뿐이라고, 좋은 말할 때 기어오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모래 밧줄로 사막 괴물을 번쩍 들어 올려 그녀를 납치하려 했던 군인들을 두더지 잡기하듯 쾅쾅 내리찍었지. 

“게다가 검은 파편은 다리족의 거주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구원자님이 비행선으로 오신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공습경보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뭘 뜻하는 것 같습니까?”

이예주는 무어라 대꾸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굳어 버린 낯빛이 서서히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여준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은 파편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너무 냉정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쓸모가 있을 땐 살려 두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이 놈의 특징이죠. 지금까지 다리족의 작전지 파악을 위해 그렇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은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

“저희가 추측하기로는 놈은 구원자님의 능력을 알아내지 못해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놈이 저희에게 구원자님이란 존재를 허락할 리 없겠죠.”

“그…… 그런…….”

“왜 이용 가치가 없어진 구원자님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인지가 조금 의문이긴 합니다.”

이예주는 람이 자신에 대해 그런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지만, 덧붙여진 말에 바르르 입술을 떨며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람과 저 사이를 생각하면 한없이 냉정한 말인데, 그런데 또 람이라면 가능할 법한 말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

여준이 불현듯 이예주의 한쪽 어깨를 와락 움켜쥐고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그는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주입하듯 한 자 한 자 씹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구원자님의 존재는 아주 중요합니다. 구원자님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 그게 무슨…….” 

“물론 구원자님께서 저희를 아직 믿지 못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일전에 구출 작전도 실패한 전적이 있기도 하고…… 신뢰를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구원자님께서 저희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여준의 목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렸다. 

그녀를 지배한 것은 잔혹한 사실이었다.

람에게 버려졌다. 

쿵…… 

멀리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에게 버려졌다면 이예주 또한 시간족 놈들과 마찬가지로 람에게 있어 박멸 대상이 된 것이다. 

빌어먹을, 대체 누가 누구의 안위를 걱정해!

구원자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괴상하게 찡그려진 것을 보고 여준은 속이 탔다. 

그들의 보여준 신의가 구원자의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준은 최대한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가 구원자님께 도움이 될 과거의 데이터들을 제공하는 대신, 구원자님께선 그동안 검은 파편과 함께 있으면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산장이 있는 산 중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가시 장벽은 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 외에 지금까지 검은 파편에게 끌려 다니시면서 보고 겪으신 일도요. 저희는 그에 맞춰 검은 파편에게 대항할 새로운 전략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 고초를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드시겠지만…… 정말 죄송하게도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하…….”

“우리는 구원자님이 가시 장벽 안쪽에 계신 것을 확인하고 수차례 가시 장벽을 뚫으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실패했습니다. 총, 칼, 톱, 도끼 등의 온갖 무기로 그 전대미문의 가시덤불을 뚫는 것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가시 하나조차 자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불명의 식물을 발견한 지 사흘째, 그 주변에서 한순간에 검은 파편의 기운이 모조리 사라지고 가시덤불 또한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구원자님께선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셨습니까?”

재촉하는 시선에 이예주는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저 뤼미에르의 뿌리일 뿐이었다. 

다만 전과는 달리 인간들의 손에 꺾이지 않도록 람이 새로이 개조해 준 것이다. 

뤼미에르의 가시 장벽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지 이예주의 끄덕임에 여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정보 교환을 하도록 하지요.”

마치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듯 여준이 이예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소리였다. 

아까 분명히 악수 신청을 거절했던 것 같은데. 

이예주는 놈과 손을 잡기 싫어 뺀질댔지만 이번엔 상대가 득달같이 손을 낚아채어 꽉 부여잡았다.

“그런데 데이터 복원은 아직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간신히 용암 대폭발 전 565년까지 복원을 했지만 그 이상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됩니다.”

강한 힘으로 이예주의 손을 압박한 채로 여준이 안내했다. 

묵묵히 그 소리를 듣던 그녀는 머릿속으로 가만히 숫자를 헤아렸다. 

용암 대폭발 전 565년까지? 

그것이 일어났던 시기가 2017년이니까, 2017년에 관한 정보 또한 존재한단 소리였다.

“2017년. 2017년에 관한 정보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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