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7)화 (199/319)

화면이 바뀌었다. 

창밖에서 찍은 듯 팔족 족장의 저택 복도를 일리야와 같이 거닐고 있는 이예주였다. 

잘도 이런 것을 찍었네. 절묘하게 순간순간 포착된 자신의 모습에 그녀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팔족 족장의 저택 안 CCTV는 보안이 철저해 해킹할 수 없었습니다.”

여준이 당당하게 덧붙였다.

“서쪽 대륙은 시간이 멈춰 있는 땅이기 때문에 창문의 커튼으로 낮밤을 구분합니다. 저택 외부의 CCTV는 저희가 감시하고 있으니 출입하는 사람들 또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 팔족 족장의 저택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자님은 이날 밤 동안 족장의 저택 안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여준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먼 거리에서 찍은 듯 자그마한 인영들이 보였다. 

람과 그의 품에 기절해 있는 피투성이 자신이었다. 

그 밑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왕 바퀴도. 

“실시간으로 서쪽 대륙을 감시했지만 구원자께서 어떤 방법으로 팔족 족장의 저택에서 빠져나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어…….”

“그 후 사막에서 구원자님의 구출 작전을 시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부에서 위성으로 사막의 상황을 계속 봐 왔지만 구원자님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눈앞에서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셨지요.”

“아…….”

“위성으로부터 데이터를 전달받는 시간이 약 8분 정도 걸리는 것을 감안해도 그렇게 중앙 대륙 전체에서 빠르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리족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제군도 수십 분 만에 중앙 대륙을 횡단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더더욱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예주는 뜨끔해서 여준이 내뱉는 말에 아무런 답도 못하고 그저 어물어물하기만 했다.

다시 화면이 사막으로 전환됐다. 

밝기를 억지로 올리고 있어 이예주의 후드 티 정중앙의 그리운 메이커 로고가 점차 선명히 보였다. 

너무 어둡고 화질이 낮은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저때의 자신은 모레 바닥을 구르고 처박힌 탓에 침을 질질 흘리며 시시각각 살려 달라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사진의 아래쪽을 보자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21:14:48. 사진이 찍힌 시간이었다. 

곧이어 화면이 바뀌었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21:15:07. 

약 20초 만에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꼴이 되었다. 

이예주의 능력을 비교하듯 두 개의 사진이 번갈아 가며 화면에 뜨다가 종국에는 둘 다 화면 안에 띄워졌다. 

그리고 그 위로 사진 하나가 더 덧대어졌다. 

시간상으론 이틀 후,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엎어져 있는 자신이었다. 

역시나 먼 상공에서 찍은 듯했다. 

“다시 발견한 구원자님은 사막에서와 같은 옷, 같은 차림새로 동쪽 대륙에 있는 상태였지요. 위성으로 근방을 훑었지만 이동 수단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아, 역시 어떤 경로로 구원자님께서 사막에서 동쪽 대륙까지 이동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니까 이걸 다 감시하고 있었단 말이지? 

꽤 집요하게 자신을 추적해 온 단체가 있다는 사실에 이예주는 소름이 끼쳤다. 

제가 뭐라고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자신의 행보를 일일이 확인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냥…… 그냥 살기 위해 ‘문’을 넘은 것뿐이었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무사 무탈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왜 나를…….

이렇게 되면 진짜로 내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이예주는 점점 원치 않게 돌아가는 사태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그 심각한 표정을 다른 방향으로 오해한 듯 여준이 진지한 얼굴로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였다.

“우리는 구원자님께서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또 구원자님을 추궁하여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반드시 알아낼 생각도 없습니다. 구원자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기에 감추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구원자님은 본연의 모습으로 계셔도 됩니다. 그 밑에서 검은 파편을 소멸하기 위한 준비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 미치겠네.”

이예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찌르르 아파 오는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아무리 멍청하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자신이래도 여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러니까 그의 말이란 이것이다. 

‘너나 네 능력에는 관심 없으니, 다만 예언의 상징대로 존재하라.’

이유는 뻔했다. 

구원자의 존재로 다리족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다른 인간들의 기대와 부응을 받아 람과의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서겠지. 

RTBD라는 약물을 전 대륙에 배포하여 전쟁 준비에 쓰일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높아진 신뢰를 바탕으로 다른 인간들을 손해 없이 이용해 먹을 수도 있다. 

이예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구원자란 존재를 이용해 먹으려면 이런 것까지 알려 줄 필요 없었다. 

그런데 철저한 보안 사항이라는 본부에 들여보내 주고, 또 여러 가지의 것들을 자신에게 일일이 설명했다. 

왜? 대체 자신의 뭘 믿고. 

내가 검은 파편에게 이런 것을 다 고자질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는 것인가?

“……일단요. 저는 구원자가 아니에요. 당신들이 생각한 것만큼 뭔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구원자님께선…….”

“아니! 말 좀 다 들어 주세요.”

또, 또! 두 손을 치켜들어 제 말을 끊으려 드는 여준을 막아 선 그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뭔가 취지는 알 것 같은데…… 아니 아니, 모르겠어요. 정말, 정말 모르겠어요. 이런 설명해 줘 봤자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

“왜 자꾸 저한테 이런 비밀 사항 같은 걸…… 설명하고 알려 주는 거예요?”

나한테 뭘 원하는데? 검은 파편의 소멸? 

만약 여준이 그런 것을 원하면 지랄 말라고 대꾸해 줄 테다. 

총알도, 바주카포도 통하지 않음을 사막에서 이미 다 같이 보았으면서.

그러나 여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거야…… 구원자님께서 저희들을 위해서 검은 파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까지 오신 것이 아닙니까?”

“……예? 뭐라고요?!”

“저희를 정신적으로 구원해 주기 위해 전 대륙을 돌아다니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서로 미흡하지만, 저희와 힘을 모아 의기투합해 검은 파편의 존재를 물리치려고 하시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고요.”

그건 또 무슨 신종 개소리야! 

그녀는 곧바로 난 네놈들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다가, 문득 관자놀이를 찌를 듯한 시선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질 만큼 수백 쌍의 눈들이 자신에게 못 박혀 있었다. 

어느덧 곤돌라 안은 위잉, 위잉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를 제외하곤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봤다. 

무한한 기대와 신의가 가득 찬 수백 개의 동공들이 저 하나에게.

그것들을 마주하는 순간 이예주는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그들이 찾는 구원자가 아님을 밝혔음에도. 어째서. 

어째서 이 사람들은 자신을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가. 

마치 그녀가 이 지옥 속에서 내려진 한 줄기 빛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눈으로……. 

사실 검은 파편을 죽이고 뭐고, 뭔 소린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도 잘 모르겠는데 누굴 죽이고 누굴 구원하는가.

혹시나 알게 되더라도 전혀 관계하고 싶지 않았다. 

1000년 후, 아무도 모르는 세상으로 넘어와 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다. 

좋아하는 이에게 반하는 행동을 하여 죽임당하는 것만큼 참담하고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예주는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힘겹게 대답했다. 

“저는 그냥……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서…….”

누군가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오로지 자신에게 못 박힌 수백 개의 눈동자가 헛구역질 날 만큼 부담스러웠다.

“과, 과거에 대해 알면 여러모로 좋을 테니까…… 그래서 이 산까지 오게 된 건데요…….”

“역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끝마쳤을 때 여준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구원자님의 선견지명은 팔족의 새로운 족장에게 이미 들었지만, 또 한 번 감탄하는 바입니다.”

“……뭐?!”

이예주는 너무 참신한 미친 소리에 제가 반말을 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번쩍 들어 여준을 쳐다보았다. 

다리족 족장은 조금 전보다 더욱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철수도, 정적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본부 내의 수백 명의 사람들도 여준과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눈앞의 상황에 아연해진 이예주는 속으로 절규했다. 

게다가 팔족의 새로운 족장은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녀의 의문점은 여준이 바로 해소해 주었다.

“일리야라는 여자가 최근 서쪽 대륙의 새로운 족장이 되었습니다. 구원자님께서 과거로 가는 법과 과거에 관한 정보를 찾으셨다고 하더군요. 팔족 족장의 저택에 있는 서재 열람을 강력하게 희망하셨다고요.”

일리야가 새로운 팔족 족장이 되었다고? 

그러면 그전의 팔족 족장과 남자들은? 

혹시 람이 다 죽여 버린 건가. 

다시 떠올리려니 벌써 한참 전의 일이라 기억이 세밀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여준은 턱에 손까지 얹은 채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습니다. 구원자님께선 과거로부터 검은 파편이란 존재가 생긴 원인과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계셨군요.”

“아, 아니…… 그, 그 아니에요!”

이예주는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듯 그녀의 부정은 가볍게 무시되었다. 

“다리족이 있는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오신 것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구원자님. 적어도 팔족보다 우리 다리족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희는 팔족 족장에게 많은 양의 에너지 바를 넘겨주는 대신 구원자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게 되었지요.”

일리야 그 아줌마가! 

이예주는 노란 머리에 거대한 유방을 출렁이던 팔족 여자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구원자님의 정보를 듣고 저희는 몇 개월간 나름대로 과거의 데이터들을 복원했습니다. 다행히도 Ark-17에는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 같은 최첨단 장비의 설계도 등,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멍하니 여준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이예주는 불현듯 귓가를 스쳐 지나간 단어 하나에 뒤늦게 반응했다.

“타, 타임머신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 기계는 현재 전문가들이 개발 도입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설계도가 있으니 자재들만 구하면 완성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과거에 관련된 데이터 복구 또한 어느 정도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죠.”

“대박.”

타임머신이라니. 타임머신이라니! 

이곳이 1000년 후 미래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이예주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만 가면 곧바로 집에 돌아가리라 굳게 믿었다. 

왜냐면 그만한 기간이면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했을 테고, 그러면 타임머신 같은 시공간 이동도 가능할 테니까.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엄마도 되살릴 수 있어! 

이예주는 그 믿음 하나로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얼마 안 가 강제로 상실됐다. 

2017년보다 인류 문명이 훨씬 퇴보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첨단 과학이 있을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드디어! 그 개고생을 하고 타임머신에 도달하다니……! 

그 꿈 같은 단어에 이예주는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전율했다. 

“저, 저! 저한테 보여 주세요! 타임머신, 저한테 보여 주세요!”

“물론입니다. 구원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우리 다리족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여준 씨!”

이예주는 감격이 물씬 차오른 눈으로 여준을 불렀다. 

이 사람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인데 괜한 의심만 하고 또 하다니. 

“……보여 드리기에 앞서,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걸림돌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게 뭔데요?”

과거로, 엄마를 되살릴 수 있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예주는 당장에 간이라도 빼 줄 수 있는 심정이었다. 

이곳으로 넘어와 처음으로 맛본 희망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