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6)화 (198/319)

이예주는 이 상황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대체 왜.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거지. 

걷잡을 수 없이 부푼 ‘구원자’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이 숨이 막히도록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각 잡힌 경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주체가 못 되는데, 왜 이렇게…….

그녀가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할 동안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흘끗 여준을 올려 보니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 경례를 하고 있었다.

“필승.”

그가 짤막하게 대꾸하며 들었던 손을 내렸다. 

“바로!”

경례를 주관하던 남자의 구령에 맞춰 사람들 또한 손을 내렸다. 

여준이 이어서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각자 위치로.”

“각자 위치로!”

명령을 전해 들은 군인들의 얼굴에서 일순 긴장이 풀렸다. 

그들은 허겁지겁 제자리로 돌아 앉아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윙윙 돌아가는 기계 소리와 펄럭거리는 종이 소리, 손가락 끝에서 부서지는 타자 소리가 정적을 깨부수고 다시 장내에 울려 퍼졌다. 

방금 전과 별다를 게 없는 장면이었지만 어쩐지 곤돌라 내부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그들과 가까이 위치한 자리한 사람들이 흘끔흘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곁눈질하는 것이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졌다. 

그냥 평범한 여자애인데 뭐가 그렇게 신기할까?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 든 이예주는 애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례를 주관하던 남자가 여준과 그녀에게 차례대로 깍듯한 목례를 하고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본부 안에는 432대의 컴퓨터와 5대의 슈퍼컴퓨터가 있습니다. 이를 이용해 전 대륙의 모든 정보들을 빠르게 수집하고 분류하여 검은 파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데 활용 중입니다.”

여준이 어느덧 다시 유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예주는 그의 간극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 예, 예. 뭔가 대단한 것 같네요.”

“어떠십니까?”

“뭐가요?”

“이 정도면 구원자님이 저희를 어느 정도 신뢰하실 만한 것들을 보여 드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다리족 내부에서도 낮은 계급의 병사들은 본부 안까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으로서는 구원자님께서 최초라고 볼 수 있겠군요.”

다리족 구성원들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여기가? 

문득 비행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1층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중노동을 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누가 그랬지. 층수는 그 사람의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엘리베이터 안의 층수는 4층까지 있었지만, 4층이야 곤돌라의 옥상일 것이다. 

이예주는 이 3층이 최상층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층 고위 법칙은 1000년 후에도 여전하구나. 

같은 일족도 들어오지 못한 곳에 들어왔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이 갑작스레 그녀를 타격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본부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곤돌라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검은색 머리카락에 남자였지만, 드문드문 단발머리의 여자들도 보였다.

또 비록 수가 손가락에 꼽을 만큼 희소하지만, 금발이나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순수한 한국인들만 모인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새삼 알게 된 사실들을 세밀하게 머릿속으로 욱여넣던 이예주는 이내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한숨과 같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신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준이 뭘 물어봤던가. 이 정도면 신뢰하실 만하지 않느냐고?

원룸에 처박혀 TV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본부 안은 브라운관 너머의 한 장면 같아서 별로 낯설거나 생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기물들이 많아 정겹게 느껴질 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불현듯 급격한 피로감이 이예주를 덮쳤다. 

“저기…… 이런 말 하면 좀 화내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예, 구원자님. 말씀하십시오.”

여준은 무한한 경의를 표하는 눈빛으로 이예주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속이 거북했다. 그의 호의적인 눈빛은 처음부터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 호의에 보답할 만한 게 그녀에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죄송한데 번지수를 잘못 찾으신 것 같아서…… 저는 그니까 그, 구원자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러니 그렇게 설명하고 신뢰를 보여 준다고 해 봤자예요. 구원자고 뭐고 전 그런 거 하나도 모르겠고……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이예주는 두 눈을 꾹 감고 속사포처럼 빠르게 내뱉었다. 

여준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서웠다.

“아무튼 죄송해요. 처음부터 속이려고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여준이 화를 낼 줄 알았다. 

어이없어하면서 왜 애초에 미리 말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든다거나. 

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예? 뭐, 뭐라고요?”

“구원자님은 구원자님이십니다. 이미 예언대로 모든 정황들이 구원자님을 가리키며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그것은 구원자님께서 부담감으로 인해 부정하신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구원자님은, 구원자님이 확실합니다.”

여준이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듯 구원자라는 꼬리표를 그녀에게 꽉 눌러 박았다. 

이예주는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는데.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정의해! 

“아니, 예언이고 뭐고요! 저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구원자가 아닌데 왜 자꾸……!”

“눈족에는 대현자가 있습니다. 바로 눈족 족장입니다. 눈족 안에서도 과거를 보는 자들과 미래를 보는 자들이 나뉜다는 것과, 미래를 보는 자들은 매우 드물게 태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사실입니다.”

아악! 말 끊지 마, 이 새끼야! 

이 새끼가 자신의 말을 끊어 먹고 제 말만 지껄이는 것은 다 계획적인 일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복장 터지게 만드는 것도 정말 박수 쳐 줄 만한 재주였다.

“하지만 현 눈족 족장은 이례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시간의 여신에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눈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그는 가끔 예언을 내리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 대현자로 불립니다.”

찌푸려진 이예주의 얼굴과는 상관없이 여준은 제 말만 계속해서 나불댔다. 

이예주는 거의 체념 반인 심정으로 놈의 설명을 들었다.

“눈족 족장의 예언은 빗겨 나갈 때가 많아 눈족이 아닌 다른 시간족들은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구원자에 관한 예언을 하고 한 달 만에 구원자님께서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속이 배배 꼬인 이예주는 예언을 믿는 듯한 여준을 비웃었다. 

설령 그 대현자인지 뭔지가 저에 대해 예언을 내렸더라도 이들에겐 좋을 게 없었다. 

제 능력으로 저는 살아남겠지만, 다른 이를 살리기란 불가능했다.

예언 같은 것은 하등 쓸모없다. 

엄마가 죽기 전엔 그녀도 엄마 따라 사주니 점이니 많이 보러 다녔지만 그것보단 차라리 예지몽을 꾸고 불안에 떠는 것이 더 적중…….

“대재앙의 마지막 순간 검은 파편의 곁에 있는 인간 여자, 검은 파편을 소멸하여 모든 인간들을 지옥 불에서 구원하고 신이라 불리리라.”

햇살을 타고 부유하는 먼지를 쫓으며 여준이 하는 말을 무성의하게 흘려듣던 와중이었다. 

불현듯 여준의 목소리가 변했다. 

낮고 음산한 예언의 내용에 이예주는 천천히 여준을 돌아보았다. 

―시, 신탁이 현실이 되었어! 아가씨, 이곳 사람 아니지? 그치?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그렇고…… 이곳 사람이 아니야. 어디서 온 거야. 응? 어디야. 어디서 온 거지?

―당신, 당신이 구원자죠? 미래를 보는 눈족이 예언했죠. 인간들을 구원하러 올 구원자가 과거에서 올 거라고. 우린 마냥 시간의 여신이라고 믿었는데. 당신이었어. 신인류를 몰고 검은 파편과 같이 다니는 당신. 당신이 구원자야.

―우리는 구원자님을 구출하러 온 구조대입니다.

이제껏 만나 왔던 시간족들은 하나같이 이예주에게 신탁과 예언을 운운하며 종래엔 알아서 결론 내리고 제멋대로 그녀를 구원자라 불렀다. 

이예주는 완벽한 무교였기 때문에 그 말들을 다 별것 아니라 치부했다. 

하지만 그간 우습게 여긴 것에 비해 예언의 내용은 제법 구체적이었다. 

인간 여자, 자신을 정확히 지칭하는 단어에 어쩐지 뒷골과 목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검은 파편을 소멸하여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고 신이라 불린다는 것.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인데.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팔족 땅에서 본 동화책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인간들을 구원해 주던 시간이란 여신으로 말미암아 힘을 잃고 잠에 빠진 검은 파편 이야기와 예언의 내용이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검은 파편을 소멸하여. 그 대목에서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검은 파편을 소멸. 

그러니까 구원자라는 건 검은 파편을 소멸시키는 존재라고? 

검은 파편을, 람을…….

“우리는 구원자님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습니다.”

깊은 상념을 깨우듯 나지막한 여준의 목소리에 이예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득했던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여준은 그들의 근처에 가까이 앉아 있던 군인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이 제 앞의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얼마 안 가 이예주는 투명했던 유리가 서서히 까맣게 물드는 놀라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장자리서부터 어두운 차양막이 물 흐르듯 흘러나와 마름모꼴로 곤돌라의 거대한 유리창들을 뒤덮었다. 

전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반면에 사방에서 스며들던 햇빛의 양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마침내 인공적인 빛이 본부실 안을 점령했다. 

그저 광원의 차이일 뿐인데, 햇빛이 사라지고 탁 트였던 시야에 암막이 처지자 한순간에 내부 분위기가 차갑고 묵직하게 뒤바뀌었다. 

또다. 갇혔다는 찜찜한 느낌을 이예주는 쉬이 털어 버리기 힘들었다. 

볕이 들던 유리창이 차광막으로 가려져 널찍한 벽으로 변한 자리 위로 화면이 팟 떠올랐다.

효율적인 공간 사용이었다. 두껍고 무거운 대형 모니터 대신 암막 친 벽에 빛을 쏴 화면이 뜨게끔 만들었다. 

조명이 어두워졌다. 

“처음 예언의 내용과 비슷한, 검은 파편의 곁에 있는 인간 여자를 발견한 것은 사막에서였습니다.” 

“저, 저거……!”

이예주의 일순 눈을 부릅뜨며 벽을 손가락질했다. 

화면 안에 있는 것은 상공 멀찍이에서 아래를 향해 찍은 것 같은 흐릿한 사진이었다. 

먼 곳에서 찍은 것은 것도 모자라 화질조차 구렸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사진이 뭘 찍은 건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진으로 보는 것뿐인데도 소름 끼치고 역겨운 거대 사막 괴물, 그리고 그 앞의 모래 더미 위를 뒹굴고 있는 것은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자신이었다.

“1000년 전 선조들이 띄운 인공위성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중앙 대륙 최대 포식자인 히카톤이 인간을 먹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정찰하다가 포착했습니다. 화질은 선명치 못하지만 분석 결과 인간,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여준이 손을 올리자 화질이 확대됐다. 전보단 선명해졌지만 여전히 얼굴이 제대로 보일 만큼은 아니었다. 

품 안의 아이와 이예주의 성별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는 휘날리는 머리카락밖에 없었다. 

“저희는 여자아이를 구하는 구원자님의 모습에 감명받았습니다. 저희도 가끔 버려지는 아이들을 구출하러 가고 있긴 하지만 구원자님처럼 여성의 몸으로, 그것도 아무런 무기 없이 맨몸으로 히카톤과 맞설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몸 아끼지 않는 구원자님을 보고 나서는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여준의 손짓 아래 화면의 다른 곳이 확대되었다. 

어딜 봐도 모래뿐인 사막, 괴물이 있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등선 너머에 이예주도 익히 아는 인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조롱이와 람이었다. 

“히카톤과 아이를 구하는 인간 여성에게만 시선이 쏠려 자칫 검은 파편을 발견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처음으로 예언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지요.”

여준이 손을 까딱이자 다음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화질이 조금 더 선명해진 짧은 동영상이었다. 

눈에 익은 회색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은 역시나 이예주였다. 그 옆의 조롱이는 덤이었다. 

CCTV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은 그 앞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다음으로 구원자님을 발견한 것은 서쪽 대륙에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자님께서 이상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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