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은 정보 기지국인 본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객실로 쓰고 있습니다. 긴급 상황일수록 몇 날 며칠을 본부실에 박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제군들에게 3층 객실은 거의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말입니다.”
1, 2층의 알듯 모를 듯했던 공간들과는 달리 3층은 평범했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반딱 반딱 광을 내며 일자로 이어져 있는 길 양옆으로 닫혀진 문들이 복사해 놓은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복도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준의 말마따나 객실로 쓰는 듯 문마다 호수가 쓰여 있었다.
그나마도 없었다면 어느 문이 어느 문인지 도저히 분간할 재간이 없었다.
가는 길 중간중간 모서리가 꺾여 옆으로 다른 길들이 나 있었다.
그냥 벽만 있는 막다른 길도 있었으나, 모서리에서 맞은편을 보면 또 다른 방향으로 꺾이는 길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3층은 1, 2층보다는 상식선의 공간이었지만 사방이 뻥 뚫려 있는 아래층들보단 확실히 답답했다.
한 다리 걸쳐 빽빽하게 자리한 문들만 보아도 객실 안의 크기가 얼마 정도 될지 대강 가늠이 됐다.
게다가 호수 구분이 있어도 문들의 모양이 하나같이 똑같고 벽이나 바닥의 무늬 또한 너무 단조로워서 자칫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다닐 여지가 충분한 곳이었다.
지금이라도 가는 길에 보이는 문의 호수들을 대강 외워야 하나? 그런데 이미 지나친 문들이 너무 많은데.
하지만 복도의 중앙쯤에 도달하자 그녀는 제 걱정이 지나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일자로 쭉 나 있는 길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복도는 이미 환한 상태였기 때문에 빛이 들어온다 말하기엔 딱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하얀 백열등이 깔려 있어 대낮처럼 훤한 내부에도 복도 끝을 바라보자니, 마치 동굴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이예주는 복도의 3분의 2 지점에 도달해서야 복도 끝에 위치한 유리문 너머에서 진짜 태양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문은 두 겹이었다. 불투명 유리여서 빛만 투과될 뿐, 그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지나왔던 수많은 객실들과는 확연히 달라, 여준이 말하던 그 본부임을 자연히 알게 됐다.
‘참 깊숙한 데 숨겨져 있네.’
본부라는 게 이렇게 객실보다 더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 꼭 검은 파편을 피해 꽁꽁 숨은 다리족의 천성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유리문 한가운데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이상한 문양의 천체를 본뜬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둥그런 구슬 같은 모양이었는데 천체 위에 끼얹듯 뒤덮인 다홍색이 인상 깊었다.
지구였다. 이곳저곳 그려져 있는 분화구나 문양 따위가 아니었다면 그냥 구슬 문양의 로고라고 치부하고 넘길 뻔했다.
행성 로고 밑에는 이예주가 잘 아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영단어, 그리고 그 옆의 한글.
“아크 17…….”
오랜만에 보는 한글이었다.
그러고 보니, 1000년 후로 넘어와서 지금껏 쓰고 말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막상 한글로 적힌 문서나 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차가운 유리문에 고딕체로 적혀 있는 ‘아크’를 획을 따라 매만졌다.
“구원자님은 따로 공용어들을 배우신 겁니까? 두 개의 공용어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쉽게 구사하고 알아보시는 것 같군요.”
“……예, 예? 공용어요?”
“네. 지금 말하고 계시는 제1공용어 말입니다.”
공용어라니? 이예주가 그나마 구사하고 쓸 수 있는 것은 영어나 한글뿐이었다.
여준의 뜬금없는 공용어 소리에 그녀는 눈을 크게 치뜨고 물었다.
“그게 뭔데요?”
“예? 공용어를 모르십니까?”
“그냥 한글과 영어잖아요? 그 정도는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읽을 수 있는…….”
과거와 비슷하다는 친근함 때문일까. 별생각 없이 말하던 이예주는 우뚝 입을 멈췄다.
맞다, 여긴 2017년도가 아니라 1000년 후였지.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춘 그녀의 간극을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여준은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갑작스레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역시! 구원자님은 역시 비범하십니다. 다른 배움 없이 공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다니!”
“예?!”
이예주는 반복되는 여준의 미친놈 같은 모습에 당황했다.
비범? 자유자재?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저도 배운 건데요? 그리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
“단순히 배워서 말을 하는 것과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미 여준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망했다.
“공용어들은 무려 1000년 전 선조들의 언어입니다. 세기말 용암 대폭발에서 살아남은 1선조들이 후대들에게 남긴 가르침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반복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언어지요.”
“유구한 역사…….”
그 유구한 역사가 1000년 전보다 약 600년 정도 더 앞선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면 기절하려나.
그 실없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어는 유구한 역사의 살아 있는 방증이죠. 지금 저와 구원자님께서 사용하는 제1공용어는 우리 다리족 선조들이 쓰던 한글이라는 언어입니다. 다행히 Ark-17에는 한글의 초성이나 단어, 문장 구사 방법이 체계적으로 데이터화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선조들이 용암 대폭발 이후 대혼란 시대에서 살아남은 또 다른 인간들에게 전파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글이 고, 공용어라고요?”
“네. 한글은 대륙력 1002년인 현재까지 대륙에 사는 모든 인간과 신인류의 90퍼센트 이상이 쓰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헐…….”
이예주는 탄성과도 같은 신음을 짤막하게 내질렀다.
머릿속에 단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안 그래도 지끈지끈 아픈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사실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바로 1000년 후로 넘어왔는데 모든 생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인간들은 그렇다 쳐도 조롱이나 대왕 바퀴벌레 같은 신인류들과도 말이 통한다니?
너무 판타지 같은 세상으로 넘어오게 되어서일까. 왜 다른 사람들과 아무 문제 없이 상호 대화가 가능한지에 대해 이예주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팔족 땅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유려하게 한국어를 했을 때는 조금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하지만 그때도 ‘외국 사람이 한국어를 참 잘하네, 껄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뿐, 어째서 그들과 대화가 가능한지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까짓 언어나 대화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천만한 일들이 원치 않아도 매 순간 턱밑까지 들이밀어졌기 때문이다.
“제2공용어는 영어입니다. 제2공용어는 보통 서쪽 대륙에 잔류한 팔족 인간들과, 눈족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보단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Ark-17 내의 암호화된 데이터들은 모두 한글보다 영문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리족은 어렸을 때부터 필수적으로 두 언어를 모두 습득하고 있습니다.”
“허, 제2공용어가 영어…….”
이예주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아 허탈하게 웃었다.
반면에 여준은 여전히 진지했다.
“구원자님께서 배움 하나 없이 공용어를 이미 파악하신 것을 보아하니 예언이 정말로 들어맞았다는 게 실감이 나는군요. 이렇게 위대한 구원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하여 다리족까지 와 주신 것이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여준은 이예주가 자신들을 검은 파편으로부터 걱정해 준다고 믿었을 때처럼 예의 감동을 잔뜩 집어 먹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수하기까지 한 선망 어린 그 동공에 이예주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잡아야 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정정할 거리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배움 없이 깨우친 비범한 구원자라는 것부터 정정하기로 결심했다.
“저, 저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배운 거예요. 한글이랑 영어 쓰는 법이랑…….”
“구원자님께서요? 누구한테 말입니까?”
여준이 약간 놀란 듯 되물었다.
“그, 그건…….”
그녀는 ‘학교에서 배웠지 뭘 어디서 배워.’ 하고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으레 할 대답을 내뱉으려다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말을 하는 사람과 계속 같이 있다 보니 자꾸 망각하게 된다.
여긴 당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뭐라 답해야 하지? 이예주는 짧은 사이 깊은 고뇌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학교라고 대답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해안 마을에서 만난 애들에게서 들은 말로는, 이곳의 교육과 현대의 교육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돈 있는 놈들은 자식 교육을 하기 위해 집으로 가정교사들을 부르는 게 고착화돼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바로 1000년 전 그 과거에서 왔소. 내가 바로 당신네들의 선조요!’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 선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좀체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녀는 여준과 좀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그건…… 그냥 엄마랑 선생님이랑…….”
“일단 자세한 것은 본부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구원자님.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지체한 것 같습니다. 철수 상병.”
다행히 놈은 그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녀는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말을 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태도를 금방 눈치챌 수 있을 텐데, 어쩐지 별로 그런 것에 연연치 않는 느낌이다.
‘이놈은 무슨 근거로 날 이렇게까지 믿는 걸까? 내가 람의 첩자면 어쩌려고?’
여준의 눈짓에 그들의 뒤에 한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철수 상병이 덩치와는 달리 재빠른 움직임으로 유리문의 좌측에 다가섰다.
이예주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을 그가 두어 번 두드리니 아무것도 없던 유리문에 화면이 나타났다.
무슨 첩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경악 어린 그녀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철수 상병은 화면에 뜬 영문과 숫자를 꾹꾹 눌렀다.
틱, 틱, 틱, 틱.
규칙적인 기계음이 끝나자 문이 열리는 대신 화면이 바뀌면서 초록색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익숙한 행동으로 화면에 눈과 팔을 가져다대고 광선에 스캔했다.
지문도 아니고 팔은 왜 가져다 대는 거지?
“마킹 자국을 스캔하는 것입니다. 매번 본부로 들어갈 때는 특수 광선을 비춰 마킹 주사기가 살갗을 파고 들어간 깊이와 그 주변에 묻은 혈흔, 미량의 RTBD 흔적들을 총체적으로 스캔합니다. 그 자국들이 일정 기준에 도달해야만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킹은 되도록 깊고,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여준이 독심술이라도 부린 듯 설명했다.
마침내 철수의 동공과 마킹 자국을 스캔하는 일이 끝났는지 유리문이 소리 소문 없이 열렸다.
안쪽에 굳게 닫혀 있는 불투명 문도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센서 달린 자동문인지 앞으로 다가가자 바로 열렸다.
마지막 관문이 활짝 열리는 그 순간, 이예주는 눈으로 확 쏟아져 오는 밝은 빛에 인상을 썼다.
곤돌라는 벽이라 할 것이 별로 없었다.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감싸여 있었다.
“아.”
그녀는 금방 알아보았다.
헬기에서 내리기 직전, 비행선 위에 떠 있을 때 본 것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본부는 대학의 대강의실보다도 넓었다.
내부는 계단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배열된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이었다.
그중 몇몇은 제자리에 종이 뭉치들을 들고 서서 앞 층의 사람들에게 무어라 지시를 하고 있었고, 또 몇몇은 정신없이 곤돌라 내부를 뛰듯 걸어 다녔다.
그들의 뒤편으로 찬란한 태양빛이 동이째로 들이붓듯 실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그때였다.
본부에서 제일 높은 곳인 문 앞에 서 있던 이예주와 여준에게로 누군가 황급히 뛰어와 거수경례 했다.
그는 과거에서 본 것 같은 갈색 군복 차림새였다.
여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이마에 갖다 대었던 손을 내렸다.
그는 곧바로 앞으로 몸을 돌려 큰 소리를 내질렀다.
“주목! 일동 기립!”
그의 커다란 고함에 분주하게 일을 하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았다.
한순간에 제게로 쏟아지는 수백 명의 시선에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차려!”
남자가 이어 소리치자 사람들이 우르르 양팔을 몸에 딱 붙이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족장님과 구원자님께, 경례!”
“필, 승!”
수백 병의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진동하듯 어마어마한 음파가 커졌다.
무엇에 그렇게 승리를 하고 싶은지, 악을 쓰듯 필승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예주와 여준을 바라보며 거수경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