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4)화 (196/319)

“네. 검은 파편과 인류의 전쟁은 이 RTBD가 개발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RTBD 개발 전의 인간들은 검은 파편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숨기 위해 사체의 피와 내장 같은 오물을 온몸에 묻히고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 스컹크보다 더욱 지독한 악취를 풍겼지요. 하지만 RTBD가 대량 공급된 후에는 더 이상 그런 수고로움을 들일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여준이 그때의 악취를 회상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예주도 그 악취를 맡아 본 적 있기에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예전에 그런 악취가 나는 다리족 사람들을 만난 적 있어요. 장로라고 그랬는데…….”

“네? 구원자님께서 다리족 장로를 말입니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그녀는 썩 좋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외눈박이 삼형제를 아들로 데리고 있는 노인이었어요.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기도 했는데…… 얼마 안 가 머리가 터져 죽어 버렸지만요.”

“저런. 구원자님께서 직접 행하신 겁니까?”

이예주는 여준의 질문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리창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뭘 내가 직접 해? 그 노망난 노인네 머리를 터뜨리는 걸?

“아뇨! 저 살인 못하는데요?”

“그럼 대체 누가…… 아.”

그럼 누가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했는지 물어보려던 여준은 금방 그게 누군지 깨달은 듯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예주는 그에게 잠시 향했던 시선을 도로 유리창 너머로 돌리며 한숨처럼 답했다.

“……그 미친놈들이 뜨거운 물을 뿌려서 저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했거든요.”

그것도 벌써 까마득한 일이었다. 그땐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들던 빌어먹을 놈들보다, 사슬에 묶어 ‘문’도 넘지 못하게 만들었던 람이 더 원망스러웠다. 

그대로 놈들에게 잡아먹힌다면 귀신이 돼서라도 그 눈 시뻘건 자식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 시뻘건 미친놈을 미워하고 증오하긴커녕, 되레 푹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돼 버렸다. 

여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예주가 들려준 말을 깊게 고심하는 듯했다.

“……봉식이 어르신을 만나신 것 같군요. 돌연변이 아들들의 이름이 꽤 특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봉식이…….”

이예주는 촌스러우면서도 그 노친네에게 딱 걸맞는 이름에 감탄했다.

“봉식이 어르신은 다리족 내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빨리 달릴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장로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장로 자리에서 박탈당하고 산에서 영구 추방되었습니다.”

“규칙이요?”

“네. 다리족은 식인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봉식이 어르신은 그 규칙을 여러 번 어긴 것은 물론이고 같은 시간족까지 식인 했던 것이 탄로 나 버렸지요. 인명 하나하나가 아까운 위급 상황인지라 식인은 중범죄나 마찬가집니다.”

시간족은 같은 시간족을 잡아먹을수록 힘이 강해진다는 게 정설 아니었나? 

지금껏 이예주가 만나 왔던 시간족들은 같은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동물들까지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정신병자들뿐이었다. 

그러나 여준의 입에서 나온 엄격하고 분명한 규율은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으로 밀어 넣기 충분했다.

“말이 중간에 새어 버렸군요. 어쨌든 RTBD는 수익 창출의 목적으로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산 라인이 안정화되면 저렴한 값에 전 대륙에 배포할 예정입니다.”

“배포……요?”

“네. 이제 우리도 검은 파편에게 반격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구원자님.”

배포라니. 

그렇다면 동쪽 대륙 인간들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손에 저 약물을 쥐여 준다는 소리가 아닌가.

인간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만든 것임은 잘 알겠다. 

저도 같은 인간이어서 그런지, 인류 최대의 적에게서 동족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깨나 절박하다는 사실 또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예주가 조롱이와 포니, 동쪽 대륙의 신인류들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제게 약물에 대해 설명해 주는 여준이 대단한 영웅 같아 보였을 것이다.

“저 주사기가…… 대체 어떤 식으로 검은 파편에게서 숨겨 준다는 건데요?”

손가락 끝에 와 닿는 유리창의 온도가 서늘했다. 

흰돌이 한 명이 주사기를 확인하는 쪽을 손가락으로 뽀득뽀득 문지르며 이예주가 물었다.

“음. 3층에 있는 본부로 가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간단히 얘기하자면 블랙 웨이브란 것이 있습니다. 검은 파편이 공격이나 가히 기적과도 같은 특수 상황을 일으킬 때마다 뿜어 대는 에너지의 파동입니다.”

“…….”

“그 에너지는 너무 광범위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없어 현재 최대치를 무한대로 설정해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놈이 내뿜는 에너지 파동 중 일부를 가져다가 작은 분자 형태로 나누고 나누어 쪼개 보니 생각보다 그 에너지의 원천을 얻기 쉬었습니다.”

“……원천이요?”

“네. 놈이 가진 힘의 원천은 의외로 우리가 길을 걷다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곳곳의 에너지였습니다. 바람, 공기, 물, 번개.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손에 넣는 게 가능한 것들 말입니다. 검은 파편은 그것을 극소량 이용하되 어떠한 물리적, 화학적 과정을 거쳐 방대한 힘으로 전환해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는 놈과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기 위해 갖가지 실험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에서 얻어 축적한 에너지는 터무니없이 적어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고배가 쓰디썼는지 여준의 훤칠한 미간에 파인 홈이 더욱 깊어졌다. 

반 정도는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것이 태반이었다. 

검은 파편의 에너지. 파동. 전환. 자연……. 

머릿속이 온통 혼잡하게 뒤섞였다. 

하지만 이예주는 여준의 말을 멈추고 일일이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는 것보단 입 다물고 듣기를 고수했다. 

“그러던 도중 신인류라는 것들이 나타나 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파편의 그 놀랍고도 강대한 힘이 잔뜩 응축된 동물들 말입니다. 한정된 곳에 갇혀 있는 에너지를 적출하는 것은 개방된 곳에 적은 양으로 널리 퍼져 있는 에너지를 주워 모으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비교하자면, 에너지는 물입니다. 커다란 독에 담겨 있는 물을 퍼내는 것은 쉽지만, 사방으로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

“신인류들은 매우 강했습니다. 신인류와의 1차 전쟁에 가담했던 다리족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요. 수많은 동료들이 그들의 손에 명을 달리했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RTBD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준이 갑작스레 말끝을 흐렸다. 그는 불현듯 제 두 손을 들고 내려다보다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RTBD가 완성되는 것을 모두들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예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동료와 전우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이 먼저 죽어 이 기쁨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으로 여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금방 우울함을 떨치고 이예주에게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RTBD는 검은 파편의 힘의 일부를 액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과 미물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검은 파편의 힘을 잔뜩 응축하여 인간의 몸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약물이 체내에 남아 있는 동안 이 지구 곳곳에 있는 놈의 원천과 동화됩니다. 쉽게 말해, 검은 파편의 힘과 영역 안에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물질대사를 하는 동안 필수 불가결하게 내뿜는 생명의 기척을 읽을 수 없으니 검은 파편은 우리를 자연물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다만 이 혁신적인 약물을 ‘검은 파편의 분노’라 명명한 것은.”

“…….”

“검은 파편은 제 수하로 부리는 신인류들에게 벌을 내릴 때, 동물에게 내린 제 힘을 거두기보단 더 큰 힘을 내려 신인류를 반인반수에서 완전히 인간으로 바꿔 버린다더군요. 인간으로 바뀐 그 신인류는 인간 생활에서 적응하지 못해 미쳐 버리거나, 아니면…….”

람이 직접 사막에 가져다 버린다. 

그리고.

“검은 파편이 직접 중앙 대륙의 사막에 버린다더군요. 사막의 포식자에게 잡혀 먹히도록 말이죠. 제 동료까지 내버리는 아주 잔인하기 그지없는 놈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검은 파편의 분노’라고 지었습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죠. 물론 아직까지 RTBD를 과량 투여하면 신인류가 진짜 인간으로 변하는지는 시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핫.”

여준은 제가 지은 이름과 그 이름을 짓게 된 경위가 마음에 드는지 호쾌하게 웃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그의 웃음 포인트에 전혀 동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여준은 미소를 갈무리한 채 마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RTBD는 지속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검은 파편에 의한 사망률을 줄여 보려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인간들은 한없이 약하고 미숙합니다. 그나마 우리 다리족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능력 덕분에 놈에게 잡혀 죽을 확률이 낮지만, 다른 시간족들과 일반인들의 사정은 다릅니다. 때문에 검은 파편과의 본격적인 전쟁은 전 인류에게 RTBD가 배포된 후부터가 되겠죠.”

여준은 그때가 기대되지 않냐는 듯 희망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이예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일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동쪽 대륙에서 납치당했을 시, 람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곧바로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제야 람이 자신을 바로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빌어먹을 용병 대장이 이예주와 조롱이에게 RTBD 주사를 두세 번씩 찔러 넣은 탓에 생명의 기척이 완전히 숨겨진 것이다.

여준이 눈으로 묻는 RTBD의 배포 후 세상은 전혀 기대되지 않았지만, 이예주는 그가 말하는 검은 파편의 분노고 뭐고 써먹어 봤자 람에겐 타격 하나 없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들었다. 

그는 결국 그녀를 찾아내었다. 

생명의 기척 따위와 관계없이 그 남자라면 동쪽 대륙을 때려 부숴서라도 자신을 찾아낼 것을, 이예주는 잘 알았다. 

그렇기에 말하자면 여준이 꾸미고 있는 짓은 모두 헛짓거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조롱이와 신인류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 전이었다면, 여준의 희망찬 대의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하지 않았을까. 

슬프지만 자신 또한 람이 증오하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여준의 입에서 통해 듣는 검은 파편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직접 보고 겪은 산 증인이다. 

고로 이예주는 여준의 말로부터 분노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냥 나름 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있구나, 이렇게 여기고 대충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조롱이의 죽음을 목격한 후였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선했다. 

이름 지어 줘서 고맙다고, 안녕하고 인사하는 조롱이의 모습이……. 

다리족 족장놈이 제 입으로 인정했다. 

검은 파편에게 죽는 것을 막기 위한 약물을 만드는 데에 신인류들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그럼 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동물들과 신인류들이 희생되었을까. 

약물이 배포된 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신인류들이 죽어 나갈 것인가. 

“그럼 RTBD란 약물은…… 검은 파편으로부터 숨어서 인간들의 죽음을 방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건가요?”

“음.”

여준은 이예주의 질문에 짧은 틈을 두고 답했다. 

이예주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의미심장한 침음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구원자님. RTBD는 오로지 검은 파편으로부터 인간들을 구명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금전적인 수익을 목적으로 개발한 물품 또한 아니기에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대가로 사용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검은 파편을 공격하는데 더 용이하게 이용하는 것을 제외하곤 말이죠.”

우리가 인류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이제 너도 알겠지? 

여준은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는 심정을 숨기지 않고 말로써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그것이 자신의 의구심을 한순간에 증폭시키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

그럼 왜 동쪽 대륙 마을 족장에게 거금을 받고 그 약물들을 팔았냐고. 마을 족장은 왜 그 약물을 통해 신인류 정복 전쟁을 준비한다고 지껄였는데. 

또 왜 조롱이와 다른 신인류들에게 그 약물을 투여해서 아무 힘도 못 쓰게 만든 후, 눈족의 먹이로 전락하게 만들었느냐고.

선한 미소를 띤 채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하는 여준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묻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을 속으로 꾹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3층에 있는 본부로 가실까요, 구원자님.”

여준은 여전히 친절하게 이예주를 안내했다. 

뒤로 돈 그가 다시 생산실의 중앙으로 향했고, 그 뒤를 느린 걸음의 이예주가, 또 그 뒤를 그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상병 철수가 따랐다. 

여준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속였다. 놈의 상냥한 면상 뒤에 어떤 음험한 생각들이 깔려 있을지 이예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여준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단정 지어 버리긴 어렵지 않을까. 

다리족 놈들이 신인류를 그저 실험체와 먹이로 쓸 한낱 하등한 미물로 여기고 있다면 여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신인류들을 저와 같은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인 자신과는 판이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오른쪽 손을 들고 이미 사라진 엄지손톱의 자리를 찾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리도 친절한 다리족이지만 언제까지고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거나 혹은 제 편에 선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이제껏 베풀었던 호의 서린 미소는 곧장 집어치울 것이다. 

그도 모자라 어쩌면, 여느 시간족들처럼 가차 없이 자신을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럭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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