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차거!”
뜬금없는 물세례에 허겁지겁 위를 바라보니 천장에 자동 확산 소화기 같은 동글동글한 센서 수십 개가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여준이 이예주의 비명에 눈치를 보듯 어색하게 웃었다.
“소독을 하는 중입니다. 2층은 생필품과 가공식품을 만드는 생산실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묻혀 온 오염 물질을 사전 제거해야 합니다.”
알싸하고 쌉쌀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앞머리가 금세 척척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람이 사 준 장포를 뚫고 내의까지 축축함과 서늘함이 파고들지 않은 거랄까.
주변을 둘러보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소독약들을 맞으며 세수하는 것처럼 얼굴과 목을 푸확 푸확 문지르는 인간들이 태반이었다.
기분 탓인지 꼭 식당에서 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얼굴과 목도 닦는 아저씨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그 짓을 따라 하지 않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포의 어깨 부분에 습기가 스며들어 조금 무거워졌을 무렵, 천장에서 끊임없이 분무되던 소독약이 멈췄다.
‘지잉―’ 하고 자동으로 유리문이 열렸다.
때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타일이라 물 묻은 신발을 대기 좀 미안했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초록색 스펀지가 물기를 다 흡수해 준 덕에 그녀가 밟은 하얀 타일 위로는 더러운 티 한 점 묻어나지 않았다.
묘한 만족감에 휩싸여 있을 때쯤, 어디선가 새하얀 우주복 같은 것을 입은 사람 네다섯 명이 우르르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족장님!”
쟁반 같은 흰색 판때기에 처음 보는 네모난 금속 물체들을 가득 담아 온 흰돌이들이 여준에게 목례했다.
덩치가 커다란 흰돌이 사이에 가녀리고 마른 체구의 흰돌이들도 섞여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탓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몸태만 봐서는 여자가 분명했다.
남자만 있는 곳은 아니구나.
처음 발견한 여자의 존재에 이예주는 놀라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여준이 한 손을 들여 보이자 고개를 든 그들이 신속하게 판 위의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된 네모난 물체는 하모니카보다 좀 더 작은 크기로 끝에 빨간색의 누르는 버튼이 달려 있었다.
흰돌이들에게 그것을 건네받은 군인들은 너 나 할 것이 그것을 제 손등이나 팔과 같은 맨살에 대고 붉은 버튼을 눌렀다.
철컥철컥, 여기저기서 종이에 스템플러 박는 것과 같은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이것도 뭐, 비행선 안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여준이 그녀를 챙겼다.
“손 좀 주시겠습니까, 구원자님?”
“왜요?”
머뭇머뭇 손 내밀기를 주저했지만 놈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기 싸움에서 진 것은 역시 이예주 쪽이었다.
여준을 향해 팔을 주춤주춤 내밀기가 무섭게 남자가 억센 손으로 휙 손목을 낚아챘다.
“아!”
철컥, 불똥이 튄 것처럼 손등에 따끔한 통증이 엄습했다.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손을 확 빼냈다.
“뭐야, 말도 없이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요. 따갑잖아요.”
손등을 내려다보니 놈이 스탬프 같은 금속 물체로 찍은 자리에 두 개의 선명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황급히 소독약이 묻은 솜을 쥐여 주며 변명하듯 빠르게 말했다.
“마킹입니다. 검은 파편에게서부터 구원자님의 생체 에너지를 숨겨 주는 약물을 체내로 주입한 겁니다. 마킹 자국이 있는 사람만이 비행선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일종의 승선권 표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하기 전에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그렇게 갑자기…….”
마치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간호사가 마구 주사를 쑤셔 넣은 기분이다.
그녀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는지 여준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고개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사람 앞에서 계속 꽁해 있기도 뭐했다.
할 말이 없어진 이예주는 뚱한 얼굴로 화끈거리는 손등을 놈이 쥐여 준 솜으로 문질렀다.
그사이 여준은 그녀의 뒤편에서 두 줄로 각 잡고 서 있던 군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킹을 끝냈으면 붉은 개는 여기서 그만 해산한다. 철수 상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 위치로 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철수 상병은 나를 따라 구원자님을 보필한다.”
“예! 필승!”
우렁찬 구호와 함께 19명의 군인들이 여준에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생산실을 가로질러 반대편 너머로 우르르 뛰어갔다.
자신에게 존칭을 써 주며 호감과 친절을 베푼다고 해서 남들에게까지 만만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준은 여기서 총 명령을 내리는 존재였다.
그것을 체감한 이예주는 일순 머리가 차가워졌다.
먼 반대편으로 점차 멀어지는 한 무더기의 군인들을 바라보며 문득 정신 줄을 더 꽉 조여 매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실 너머에는 객실이 있습니다.”
이예주가 군인들이 사라지는 방향 쪽을 궁금해한다고 여겼는지 여준이 이야기해 주었다.
“3층에 있는 곤돌라로 바로 가도 되지만, 궁금하시다면 생산실을 잠시 둘러보시겠습니까?”
그의 어투는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산실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에 가까웠다.
이예주는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침 물어볼 것도 생겼기 때문이다.
“생산실에선 말 그대로 비행선 생활에 필요한 각종 생필품을 만듭니다. 어떤 물품은 여분이 남아 다른 대륙에 수출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다리족에서 대표적으로 제작하고 있는 것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넘어선 유리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여준이 이동했다.
그 뒤를 이예주가, 그 뒤를 상병 철수가 따랐다.
소독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여러 기계들과 로봇들이 있는 주변 또한 유리 벽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그저 광활한 2층 전체에 기계장치들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는 것 같아도 가까이 가 보면 하나하나 유리 벽으로 공간이 나뉘어져 있었다.
마치 회사 사무실의 파티션처럼.
“이곳에서 만든 계면활성제에 녹말가루와 탄산수소나트륨 등을 섞어 바로 옆에서 치약과 비누 같은 세면 용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두 가지 물품은 비행선 내 장병들 사이에서도 사용 빈도수가 높아 판매 여분 또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대륙 사람들 사이에서의 수요 역시 굉장히 높기 때문에 값비싸게 판매가 되고 있지요.”
두 기계를 향해 손짓하며 여준이 자신감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계면 활성제를 만드는 기계 주변에는 허연 거품이 말라붙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그 옆의 치약이나 비누를 만든다는 기계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선 하얀 통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다가 밑에 있는 종이 박스로 떨어졌다.
“수요에 따라 웬만한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금액으로 거래되기도 합니다.”
치약이나 비누 따위가 집 한 채 값으로 거래된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런 미친 1000년 후로 넘어올 줄 알았더라면 평소에 립밤 대신 비누와 칫솔을 싸 가지고 다녔을 텐데.
멍하니 하얀 통들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는 여준을 뒤늦게 발견하고 후다닥 그 뒤를 쫓아갔다.
“여기서는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흔히 잡을 수 있는 설치류나 양서류들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 후 건조하여 육포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희 다리족같이 작전 중 간단히 요기해야 하는 군인들이나 혹은 긴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간편 식품입니다.”
수십 마리의 늘어진 쥐들이 기계 집게에 꼬리가 잡혀 매달린 채 규칙적으로 휘둘리다가 허연 연기가 솟아나는 통에 두 마리씩 푹 담가졌다 꺼내져 다시 이동했다.
곧바로 통 옆의 빠르게 회전하는 고무 끈들에 의해 털들이 뽑혀 벌건 속살을 드러내는 걸로 보아 연기 나는 통에 담긴 것은 펄펄 끓는 물인 것 같았다.
공중에서 휘날리는 털들은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 개의 쇠관들이 이쪽저쪽 움직이며 빨아들였다.
덕분에 하얀 타일은 여전히 때 묻지 않고 깔끔했다.
“청소기?”
혼잣말을 하던 이예주는 이어서 들려오는 여준의 상세한 설명에 눈살을 꽈득 찌푸렸다.
“벗긴 가죽들과 제거한 내장들은 저쪽에서 농축하여 에너지 바로 만들기도 합니다. 먹을 수 있는 양식들이 나날이 줄어들어 가는 와중이기 때문에 귀한 고기는 가죽 한 점 헛되이 쓰고 있지 않습니다. 에너지 바는 다리족의 주 식료이기 때문에 수출 품목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심한 기근이 생기면 전 대륙에 걸쳐 무료 공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분은 모두 저장고에 저장해 두고 있습니다.”
그는 쥐의 털을 벗기는 기계의 오른쪽 유리 벽 너머 또 다른 공간에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때마침 천장 쪽으로 솟아 있는 기계의 배출구에서 ‘퓨뷰뷱’ 하고 회갈색 양갱 모양의 네모난 것들이 여러 개 분출되었다.
팝콘 튀어 오르듯 허공으로 튀어 올랐던 그것들은 잠시 후 하강하여 그 밑의 네모난 양철통에 착착 담겼다.
시궁창 쥐색의 묵 같은 것들이 통에 가득 쌓여 물컹물컹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이예주가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생긴 것은 저래 보여도 딸기 향을 첨가해서 딸기 맛이 납니다, 하핫.”
그런 그녀를 보고 여준 놈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외에도 생산하는 물품들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최근 다리족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준은 이번엔 생산실의 깊숙한 안쪽까지 이예주를 끌고 들어갔다.
중간중간에도 미처 보지 못한 유리 벽으로 막혀진 곳이 많아 빙빙 돌아가야 했다.
꽤 한참을 걷고 나서 도착한 유리 벽 안쪽은, 여타 다른 기계와 로봇이 있는 공간 4개를 합친 것만큼 넓었다.
거의 고등학교 교실 한 칸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기계들이 합을 맞춰 늘어서 있었는데, 모두 연결된 듯했다.
치약이나 에너지 바를 만드는 기계가 있던 유리 케이지와는 달리, 그 안에는 4명의 흰돌이들이 기계에 붙어 이것저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흰돌이 한 명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기계에서 막 나오기 시작하는 수십 개의 물체 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크기도 작거니와 꽤 멀찍이 떨어져 있는 탓에 그게 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예주는 자세히 보기 위해 지문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투명한 유리 벽에 바짝 달라붙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했다가 크게 뜨는 것을 반복하며 간신히 보게 된 그 물체는 바로.
“……주사기?”
비닐 포장지를 벗긴 흰돌이가 그 안에서 검지만 한 크기의 주사기 하나를 꺼내어 시험해 보았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작은 물줄기를 본 순간 이예주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기야 수천, 수만 개 있겠지만, 다리족에서 생산하는 주사기는 이예주도 잘 알고 있는 그 주사기 하나뿐일 터였다.
“검은 파편에게 들키지 않도록 인간의 생체 에너지 파동을 숨겨 주는 약물입니다. 방금 전 생산실 입구에서 했던 마킹에도 쓰이는 것이죠. 약물의 이름은 ‘Rage of The black debris.’”
여준이 이예주의 옆쪽으로 다가서며 그녀와 같이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뜬금없이 유창한 영어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예주 또한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수준이어서 놀랍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녀가 놀란 것은 그 뜻 때문이었다.
“검은 파편의 분노.”
“…….”
“줄여서 RTBD라고 부릅니다. 아직은 실험 단계지만 이제 거의 완성된 거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예주는 어쩐지 조금 황망한 얼굴로 제 옆에 선 여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쥐 껍질로 만들어진 에너지 바를 향해 딸기 맛이라며 껄껄 웃던 사람이라고는 믿지 못할 만큼, 무겁고 진중한 얼굴을 한 일족의 수장이 제 옆에 서 있었다.
헬기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여준의 쾌활하지 못한 모습은 조금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떤 무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버거운 짐을 떠안고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이 과연 알까. 검은 파편의 분노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
얼마나 화가 났으면 눈동자 색이 시뻘겋게 변해 버렸을까.
그 남자가 그 정도로 인간을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람은 과연 알고서 약물에 그런 이름을 붙인 걸까.
“최근 저희 다리족에서는 RTBD를 대량 생산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 RTBD야말로 하루하루 검은 파편에게서 죽어 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고 있지요.”
“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