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여준이란 놈이 다리족 족장이며, 이놈이 신인류들이 꿈쩍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약물을 만들어 마을 족장 놈에게 팔아 치워 왔다는 것이지?
지금껏 만나 왔던 족장 놈들은 머리 한 부분이 회까닥 돌아 버린 미친놈들뿐이었기에, 이예주는 제 앞의 남자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심 놀라웠다.
하지만 또 모르지.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눈이 돌아 버릴지.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생각보다 다리족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과 새로 알게 된 정보들이 많았다.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분노와 복잡한 상념들에 이예주는 음침한 눈으로 연신 뿔각 대장을 곁눈질했다.
“구원자님께선…….”
그때 그 적의 어린 시선을 느낀 남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구원자 소리에 벌써 익숙해진 이예주는 원치 않아도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악수하기 싫으시면,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이, 이름요?”
“예. 구원자님의 이름이요.”
“시…….”
알려 주기 싫었다.
싫다는 소리를 고스란히 내뱉으려다가 이예주는 아까 우악스럽게 헬기에 처박힌 것을 재빨리 상기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튀어나온 짧은 음절에 남자의 눈이 있는 대로 초롱초롱하게 변한 후였다. 별수 없었다.
“이……예주예요.”
“이예주, 이예주. 예주, 예주, 예주.”
“…….”
“예쁜 이름이네요. 성도 아주 예쁩니다.”
마치 각인하듯 이예주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또다시 환하게 웃었다.
놈이 여준이란 이름을 가진 다리족 족장이란 사실을 듣기 전이었다면 ‘짜식, 훤칠하니 잘생겼구만.’ 하고 조금 설렜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경계심을 더욱 높이는데 한몫할 뿐이었다.
왜 저렇게 실실 웃는 거지. 기분 나쁘게.
람에게선 그렇게 듣기 고되고 힘들었던 이름이 외간 남자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나온 탓에 어쩐지 짜증이 났다.
“저기 조, 족장님, 그…… 그런데요.”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고, 제 앞의 남자는 미친놈만 우글거리는 시간족 족장이었다.
아직 뿔각 대장이 어떻게 미쳤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녀는 신중하게 말을 섞는 것을 택했다.
“여준이라고 편히 불러 주세요.”
남자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같은 한국인, 훈훈한 대학 선배 같은 외모에 이예주는 경계심이 자꾸 허물어질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 네. 여준 씨,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구원자님.”
이름을 알려 줬음에도 여준은 꼬박꼬박 구원자라 불렀다.
그렇게 부르다가 사막에서 람이 쾅쾅 집어 던지던 괴물에 깔려 뒈질 뻔한 것을 벌써 다 잊어 먹은 듯싶었다.
물론 예주 씨라고 마주 부르는 것은 이예주 또한 싫었다.
때문에 그녀는 여준처럼 굳이 편히 부르라는 헛소리 따윈 하지 않았다.
“저, 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그 소심하고 건조한 질문에 남자가 밝게 웃으며 답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냥…….”
“예?”
“저, 저는 그냥 산 정상으로 안 가고 그…… 그 산장에 다시 있으면 안…… 되려나요?”
이예주가 마침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내 말하고 싶었던 것을 턱 토해 내고 얕게 헐떡였다.
그녀의 말에 여준의 밝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예주는 더럭 람이 걱정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목숨이 염려스러웠다.
말도 없이 사라진 자신 때문에 화가 나 있을 람에게서부터 자신의 목숨이.
잠깐 새에 텅 비어 버린 산장을 보고 길길이 날뛰고 있겠지. 여차하면 산을 다 때려 부숴서 나를 찾으려 들 거야.
그러면 내 목숨의 안전은……!
지금껏 자신이 도망간 후 람이 보였던 반응들을 떠올리며 점차 얼굴이 파리해지던 이예주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남자는 날 버리고 간 것일지도 모르지, 참.
자신이 끝까지 제 능력을 밝히지 않아서,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서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 데도 안 가겠다고 했으면서, 원한다면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으면서. 씨이…….
“제가 없으면 그…… 그 사람이 많이 화낼 텐데…….”
이예주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와 같이 흙빛으로 어두워지는 그녀의 얼굴에 여준이 애써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의 입에서 생뚱맞은 소리가 나왔다.
“저희를 걱정해 주시는군요, 구원자님.”
“예, 예?”
어느 틈에 여준의 얼굴이 진중함에서 감격스러움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검은 파편의 위협으로부터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이요?”
“네. 다리족은 수십 년 동안 놈에게 대적하면서 나름의 생존 방법과 검은 파편을 공격할 계획을 끊임없이 도모하였습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놈이라 해도 저희의 근거지를 쉽게 공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예주의 얼굴을 마주 보며 여준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마저 지껄였다.
“특히 구원자님이 저희 곁에서 저희를 도와주시는 한은요.”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아, 검은 파편이 따라올 것이 걱정되십니까? 괜찮습니다. 구원자님을 구하기 전, 그쪽 주변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구출 계획을 세운 후 몇몇 요원들을 수차례 보내 그 지형을 정찰했습니다. 비록 가시 장벽을 뚫고 구원자님을 바로 구출하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그 가시 장벽은 대체 무엇으로 이뤄진 건지 강철로 만든 도끼도 들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듯 뤼미에르 가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며 여준이 덧붙였다.
이예주는 그저 정신이 혼미해졌다.
“혹시 놈이 잠복하고 구원자님을 미끼로 저희를 잡으려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다리족 내에서도 가장 빠른 정예 요원 스무 명이 구출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이 족장놈의 미친 구석이란 말인가?
지금껏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곡해해서 제멋대로 판가름하는 인간들은 많았지만, 제 앞의 군바리만큼 귓구멍이 막힌 인간은 처음이었다.
“아니요. 저기요. 그, 제 말은요. 그런 걱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막에서처럼 당신들을! 당신들을 말이……!”
“우리 다리족 정예 요원들은 평균 시속 1000킬로미터씩 달릴 수 있습니다. 로켓보다 조금 느린 속도죠. 검은 파편도 쉽게 잡지 못하는 다리족의 자랑들입니다.”
제발 닥쳐. 이예주는 다리족 족장 놈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을 그만 포기했다.
다리족이 얼마나 빠르고 대단한 건지는 와 닿지 않았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구나 싶은 게 다일 뿐.
“요원 스무 명이 가시 장벽이 사라진 후부터 그 주변을 정확히 10초 동안 다섯 바퀴 돌며 샅샅이 확인했지만 검은 파편의 존재나 기운 따윈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구원자님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셔도 됩니다.”
다리족 족장이 제 일족의 위대한 업무 수행 능력을 자랑스러운 얼굴로 마저 설명하곤 이야기를 끝마쳤다.
이예주는 문득 귓가에 걸리는 말에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그럼 정말 람이 자신을 두고 떠났다는 거잖아.
주변을 샅샅이 확인했음에도 람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는 거라면, 그러면 정말로 자신을 두고…….
이예주는 마치 청년 캠프 홍보 대사처럼 희망찬 얼굴로 웃고 있는 여준을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울적한 시선이 닿자 그는 이까지 활짝 드러내며 더욱 밝게 웃었다.
제 딴에는 밝은 미소가 이예주에게 안심과 신뢰를 심어 줄 거라 믿는 것 같았다.
오히려 불안감만 증폭한 이예주는 그 부담스러운 얼굴에서 고개를 돌려 헬기 안의 다른 인간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조종석에 두 명, 제 앞의 족장 한 명, 양옆에 딱 붙어 앉아 있는 덩치 두 명.
저를 포함해서 탑승 인원은 총.
“여섯 명뿐인데…….”
그럼 스무 명이나 되는 그 대단하신 정예 요원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예주가 헬기 안의 머릿수를 세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듯 여준이 ‘아’ 하더니 오른쪽 창문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십시오, 구원자님.”
보고 싶었지만 이예주의 오른쪽에는 서로의 허벅지가 맞닿을 만큼 딱 붙어 있는 군복 덩치가 있어 볼 수 없었다.
그러자 족장이 꽤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철수 상병.”
“상병! 철수!”
“구원자님과 자리를 바꿔 드리도록.”
이예주는 신속하게 안전벨트를 푼 덩치와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이제 보이십니까, 구원자님?”
“뭐가요?”
먼지로 뿌연 창문 밖에는 깎아지는 절벽과 경사뿐이었다.
“아래쪽을 보십시오.”
여준의 말에 따라 이예주의 시선이 직선에서 아래쪽으로 슬며시 내려갔다.
절벽 위에 하얀 눈이 쌓인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산의 정상으로 간다더니 헬기는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이예주는 처음엔 여준이 뭘 보라는 건지 몰랐다.
그저 이 위치에서는 창밖을 보더라도 산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대충 파악하긴 글렀구나 싶었다.
“더 아래쪽입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방향을 지적하고 나서야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야?”
거의 직각이라고 생각할 만큼 경사가 가팔랐다.
아니, 저걸 경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클라이밍도 할 수 없을 만한 절벽이었다.
나무 사이사이로 무언가가 그 낭떠러지를 오르고 있었다.
얼핏 여준이 입은 것과 같은 군복이 보였다.
“대박.”
이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헬기 아래, 절벽을 타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꼭 아침 조깅하듯 가볍게 뛰고 있어서 그녀는 자신이 헬리콥터를 타고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을 정도였다.
나무를 타고, 뭉툭한 바위를 뛰어넘어 헬기와 비등한 속도로 가파른 산을 오르는 군인들.
저게 인간이야? 저게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이예주는 이제야 왜 그렇게 제 앞의 족장이 시속이 어쩌구 하면서 그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리족처럼 단시간 내에 빠르게 도망칠 수 있다고 했나.
불현듯 사막에서 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에 관해 물어봤을 때가 떠올랐다.
저런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 리 없었다.
1000년 후로 넘어와서 가장 처음 만나 본 시간족이고, 자주 접해 들은 집단이었지만, 실제로 본 다리족의 능력은 상상,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경이로운 달리기 속도에 뒷목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다 돋았다.
대체 자신은 무슨 배짱으로 람에게 다리족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친 걸까.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구원자님께선 다리족은 처음 보십니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사막에서 이 남자한테 납치당할 때도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만 모래 더미에서 거칠게 굴려지느라 정신이 없어 이렇게 어마어마한 줄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예주는 여준이 묻는 말에 답도 않고 멍하니 뛰어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반응이 자랑스러운지 여준은 대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일 앞선 군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정신없이 그 뒤를 쫓았다.
헬기와의 거리 때문에 장난감 병정같이 작은 크기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뛰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낮이니까 다행이지 어두운 밤에 절벽을 거꾸로 기어오르고 있는 저 사람들을 본다면 기절할지도.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할 무렵, 타깃으로 잡은 제일 앞서 가던 남자가 순간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달리던 군인들 또한 연달아 사라지자 이예주는 당황했다.
그때, 암벽으로 막혀 갑갑했던 시야가 확 트였다. 끝이 보이지 않던 산등성이에도 그 끝이 존재했다.
두두두두― 헬기가 벼랑의 끝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
가팔랐던 절벽 대신, 눈이 드문드문 덮인 평원이 거짓말처럼 펼쳐져 있었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깨달을 틈도 없이, 이예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저게…….”
“도착했군요.”
그것은 산 정상의 평원을 거의 다 덮을 만큼 거대한 건물이었다.
건물? 아니다.
건물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그러니까 건물에 거대한 날개가 있고 그 날개 밑에 엔진이 또 달려 있는.
전투기? 전투기라고 하기엔 너무 큰데. 항공모함? 아니야. 항공모함은 배니까 바다에 있어야지, 왜 산 정상에…….
“드디어 비행선 Ark-14로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구원자님.”
여준이 그녀의 혼란을 한 번에 정리해 주었다.
비행선. 튀어나올 만큼 커다래진 이예주의 눈은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비행선에 못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