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0-1)화 (192/319)

Chapter 8.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헬기가 진짜 있었구나. 

처음에 헬기에 처박혀 거의 반강제로 벨트를 엑스 자로 매던 이예주가 생각했던 것은 우습게도 헬리콥터의 존재 유무였다. 

뿔각 대장이 사막에서 지껄인 건 거짓이 아니었다.

두두두두― 

군복을 입은 남자들 중 한 명이 귀에 TV에서만 보던 헬기용 헤드셋을 껴 줬음에도 돌아가는 프로펠러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몸이 부웅 뜨는 느낌과 동시에 헬리콥터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급격한 기압 차이 때문인지 작은 이명과 함께 귀가 먹먹해졌다. 

이예주는 밖이 잘 보이지 않는 뿌연 창으로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가는 건지 대충이나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먼지가 낀 흐릿한 창은 이예주가 앉은 한가운데의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몸을 기울여 일부러 확인할 수도 없었다. 우락부락한 군복 근육맨 둘이 양옆 자리에 딱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금만 움찔거려도 놈들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지레 겁을 먹은 이예주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두두두두― 커다란 프로펠러 소리가 흐리멍덩해지려던 머릿속을 일깨웠다. 

문득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산장 문을 잡고 나는 못 간다며 버티던 방금 전의 일이 꼭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람이 산장 근처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키면 그가 한달음에 달려와 군인 놈들의 마수에서 자신을 구해 줄 줄 알았다. 

―람! 람! 나 또 끌려가요! 나 또 납치당한다구요! 람!

목이 찢어져라 람을 부르고 또 불렀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예주는 결국 뿔각 대장의 지휘 아래 우락부락한 장정 두 명에게 번쩍 들려 헬기 안에 가볍게 처박혔다.

버린 걸까. 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원치 않으면 아무 데도 보내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진짜 자신을 두고 떠난 건가. 

그녀의 두 눈이 불안함으로 옅게 흔들렸다. 

이예주는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대고 까득까득 깨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생긴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

톡, 토톡.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이예주의 엄지손톱 길이가 점차 짧아졌다. 

앞니로 깨물 수 있는 손톱이 모두 사라지고 살마저 물어뜯을 무렵, 불현듯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이예주는 과히 놀라며 입에서 손을 떼고 재빨리 부동자세를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냥 사방이 군인 아저씨투성이라 자동으로 군기가 바짝 드는 기분이었다. 

구원자라고 그토록 추대하던 뿔각 대장은 이예주의 그런 행동에 딱히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말없이 쓰고 있던 군용 헬멧의 버클을 풀었다.

헬멧을 벗어 낸 뿔각 대장이 이예주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드러난 짧은 머리카락이 창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거친 바람에 부스스 흩어졌다. 

검은색이었다. 

“한국……인?”

이예주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고글을 벗은 남자는 생각보다 젊고 훤칠했다. 

나이는 많아 봤자 이예주보다 네다섯 살 위, 이십 대 후반 정도?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비단 뿔각 대장의 젊음과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 또한 검은색이었던 것이다. 

1000년 후로 넘어온 후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검은 머리가 아니더라도 동양인같이 생긴 사람들은 종종 보아 왔다. 

그러나 이토록 강하게 향수가 느껴지는 인간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검은색이라고 단정 짓기엔 애매한,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온전히 빛났다. 

문득 뿔각 대장이 한 손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이예주가 멍하니 그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는 ‘앗!’ 하고 혀를 차더니 서둘러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다시 내밀었다. 

남자가 제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예주는 그 손을 맞잡지는 않았다. 

“여준입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둔 남자가 말했다. 

이예주는 옹알이하는 아기가 엄마 말을 따라 하듯 무의식적으로 따라 말했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이름이었다.

“……여준?”

“네, 여준이요. 이름입니다.”

여준. 이예주는 일순 눈살을 와작 찌푸렸다. 

어쩐지. 어디서 재수 옴 붙은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진다 싶더라니.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같은 대학에 입학한 동기의 이름과 같았다. 

성은 아마 김 씨였나, 박 씨였나……?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을 안주 삼아 떠벌리고 다닌 그 새끼 덕분에 이예주는 대학 4년 동안 내내 귀신 보는 무당 딸이란 별명을 달고 알차게 보내 왔다.

“성은……!”

이예주는 다급히 물었다. 

성마저 동일하다면 그녀는 뿔각 대장을 기꺼이 개새끼라고 칭할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성은 아쉽게도 없습니다.”

남자가 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아니야, 방심하지 마. 그 김여준 새끼 때문에 당한 걸 생각해! 

이예주가 갑작스럽게 알게 된 동명이인에 대한 분노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 사이, 뿔각 대장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여긴 건지 자기소개를 이어 했다.

“다리족 족장을 맡고 있습니다.”

“다리족 족장…….”

“다리족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서 거주하고 있죠.”

이예주는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어벙한 얼굴로 뿔각 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리족이 뭐 하는 인간들이었더라. 

산 정상에서 살고…… 자신과 같은 뿌리, 그러니까 한국인의 자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에서 만난 그 망할 노인네도 겉모습은 한국인 같아 보여 깜빡 속아 넘어갔었지. 외눈박이 삼형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리고 사막에서 자신을 구원자라 칭하며 납치하려고 들었고, 또 해안 마을의 말더듬이 족장에게서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어떤 약물을 거래했다. 

그 약물이란……. 

순간 사지를 움직이지 못해 힘겨워하며 몸을 벌벌 떨던 조롱이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의 끔찍함이 상기되자 이예주는 진저리를 치며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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