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0)화 (191/319)

한달음에 문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젖힐 요량으로 문고리를 덜컥 쥐었다가 멈칫했다. 

“아.”

생각났다. 

어제 결국 람에게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으로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딸기를 먹은 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결정과 능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

또 뭐라고 잔뜩 잔소리하겠지. 귀에 환청처럼 들리는 남자의 딱딱한 목소리에 이예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쌌다. 어제까지 결정해야 한다며 람이 재촉했는데, 무시하고 잠이나 자빠져 잤으니. 

“아냐, 이제라도 말하는 게 어디야!”

그녀는 애써 우울함을 떨치듯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오늘은 꼭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상 위로 가지 않는다는 것부터 말해야지. 다리족 따윈 필요 없다고. 그냥 당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되뇌며 결의를 다졌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엔 조롱이를 보러 가자고 졸라야겠다. 

사막을 걸어 넘는 것도 괜찮으니까 꼭 사이좋게 깍지 손 끼고 가자고. 

푸흐,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간질거리고 기분이 좋아져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익― 산장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으로 산들산들한 바람이 불어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부드럽게 얼굴에 와 닿는 바람에 이름 모를 향긋한 꽃 내음이 섞여 있었다. 

“바람?”

이예주는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시 장벽으로 막혀 있는데 바람이 불 수가 있나? 

문이 조금 더 열리자 이번에는 강렬한 햇빛이 그녀의 눈을 덮쳤다.

“아!”

눈을 시리게 하는 빛에 이예주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새로 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역광 때문에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아픈 눈을 부릅떠서 보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있을 사람이야 시뻘건 눈을 가진 남자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예주는 그 이름을 부르며 완전히 문을 열었다.

“……람?”

서서히 밝은 빛에 익숙해질 때였다. 

“람, 거기서 뭐 하고…….”

역광으로 잘 보이지 않던 인영이 둘, 셋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시야가 완전히 돌아왔을 때쯤에는 수십에 이르게 되었다. 

산장 밖이 대낮처럼 환했다. 

아니다, 대낮처럼 환한 것이 아니라 대낮이었기 때문에 환한 것이었다. 

이예주는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치 근처에 낯선 흰색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슬이 맺힌 흰색 꽃잎이 그토록 기다렸던 태양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빛을 머금은 채 봉오리를 잔뜩 오므렸던 지난밤의 그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꽃이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군.

문득 귓가에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제야 어제가 사흘의 마지막 날이었고, 오늘이 개화기의 첫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원자님.”

활짝 핀 뤼미에르와는 반대로, 이예주의 얼굴 위로 선연히 배어 있던 미소는 저무는 꽃처럼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녀가 처음 람이라고 믿었던 그림자의 주인공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예주는 피하는 기색도 없이 초점 없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군복에 군모를 입은 남자는 얼굴에 커다란 군용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예주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막에서 뿔 나팔을 불어 히카톤 괴물을 불러냈던 뿔각 대장이었다.

내가 지금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건가? 

이건 그러니까, 람이 가슴 위에서 경고했던 꿈의 연장선인 건가? 

이예주는 멍하니 손을 들어 제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

아팠다. 눈물 나게 아팠다. 정말로 눈물이 나올 만큼. 

“구원자님,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람과 함께했던 지난 사흘이 꿈인 건가? 그가 너무 좋아서, 그랑 함께 있고 싶어서 자신이 깜빡 백일몽을 꾼 것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렇게 기억이 선명한데.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한데. 

동쪽 대륙에서 조롱이와 헤어진 후 남자와 함께 이곳에 갇혔다. 

그 후엔 남자와 함께 인면어를 잡아먹었다. 

악몽을 꿔서 남자에게 안겨 잠이 들고, 그와 처음으로 손을 잡았고, 다정하게 호수까지 걸어가서 물놀이도 했다. 

또, 남자와 키스도 대화도 했고…….

지난 사흘간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눈앞에 촤르르륵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생생한 걸 보아하니 지난 사흘이 꿈일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람이 자신을 두고 떠날 리가 없는데. 

“산장 너머 뤼미에르 꽃밭에 헬기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구원자님, 지금은 조금 혼란스럽겠지만 검은 파편이 없는 틈을 타 얼른 가셔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이예주를 재촉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람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가 자신을 두고 떠났다. 

람이 자신을 두고. 누군가 머리 위에서 찬물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손끝에서 아스라해지는 그 꿈 자락을 놓치기 싫었다.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손으로 잡고 꽉 움켜쥐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이 아니기에 제 손가락을 하나하나 억지로 펴 들어서 결국엔 놓아야만 하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구원자님.”

아니면 람이 너무 좋아서, 그와 너무 함께 있고 싶은 나머지 단잠에 빠진지도 모르고 지난 사흘간 그와 함께하는 달콤한 꿈을 꾸었던 것인지.

“구원자님, 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이예주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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