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주는 일순 알코올 기운까지 깰 만큼 소름이 확 끼치는 느낌에 흠칫했다.
슬며시 고개를 드니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가 자신을 오롯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 어, 어떻게 알았어요?”
이예주는 벌렁거리는 가슴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말을 더듬었다.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아랫입술을 쓸었다.
그 손길이 묘하게 끈적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삼켜 달라고 붉은 칠을 다 해 두었지 않아.”
“그, 그게 아니라요. 할 말이 있는데 그, 그게 맨정신으로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예주는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를 안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시야의 높낮이가 달라지자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녀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남자가 이끄는 대로 속수무책 끌려갔다.
“어어, 어으으어…….”
어으, 왜 이래. 하나도 안 취해 말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눈앞이 팽이처럼 팽글팽글 돌았다.
얼마나 도냐면 제가 지금 일어나서 뱅뱅 돌고 있는지, 산장이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뱅뱅 춤을 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누, 눈앞이 마구마구 도는데요. 어어, 어어…….”
몸이 자꾸만 흐느적흐느적 늘어졌다.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힘없이 남자의 품에 기대었다.
남자가 그녀를 아기처럼 보듬어 안았다.
이예주는 떨어지는 고개를 간신히 가누며 람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정갈했다.
언제나처럼 감정이 배제된 듯 무표정하고 경건하면서도 금욕적인, 그러면서도 섬뜩할 만큼 아름다운.
아무리 봐도 항시 보아 오던 것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얼굴인데. 불현듯 그의 얼굴에서 오싹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뭐가, 뭐가 달라 보이는데. 대체 뭐가…….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리며 평소와 다른 점을 찾던 그녀는 얼마 안 가 위화감의 원인을 찾았다.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람의 시뻘건 눈이, 그의 눈이.
“누, 눈이…… 눈이 이상한데요?”
혼란스러우면서도 몽롱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그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깨지기 쉬운 것을 만지듯 그의 눈매 근처를 엄지로 살살 쓸며 그녀는 웅얼거렸다.
“눈 색깔이…… 달라요.”
“어떻게?”
남자가 은근하게 물었다.
이예주는 제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남자의 얼굴 근처에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금방이라도 스칠 만큼 가까운 곳에 그의 입술이 있음에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눈이 피처럼…….”
“…….”
“눈이 왜 이렇게 붉어져서…… 아, 아니 원래 붉기는 했는데…….”
그의 눈이 이렇게 검붉었던가?
언뜻 보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주 미묘한 변화였다.
하지만 이예주는 바로 알았다.
그의 눈동자 색이 평소와 달리 더욱 짙어진 것을.
검정색과 붉은색 물감을 푹 떠서 하얀 팔레트 위에 덜어 섞으면 이런 검붉은 색이 나오려나.
그래, 검붉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자신을 씹어 먹을 것 같은 검붉음으로 활활 타올랐다.
딱히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두려워서 가슴이 덜컹거렸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
남자가 입술을 슬며시 벌렸다.
이예주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나를 유혹하고 있잖아.”
“그, 그게 무슨…….”
“음,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람의 표정이 꽃이 만개하듯 활짝 피었다.
이예주는 남자가 이토록 즐거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혹시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그의 새빨간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올라가 있었다.
야릇하면서도 기괴한 웃음이었다.
“그럴 필요 없겠군.”
그리고 찢어질듯 벌어진 그 빨간 입술이 순식간에 내려와 이예주를 한입에 삼켰다.
윗입술, 아랫입술, 들숨, 날숨할 것 없이 모조리.
그는 이성을 잃고 정신없이 그녀가 내쉬는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흐읏, 그만. 그만! 이예주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남자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그를 밀어내었다.
“헉, 헉…… 허윽…….”
이예주는 강제로 참아왔던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쉬었다.
하지만 거세게 뛰는 가슴을 진정도 시키기 전에 남자가 얼굴 위로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다.
예주야. 예주야. 꿈결처럼 람이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열기와 취기로 혼탁해진 눈으로 그의 부름에 멍하니 답했다.
“흐응…… 네. 네…….”
얼굴과 턱으로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 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남자의 손이 착실하게 목부터 채워져 있던 로브의 단추를 풀어 나가고 있음을, 그녀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보아하니, 결정은 내렸나?
혼몽한 머릿속에 산장 안으로 들어오기 전 결심했던 무언가가 안개처럼 스물 스물 떠올랐다.
그에게 정상으로 가지 않는 쪽으로 결정 내렸다고 말하기로 했는데.
그리고 다리족을 만나지도 않는다고도.
또 말하지 않았던 능력에 대해서도……
그러나 얼마 안 가 흐릿하고 형체 없던 그것들은 소리 소문 없이 흩어졌다.
“어어…… 으응…… 네, 네에…….”
이예주는 람의 물음에 웅얼거리는 소리만 내었다.
남자가 턱 끝에 촉, 하고 뽀뽀를 할 때마다 눈 두 덩이에 시큰하게 열이 올라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꼭 구름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상으로 가는 쪽이겠지? 너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니까.”
람은 작고 어여쁜 제 연인에게 속살거렸다.
“보낼 생각 없었는데. 어쩌면, 너도 가서 직접 보고 겪는 것이 낫겠지.”
“흐으…….”
“네가 만나려는 놈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악한 것들인지.”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이어 말했다.
“그것들이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너는 결국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 하고 놈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겠지. 과거는커녕 과거로 가는 법의 근처도 알아내지 못 할 것이야.”
“…….”
“왜냐면 놈들은 나만큼이나 인내심이 꽤 강하거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네가 결국 좌절하고 절망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네 힘을 빼앗기 위해…….”
남자는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너의 어여쁜 사지를 하나하나
람의 검붉은 눈과 이예주의 탁한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진득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 근처를 조심스럽게 쓸듯 매만지던 남자는 예고 없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헉!”
“너의 어여쁜 사지를 하나하나 게걸스럽게 뜯어 먹을 것이다. 그 놈들은 그렇게나 위험한 것들이지. 그러니.”
“…….”
“그러니 나를 선택해.”
남자가 시뻘건 입술 새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짓씹듯 내뱉었다.
“개화기가 끝나는 사흘간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니 내 인내심이 끊기기 전에, 내게로.”
“으응…….”
“돌아와, 예주야. 그렇지 않으면…….”
람은 고개를 돌릴 수 없게끔 강하게 붙잡고 있던 이예주의 턱을 찬찬히 놓아주었다.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지만, 검은 파편은 들끓는 음심을 꾹 눌러 참았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어여쁜 것이 통 째로 제 손아귀에 떨어지기까지…… 그러니 그 전까지는.
그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흉흉하게 노려보던 그는 눈빛을 거둬들이고, 어느 틈에 싹 낯을 바꾸었다.
감정 따윈 배제된 듯, 금욕적인 듯. 다시 무표정의 가면을 뒤집어쓴 람이 풀어 헤쳐진 인간 여자의 단추를 하나, 하나 채워주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상냥하게 당부했다.
“잊지 마, 예주야. 개화기가 끝날 때 까지다.”
* * *
가슴 끝이 따끔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모기가 문 것처럼 미미한 감각이었다.
이예주는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칼, 단정한 정수리가 보였다.
“라, 람?”
그녀의 경악어린 외침에 제 가슴에 찰싹 붙어 있던 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아쉽다는 듯 고개를 든 남자가 갑작스레 낯을 싸악 굳혔다.
“예주야, 사흘이다.”
“뭐, 뭐가요?”
“개화기가 끝나는 사흘 간 말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도록 하지.”
이예주는 남자가 하는 말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개화기가 끝나는 사흘은 또 뭐고, 그때까지 또 왜 기다리는 건데?
하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그는 자신의 할 말만 일방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니 잊지 마. 만약 그 안에 오지 않으면…….”
남자가 불현듯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검붉은 눈이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이예주는 더럭 겁이 났다.
“아! 뭐, 뭐 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네가 아는 모든 공간과 세상을. 그리고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너를…….”
람이 웃었다. 이를 활짝 드러낸 그는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해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웃는 얼굴의 남자는 한 자, 한 자 새기듯 내뱉었다.
“가질 것이야.”
“헉!”
이예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훤히 젖가슴을 내보였던 방금 전의 자신과는 다르게, 제 몸 위엔 포대 같은 두꺼운 로브의 단추가 목 끝까지 고이 채워져 있었다.
그제야 이예주는 방금 전의 그 망할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무슨 이런 미친 꿈을…….”
뒷머리를 매만지며 이예주는 중얼거렸다.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 꿈속의 람이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뭐 때문에 남자가 그렇게 활짝 웃었던 거지?
다시 꿈을 상기하던 그녀는 문득 조용한 실내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여전히 산장 안이었다. 그리고 산장 안에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람?”
으레 있어야 할 남자가 보이지 않자 이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편 침상을 보니 그는 일어난 지 오래인 듯 요와 모포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잠깐 밖에 나갔나? 람의 부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는 산장 중앙의 화덕까지 걸어갔다.
화덕에서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연기조차 나질 않는 것을 보니 모닥불도 꺼진 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잠들기 전에 그가 껐던가? 그러고 보니 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딸기를 잔뜩 집어 먹고 그에게 결정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산장 문을 박차고 들어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론 누군가 가위로 싹둑 잘라 낸 것처럼 기억이 끊겨 있었다.
“혹시 나 취해서 진상 부린 건 아니겠지……?”
이예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문했다.
다른 이와 술자리를 같이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제 주사가 뭔지 잘 몰랐다.
에이, 설마. 설마…… 이예주는 그런 무서운 생각 하지 말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황급히 불안함을 떨쳐 냈다.
그녀는 때마침 마룻바닥에 고이 접힌 채로 놓여 있는 옷가지를 발견했다.
어제 남자와 물놀이…… 아니, 일방적인 물고문을 당하느라 쫄딱 젖어 벗어 놓은 제 옷이었다.
뽀송뽀송 마른 옷에선 포근한 냄새가 났다.
“치. 이건 언제 이렇게 말려 놨대?”
뾰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모처럼 예쁜 짓을 한 남자 때문에 이예주의 입술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남자가 오기 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재빠르게 로브의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답답해서 목 부근의 단추는 두어 개 풀어 놓았던 것 같은데.
목 끝까지 틈 없이 꽉 채워져 있는 단추를 풀다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털썩, 겉에 둘렀던 로브를 벗어 던지고 상의에 팔을 꿰어 내리던 이예주는 별안간 천에 쓸린 왼쪽 가슴이 미친 듯이 따끔거리자 짧게 신음했다.
“아쓰! 뭐, 뭐지?”
그냥 넘기기엔 통증이 느껴진 부위가 심상치 않았다. 꿈에서 남자가 야살스럽게도 굴었던 게 이쪽이었던 같은데…….
“기, 기분 탓이겠지.”
다시 옷을 벗고 자세히 확인해 볼까 하다 관뒀다. 다시 로브를 걸치는데, 이상하게 주머니 쪽이 축축했다.
그 안에 손을 쑥 넣었다.
뭉그러진 딸기 즙으로 엉망진창일 주머니 속은 젖어 있었지만 찐득거리진 않았다.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자신이 술에 잔뜩 취해 주머니를 빨았던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의 제 행보를 더듬을 때였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산장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람과 자신밖에 없는 이곳에 이런 굉음이 들릴 리 없었다.
이예주는 로브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황급히 산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