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88)화 (189/319)

“……왜, 왜요?”

“네게 더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리족 놈들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속이 시커먼 것들이라 위험하다. 그것들보단 내 곁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해.”

“당신…… 곁?”

이예주는 멍하니 남자의 말을 따라 했다. 

당신, 당신 곁에 있으라고? 당신이 혐오하는 인간인 내가 있을 자리가, 당신 곁? 

하릴없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람에게로 향했다. 

그는 믿을 수 없어 하는 그녀에게 확인 사살 하듯 오만한 권력자의 표정으로 그렇게, 끝내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졌다.

“그래, 내 곁.”

툭, 투르르륵.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인면어 꼬치 끝이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람의 곁. 그의 곁에 있다 보면, 어쩌면 그도 자신을 어리고 멍청한 것 보듯 바라보지 않고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여자로 봐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한 번 떠올린 희망들은 날개를 활짝 펴 들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여자로 봐 준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데이트도 할 수 있을지 않을까. 그러면서 서서히 가까워지고, 마침내…….

“자, 잠깐만. 아, 갑자기 왜 이렇게 덥지.”

이예주가 확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더운 나머지 그와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휙 고갤 내려 피했다. 

람과 평범한 연애라니. 뭔가 생각만으로도 뒷목이랑 등허리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아, 안 되겠어!”

벌건 얼굴로 연신 ‘허, 참. 거참.’ 하고 추임새를 내뱉던 이예주가 느닷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녀는 결국 온몸에 퍼져 나가는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피신하듯 밖으로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후다닥, 람의 눈앞에서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제 앞에서 볼을 발그레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눈 깜짝할 새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인간 여자 때문에 람은 황담함을 금치 못했다.

“으어허허어!”

탁,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숨 막히던 산장 안에서와 다르게 산장 밖으로 나오니 숨이 탁 트였다. 

그러나 고조된 감정은 쉽게 식지 않았다. 

문이 꽉 닫힌 것을 확인한 이예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거기서! 거기서 왜 으으어…….”

거기서 왜 갑자기 볼을 붉히고 그래!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가던 자신을 황망히 쳐다보던 람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두근두근, 고동 소리가 바로 귀 옆에 들리는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을 해 대었다. 

후, 이러다 터질 것 같아. 정신 차려, 이예주! 그녀는 양손으로 제 뺨을 두어 번 내리치며 심호흡했다. 

“안 되겠어.”

그러다 부끄럼을 타던 낯을 달리하고 얼굴을 굳혔다. 

한순간에 결심이 섰다. 

“곁에 있어 달라고 했으니 곁에 있어 줘야겠어. 위, 위험하다고 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어.”

이예주는 이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가 저렇게 곁에 있어 달라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지 뭔지, 이름도 거창한 그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다리족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 또한. 

결정을 확 내리고 나니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참 기분이 오묘했다. 

아까는 분명 심각할 정도로 고민했던 것 같은데, 너무 한순간에 결정을 막 내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근데 결정했다고 얘기하려면 역시…….”

가지 않는다고 말을 꺼내면 남자는 필히 그 이유에 대해서도 물어볼 것이다. 

어찌 됐건 람은 자신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과 별개로 다리족들에 대해 속이는 것 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과 자신의 뿌리가 같은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어쩌면 그들의 정보력이 그녀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등등……. 

그에 반해 자신은 그에게 숨기기 바빴을 뿐, 솔직히 털어놓은 것이 별로 없다. 

좋아하고 곁에 있고 싶다고 갈망할 만큼 현재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행동은 생각과 모순되었다.

“……역시 느, 능력에 대해서도 말해야겠지?”

이예주는 흙이 묻은 맨발을 툭툭 털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울적했다. 다리족을 만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말하려면 능력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기야,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 대단한 능력도 아니거니와, 람의 면전에서 ‘문’을 넘다 보면 언제가 됐건 그가 눈치채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지금도 자신의 말의 어폐 하나 놓치지 않고 귀신처럼 숨기는 것이 있느냐 캐묻는 남자인데, 괜히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래, 결심했어!”

이예주는 두 주먹을 꾹 부여 쥐고 허공에 소리쳤다.

“그냥 말하는 거야! 뭐 어때? 여, 여긴 시간을 멈추는 사람들도 살고 동물이 인간으로 펑펑 변신해서 말도 하는 미친 세상인데.”

그런 것에 비하면 넌 평범 그 자체야, 예주야. 고작 죽기 전에 ‘문’을 넘는 것일 뿐인걸. 

자신을 세뇌하듯 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리라 결심했지만 막상 다시 들어가서 말하려니 떨렸다. 

이예주는 후후, 심호흡을 몇 번 하며 긴장한 몸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벌렁거리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흐어어엉! 그래도 맨정신으로는 못하겠어!”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을 쳐서 그런 걸까. 도저히 떨려서 입이 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소주라도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곳에 소주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술 비슷한 것은 동쪽 대륙 마을까지 가야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 

“알콜 딸기!”

이예주는 허겁지겁 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 넣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텃밭까지 가서 따 먹은 요물을.

둥글둥글한 왕 딸기 세 개가 그녀의 손에 딸려 나왔다. 

개중 두 개는 납작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훅 풍기는 단내와 함께 손이 딸기 물로 찐득찐득해지자 이예주가 ‘으’ 하고 인상을 썼다. 

안에 몇 알이 더 남았으니 주머니 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서, 설마 그 남자한테 냄새를 들키진 않았겠지? 에비. 그런 무서운 생각 따윈 애써 옆으로 치우며 이예주는 꺼내 든 왕 딸기들을 요리조리 살폈다.

람은 붉은 딸기에 알코올이 들어 있어 먹으면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알코올 맛은 별로 안 났던 것 같은데…….”

그녀는 잘 기억나지 않는 딸기 맛을 어물어물 떠올렸다. 

실은 제가 잠결에 진짜로 딸기를 먹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직도 꿈만 같았다. 

하지만 빨간 과육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던 손이 실제임을 증명했다.

이예주의 주량은 딱히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주변에 같이 먹어 줄 사람이 없어 술은 매번 혼자 마셨기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필름이 끊겼던 적도 딱 한 번밖에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은 고등학교 졸업식, 꽃다발 하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살아생전 모았다는 찬장의 양주들을 모조리 꺼내어 쏟아붓듯이 들이켰을 때.

아빠가 남긴 흔적이라면 끔찍하게 여겼던 엄마도 잊고 꿀꺽꿀꺽 병나발을 불었다. 

한 병을 간신히 비우고 그녀는 그대로 졸도했다. 

다시 깨어난 후엔 일주일을 꼬박 끔찍한 숙취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 알콜 딸기는…….

“……그러고 보니 숙취도 없고.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맛조차 알코올의 쓴 내 하나 없이 달달하기만 했던 것 같다. 

이예주는 감탄하는 눈으로 딸기를 내려다보았다. 

딸기는 요물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하나뿐인 구원이 되었다.

“좋았어. 몇 개 좀 주워 먹고 들어가서 말하면 될 거야.”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흐트러진 모양의 딸기들을 입에 쑤셔 넣었다. 

산뜻한 딸기 즙이 혀에 감돌았다. 이어서 강렬한 달콤함이 온 미각과 후각을 강탈했다.

“우어어어! 마, 맛있어.”

그녀는 감격에 젖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정신없이 딸기를 입안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손 위의 뭉그러진 딸기들이 다 사라졌다. 

과즙이 묻어 붉어진 손가락까지 쪽쪽 빨며 이예주는 아쉬워했다.

“하으, 더 먹고 싶어.”

이것은 알콜 딸기가 아닌 마약 딸기가 분명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주머니에는 몇 개의 딸기들이 더 남아 있었다. 꿈결에도 용케 그것들을 챙겨 놓은 자신이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과거의 나에게, 치얼쓰!”

이예주는 나머지 딸기를 모조리 꺼내 들었다. 

양손 가득 주머니에서 꺼내 들자 딸기의 수가 꽤 되었다. 

심각하게 뭉개져 찐득하게 달라붙은 과육들도 몇 개 있었지만 다행히도 멀쩡한 모양의 것이 더 많았다. 아직 설익어서 그런듯했다. 

내일은 호수에 가서 끈적해진 주머니를 씻어 내야겠다.

이 정도 수면 취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녀는 지체 없이 다시 딸기를 먹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다. 왜 이렇게 별로 취한 기분이 안 들지?”

결국 나머지 딸기들까지 남김 없이 씹어 먹은 이예주는 바로 돌지 않는 취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주 첫 잔을 비웠을 때처럼 속이 후끈해진 감각은 있는데 앞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상하리만치 흔들림 없이 멀쩡했다. 분명 알코올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하지만 취하든 취하지 않았든 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하는 것만은 변함없었다. 

이예주는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았다. 그러곤 거침없이 문을 발로 쾅 걷어찼다.

“바깥바람이 참 시원하니 좋구만요!”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산장의 등불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은 바깥의 서늘함에도 불구하고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만취 상태였던 것이다. 

남자가 당당하기 그지없는 그 행색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뭘 하느라 이렇게 늦게 들어온 것이지?”

“아! 그게요! 있잖아요, 람! 내가 당신한테 할 말이 있는데요! 헤헷!”

이예주는 배슬배슬 웃음을 터뜨리며 비척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취하지 않아 떨지 않고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제가 말할 게 있어요! 그러니까요, 끅!”

인간 여자가 비틀거리며 람에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걸음걸이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요오! 내가 당신한테 말할 것은요! 어어…….”

“조심……!”

람에게로 거의 도착했다고 생각한 그때, 갑작스레 바닥이 꿀렁거렸다. 

이예주는 우당쾅쾅 앞으로 넘어졌다. 

아니, 넘어질 뻔하던 찰나였다. 

람이 재빠르게 움직여서 쓰러지는 몸뚱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요행히 마룻바닥이 아닌 람의 가슴팍에 폭삭 처박혔다. 

들이받힌 이마가 아플 만도 하건대 인간 계집은 발딱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히히…… 나, 나 구해 준 거예요?”

“……하.”

“역시! 나를! 나를 구해 줬어! 아, 진짜. 너무 좋아요, 당신. 너무, 너무 좋아…….”

이예주는 감동을 한 주먹 집어 먹은 얼굴로 그의 가슴팍에 뜨끈한 볼을 마구 비볐다.

“취했군.”

람이 정확히 그녀의 상태를 파악했다. 

이예주는 과할 만큼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 아니에요! 취하긴요!”

“…….”

“그것보다 있잖아요…… 제가 말할 거는요. 그니까 내 능력이요…….”

“알코올이 들어 있는 것이니 먹지 말라고 분명 말해 뒀건만.”

문득 람이 바짝 고개를 숙였다. 

살랑살랑 닿는 날숨에 눈꺼풀이 간지러웠다.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몰래 먹었겠지?”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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