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예? 무, 무슨…….”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드니 가늠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영문 모를 소리에 눈만 끔뻑끔뻑 뜨고 있자 그림같이 잔잔하던 남자의 이마 위로 설핏 실금이 생겼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으로 갈지, 안 갈지에 대한 결정.”
헉. 이예주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3일간 생각해 보라고 했었는데.
바로 엊저녁에도 주고받은 말이 틀림없는데, 마치 옛날에 스치듯 주고받은 이야기처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망할, 어떡하지.
다리족과 뿌리가 같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난 후에 단 1퍼센트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혐오스럽고 무섭기만 한 다리족이 한국인이란 소릴 들으니 머리가 아파 와서 들던 생각조차 포기했다.
그녀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설마 멍청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은…….”
“아뇨! 그럴 리가요! 어, 어…… 했어요! 진짜 했어요! 대, 대충은…….”
이예주가 펄쩍 뛰며 부인했다.
그것이 비록 거짓일지라도 시뻘건 눈을 번뜩이는 남자의 앞이라면 그 누구든 자신과 같은 답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람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속으로는 달달달 떨면서도 겉으론 애써 웃자 그 가상한 노력을 알아보았는지 남자가 곧 시선을 거둬들이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예, 예. 그렇죠.”
그녀는 열렬히 동의하며 고개를 마주 끄덕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 이거 먹어도 되죠?”
그 결정이 어느 방향을 향한 것인지 물을까 봐 그녀는 얼른 화두를 돌렸다.
마침 인면어가 자르르 윤기를 흘리며 노릇노릇 구워진 참이었다.
남자가 묵묵히 걸쇠에 걸어 놓았던 인면어 꼬치를 들어 이예주에게 건넸다.
인면어 고기는 겉보기엔 그냥 큰 가시들이 박힌 생선의 단면처럼 보였다.
코를 들쑤시는 고소한 향에 사양 않고 람이 내미는 것을 얼른 받아 든 그녀는 모락모락 김이 솟는 고깃덩이를 후후 바람을 불어 식히다가 입으로 가져가 덥석 물었다.
그리고 앞니로 채 물기도 전에 내뱉으며 “허뜨뜨! 어뜨뜨!” 하고 경이로운 속도로 혀를 날름거리는 기교를 보였다.
“가서 과거의 흔적을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뜨거움을 무릅쓰고 인면어가 꿰인 꼬치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이예주는 천천히 람을 돌아보았다.
마치 들어선 안 될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녀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내, 내가…… 내가, 갔으면 좋겠어요?”
“가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던가?”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제 몫의 인면어를 물었다.
그녀는 정색을 하고 소리쳤다.
“아니요! 누가 그래요, 간다고?!”
“그럼 가지 않는 쪽인가?”
“그, 그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간다고 마음먹은 적 없단 말이에요. 이예주는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그 부정확한 태도에 남자가 후,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에 가져갔던 꼬치를 내려놓았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군.”
그가 단언했다. 이예주는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결정을 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전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고 뚜렷한 목표였던 것 같은데. 미친 듯이 자신이 살던 2017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각인과도 같이 눈에 선했던 목표가 지금은 자고 일어난 후 남은 꿈의 잔상처럼 아스라하게만 느껴졌다.
정말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다리족을 만나면, 과거로 돌아가서 엄마를 되살리고 꼬인 제 인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만약에 돌아가게 된다면, 그러면 그 후에 저 남자는?
이예주는 그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럽게 제 앞의 남자를 훔쳐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좋아 죽겠다고 생각한 사람과 이제 막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막 저 사람이 날 밀어내지 않게 되었는데.
과연 저 사람을 두고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걸 잊고 현실에 적응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러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보고 싶어지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것처럼 조롱이랑 저 남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미칠 것 같은 날에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을 아는데, 그땐 또 울부짖으며 아드득 까드득 밤을 지새워야 하는 건가?
당장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만으로도 이예주는 더럭 겁이 났다.
한때는 제 전부였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부정확하게만 느껴졌다.
잊고 있던 현실과 마주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갑작스레 엄습하는 무력감에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들고 있던 꼬치를 화덕에 걸쳐 놓았다.
그 모습을 빼놓지 않고 예의 주시하던 남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다리족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않던가.”
“……뭐가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네 능력. 다리족과 같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같지 않았다.
다리족이 어떤 능력을 쓰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저 달려서 도망을 치는 것이 그들의 능력이라면, 같기는커녕 그녀의 것과는 본질부터가 다른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은 그들과 같은 일족이라 거짓말을 한 데다, 후에도 능력을 숨기기 위해 다리족과 비슷하단 연막을 잔뜩 쳐 놓아 버렸다.
이예주는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음이 답답했다.
그러나 남자가 그보다 더 환장할 소리를 해 댈 줄, 그녀는 미처 몰랐다.
“너와 같은 뿌리의 인종에, 같은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어쩌면 네게는 나보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위의 인간들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화덕 위의 불길을 바라보며 점차 몽롱해지던 정신이 찬물을 들이부은 듯 번쩍 깼다.
뭐, 뭐가 어쩌고 저째? 같다고? 그 식인이나 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허.
이예주는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인간들이랑 하나도 안 같아요! 하나도 안 같은데 뭐가 도움이 돼요!”
“너와 뿌리와 능력이 같으니 그럼 결국…….”
“같지 않아요! 뭐가 같아요! 뿌린지 뭔지는 같을지 몰라도 그것 빼곤 다 틀려요! 어딜 봐서 그놈들이랑 같……!”
“같지 않으면?”
람이 차가운 얼굴로 이예주의 말을 끊었다.
“그럼 뭐가 다르지?”
“…….”
아차 싶어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다리족이 더 도움이 될 것이란 그의 말에 화가 난 나머지 실언을 해 버렸다.
이게 아닌데. 남자는 제가 가진 능력이 다리족과 같이 도망을 잘 치는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다.
방금 전 자신은 그에게 그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거하게 광고를 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예주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제발 그냥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귀신같이 말의 어폐를 잡아낸 남자는 이미 시뻘건 동공을 빛내며 그녀를 서슬 퍼렇게 노려보고 있었다.
“내게 네 능력에 대해 더 숨기고 있는 것이 있나?”
팔족들이 사는 서쪽 대륙, 시간이 멈춘 땅을 빠져 나오면서 남자가 수차례 물었던 질문이었다.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미래로 가는 능력, 그것이 이예주의 능력이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수차례 아니라는 답을 내놓았다.
뇌를 거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거짓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수없이 되뇌던 것이었고, 또 실제로도 매번 그런 식으로 위기를 잘 넘겼다.
누군가 네가 남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고 직접적으로 물으면 지체 없이 아니라고 답하도록 수백 번 다짐하다 보니,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 게 버릇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나라하다 싶을 만큼 자신의 얼굴에 내리꽂힌 시선에 이예주는 이번만큼은 곧바로 거짓을 토해 낼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람에게 사실을 말해야 할까? 아니야, 아니야. 그러다 믿지 않으면, 별 미친 소리를 다 하는 또라이를 봤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면.
혹시 능력을 듣고 자신을 시간족이 보낸 첩자라고 오해라도 한다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도 없으리라.
짧은 사이 무수히 많은 고민과 갈등이 이예주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해야 하나, 해야 하나! 으으!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고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뇨. 아뇨. 아뇨!”
그의 질문으로부터 꽤 오랜 간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수, 숨기고 있는 게 있다뇨! 어, 없어요, 그런 거! 그런 거 진짜 없다고 했잖아요…….”
말끝을 흐리는 이예주는 거의 울기 직전과도 같았다.
속사포처럼 빠르게 거짓말을 내뱉은 그녀는 그 후 덮쳐 오는 탈력감에 내려놓았던 인면어 꼬치를 다시 들어 와구와구 베어 먹었다.
고깃덩이는 그새 조금 식어 딱 먹기 좋을 만한 온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맛있어 보이던 것과는 달리, 막상 입안에 들어온 살코기는 모래를 씹어 먹는 것처럼 꺼끌꺼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로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예주는 오랜만에 찾아온 이 침묵이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무거운 목소리에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면 그들과 넌 대체 뭐가 다른 것이지?”
“그, 그거야…… 그 사람들은 시간족이고 저는 그런 게 아니니까…….”
“…….”
“저는 신인류 안 먹어요! 그리고 시, 식인도 안 하구요. 어, 그리고요. 또…….”
그녀는 우물쭈물 변명했다.
또 다른 점을 들며 열심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지만, 그만하면 됐다는 듯 남자가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그렇죠!”
이예주는 그를 따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지! 다르고말고.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지만, 그놈들은 신인류를 잡아먹고 같은 종족도 먹는 무지막지한 놈들인걸!
이 정도면 남자도 납득했겠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납득하지 않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그렇게 정리하자 심각하고 불안정했던 자신도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사라졌던 후각과 입맛이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고깃덩이를 본격적으로 뜯기 시작했다.
입을 벌려 살점을 가득 욱여넣으니 인면어 특유의 짭조름한 맛과 부드러운 육질이 어우러져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그녀는 그야말로 와구와구, 게걸스럽게 제 앞의 저녁 식사를 해치웠다.
“같지 않고 다르다라…….”
남자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무아구어?” 하고 입안 가득 음식물을 넣고 으적으적 씹으며 그녀가 되물었지만, “입 다물고 처먹어.”라는 싸늘하기 짝이 없는 타박만 돌아왔다.
이예주는 시무룩해져서 남자에게 신경 끄고 열심히 밥이나 먹기로 결심했다.
순식간에 꼬치 하나를 해치우고 다른 꼬치를 또 하나 집어 들었을 무렵, 남자가 끝나지 않은 문제를 다시 한 번 질질 끌고 왔다.
“어쨌든 네가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으니 변함없이 제자리군.”
하, 제발 그만 말하고 밥 좀 먹자고. 먹고 얘기하자고!
이예주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무시하고 제 밥을 먹으려 했다.
하지만 섬뜩한 눈으로 저를 보는 남자 때문에 꼬치를 들었던 손을 스르륵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인면어가 꿰인 나뭇가지 끝을 허술하게 붙잡고 불량스럽게 건들거림으로써 불만을 표출했다.
“……예, 그렇죠. 결정을 내려야 하긴 하는데요. 빨리 내려야 하는 것도 잘 알겠고요. 근데요, 밥은 좀 먹고 결론을…….”
“네가 산의 정상으로 갔으면 좋겠냐고 물었던가?”
말 좀 끊지 마, 이 자식아!
아까부터 번번이 말을 끊는 남자의 태도를 생각하며 이예주가 지그시 분을 삭였다.
그렇지만 일그러지는 자신의 얼굴이 놈에게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솔직히요.”
“……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위태롭게 흔들리던 꼬치 끝이 뚝 멈췄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숨을 쉬는 것조차 까먹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