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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86)화 (187/319)

믿을 수 없게도 대왕 딸기의 윗부분에 커다란 눈동자가 달려 있었다. 

그 올망졸망한 눈동자에서 달큼한 냄새를 풍기는 핑크빛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흑, 흑흑. 어허엉! 예주야.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왜, 왜 그래 딸기야! 왜 울고 있어? 우, 울지 마!”

서럽게 우는 대왕 딸기를 보자니 이예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달래 주려 했지만 대왕 딸기는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내가 바로 네 손에 있었는데! 나보다 그 시뻘건 미친놈이 중요한 거야? 그런 거니?”

“무, 무슨 소리야? 시뻘건 미친놈이라니? 라, 람 말이야?”

“그래! 그 시뻘건 미친놈 말을 듣고 바로 날 버렸잖아? 흐흑, 난 네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새벽에 몰래 나와 정원에서 날 따 먹었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난 그래도 한마디 않고 넘어갔는데, 흑. 그런데 넌 어떻게 나를…… 나를……!”

“아, 아니!”

새벽에 몰래 나와 널 따 먹었다니! 그,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꼭 쓰레기가 된 기분이잖아. 

서럽게 우는 대왕 딸기의 말에 이예주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긴 했다. 

딸기 철만 되면 집 앞마당에서 덜 익은 딸기를 엄마 몰래 따 먹느라 바빴다. 

또 람의 말을 듣고 애써 따 왔던 딸기들을 눈물을 머금고 버린 것도 맞았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이예주는 딸기에게 정말로 미안해졌다. 

자신에게 얼마나 서운했으면 이렇게 대왕 딸기가 돼서 울고 있을까. 

“미안해, 대왕 딸기야. 내, 내가 잘못했어.”

“으흐흑, 쿨쩍. 정말? 정말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이예주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내가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딸기야!”

“그러면 내 부탁을 들어 줘.”

“응? 부탁이 뭔데?”

딸기의 부탁에 이예주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대왕 딸기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디, 나를 다시 따 먹어 줘.”

“뭐, 뭐? 너를?”

“그래, 나를! 나를 따 먹어 줘, 예주야! 예주야, 제발. 네가 나를 먹어 주지 않으니까 나 죽을 것 같아.”

“따, 딸기야…….”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덩달아 딸기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망설일 때쯤, 손을 잡고 있던 딸기가 점점 자가 복제하기 시작했다. 

대왕 딸기들이 순식간에 증식했다.

“우린 준비됐어! 이제 너만 준비하면 돼.”

딸기들의 커다란 눈동자는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예주야, 부디 우리를 어서 따 먹어 줘…….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덩달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그녀는 수많은 대왕 딸기들을 따 먹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딸기들을 먹을수록 꼭 술을 마시는 것처럼 눈앞이 뱅뱅 돌았다. 얼큰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예주는 계속해서 딸기를 먹었다. 

계속, 계속. 너무 많이 먹어서 입 주변과 손가락 끝이 빨갛게 물들 만큼. 

람이 산장으로 돌아왔을 때 인간 여자는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도 깨지 않고 화덕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여전히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를 돌아본 람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나가기 전, 분명 침상 위에 옮겨 놓았던 것 같은데 언제 기어 내려온 것인지. 참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녀를 깨우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던 람은 풍겨 오는 희미한 향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것은…… 그의 얼굴 근육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이게 대체…….”

잠깐 밖을 둘러보고 오는 사이 대체 무슨 짓거릴 하고 다닌 걸까. 가까이에서 본 인간 여자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입가와 손끝에 붉은 과즙을 묻힌 그녀에게서 달착지근하면서도 시큼털털한 냄새가 풀풀 풍겨 나왔다. 

“허.”

이 발칙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람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인간 여자를 흔들었다.

“일어나.”

“……흐으응.”

저를 깨우는 험한 손길에 인간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칭얼거렸다. 

잠버릇이 험해 로브는 허벅지까지 훤히 말려 올라가 있었다. 

드러난 하얀 속살에 남자가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어린것이 방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 

그는 전보다 조금 더 거친 손으로 제 앞의 계집을 흔들었다. 

“일어나래도.” 

“으응, 싫어. 조금만…….”

“스읍, 밥은 먹고 자야 할 것 아닌가.”

인간 여자는 좀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람은 결국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그녀의 얄팍한 어깨를 와득 움켜쥐고 엎어진 상체를 강제로 일으켰다.

“으어어어…….”

자의 아닌 타의에 의해 몸이 쑤욱 일으켜지는 느낌에 이예주는 더 이상 편히 잘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눈을 부스스 떴다. 

“……람?”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이 주위를 한 바퀴 주욱 둘러보다가 정면을 향해 고정되었다. 

마지막 대왕 딸기에게만 조심스럽게 알려 준 제 짝남이 시뻘건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언제 왔어요?”

“좀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이예주는 여전히 비몽사몽해서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디 갔다 왔는데요? 기다렸잖아요…….”

“기다린 것치곤 코까지 골며 태평하게도 잘 자던데.”

“그럴 리가요.”

코를 골았다고? 말도 안 돼. 그의 차가운 어투에 이번엔 잠이 좀 깼다.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온다고 했지 않아.”

“그랬어요? 못 들었는데…….”

“후.”

느릿느릿 답하는 인간 여자 때문에 남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인간 여자의 눈꺼풀 끝이 또 감길 듯 말 듯 내려앉았다. 

그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답답한 노릇이군. 자지 마.”

“어으…… 잠…… 잠 와요.”

“자면 저녁 굶긴다.”

“안 잘게요.”

삽시간에 이예주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다. 

아니, 뜨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람의 눈엔 여전히 반쯤 감겨 있는 눈과 진배없었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람은 이예주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예주의 멍한 눈이 그를 뒤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산장 구석으로 걸어가 부엌 한편에 걸려 있는 마른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그녀에게 그것을 건넸다.

“손이랑 발이나 좀 닦지.”

채 건네받기도 전에 던지듯 수건을 내려놓은 남자는 다시 휙 돌아 부엌 쪽으로 멀어졌다. 

어쩐지 람이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에 이예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화가 난 거지? 내가 잠꼬대로 혹시 욕이라도 했나? 

뇌 속에 뿌연 안개가 들어찬 듯이 혼몽했음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답을 찾았지만, 그가 왜 화가 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까 호숫가에서 빡빡 씻지 않았나. 손이랑 발은 왜 또 닦으라고…….

무심결에 남자가 던져 놓은 마른 수건을 집어 들던 이예주는 벌건 물이 든 제 손가락 끝을 보고 기염을 토했다.

“헐! 이, 이게 뭐야?”

머릿속을 몽롱하게 하던 잠이 화다닥 달아나는 것 같았다. 

자, 자는 사이에 누구 간이라도 빼먹었나? 왜 손가락이……. 

손을 내려다보며 마구 흔들리던 이예주의 동공이 또 다른 것을 발견하고 경악에 가득 찼다. 

시커멓고 튀튀한 제 발 때문이었다. 

대체 자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맨둥맨둥했던 제 뽀얀 발바닥에 흙과 풀잎이 마구 엉겨 붙어 있었다. 

“이, 이게…….”

발을 더 자세히 내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이예주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데구루루 굴러 떨어졌다. 

응? 뭐가…….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딸기였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문득 꿈 같은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륵 스쳐 지나갔다. 

꿈에서 대왕 딸기를 만났다. 그 후 딸기가 자가 증식했고, 그 후엔 미친년처럼 그것들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는데…… 

꿈이, 꿈이 아니었던가?

“미, 미쳤…….”

저도 모르게 파들파들 떨며 새된 비명을 지르려던 그녀는 순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허겁지겁 람을 돌아보았다. 

천만다행으로 남자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부엌 찬장을 열고 뭔가를 뒤지고 있었다. 

이예주는 다급하게 떨어진 딸기들을 허겁지겁 주머니에 담았다. 

이 망할 것! 대왕 딸기가 자신을 홀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몽유병처럼 텃밭까지 나가 딸기를 주워 먹을 리가……!

그녀는 이어서 그가 던져 준 마른 수건으로 딸기 물이 잔뜩 든 손가락부터 닦아 냈다. 

어찌 됐건 빨리 증거를 없애는 것이 시급했다. 

남자가 알면 어떤 역정이 떨어질까 두려웠다. 

손에 묻은 딸기 과육들을 닦아 내자 하얀 수건에 금세 빨간 물이 들었다. 

더러운 발도 마저 닦아 냈지만, 그녀는 끝내 알지 못했다. 

엄마 립스틱을 훔쳐 바른 어린 여자아이처럼 손뿐만이 아니라 입술 또한 불그죽죽하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든 것을 닦은 후 재빨리 침상 밑에 수건을 숨기며, 이예주는 완전범죄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부엌 찬장에서 몇 덩이의 인면어 조각을 그릇에 담아 왔다. 

“어, 어디서 난 거예요? 혹시 또 잡았어요?”

갑작스럽게 생긴 인면어에 이예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워했다. 

남자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나뭇가지에 인면어를 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심드렁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광대 같군.”

“엥? 광대요? 누가요?”

어디서 가져왔냐고 물었는데 무슨 소리야? 

그가 붉은 칠을 잔뜩 해 놓은 입 주위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이예주는 여전히 말똥말똥한 눈으로 람을 쳐다보았다. 

그사이 대여섯 조각의 인면어 살덩이가 모두 나뭇가지 중간에 꿰어졌다. 

그는 화덕 위의 걸이에 나뭇가지들을 얹어 놓으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줬다.

“엊저녁에 혹시 다 먹지 못할까 봐 몇 개 넣지 않았던 것들인데. 다 넣었으면 큰일 날 뻔했겠군.”

“왜요?”

“왜긴, 안 그랬으면 벌써 동이 났겠지. 그러면 하루 종일 밥 달라고 꿀꿀댈 것이 아니냐.”

망할 놈.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지극히 맞는 말이라 이예주는 참았다. 

남자가 화덕 안에서 꺼져 가는 불씨를 살리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손아래 모닥불이 장작을 태우며 다시금 활활 치솟았다. 

닿을 듯 말 듯 일렁이는 불의 끝자락에 인면어의 허연 살점이 지글지글 구워졌다. 

비리면서도 고소한 특유의 냄새가 폴폴 피어나 산장 안을 가득 채웠다. 

목 끝까지 차오를 만큼 많은 양의 딸기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몰려왔다. 

어제 국을 마실 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담백한 맛과는 다르게 고기 자체에 기름기가 꽤 많은 듯 익어 가는 살덩이에서 연신 기름방울이 떨어져 타닥타닥 불꽃이 튀었다. 

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몸을 흔들흔들하자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군.”

“……예? 마, 마지막이요?”

“그래, 내일 낮이면 개화기가 시작되니까. 뿌리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장벽도 없어질 것이다.”

인면어가 익기를 기분 좋게 기다리고 있던 이예주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헐. 이곳에 갇힌 지 벌써 사흘이 됐단 말이야? 

믿기지 않을 만큼 빨리 흘러가 버린 시간에 그녀는 멍하니 지난 사흘을 돌아보았다. 

온종일 껌껌한 밤 속에서 생활했기에 시간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다. 

극지방의 어느 지역은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가 있다는데, 그렇다면 여긴 흑주(黑晝) 지역인 것인가. 

이예주는 기분이 뒤숭숭했다. 이곳에서 나가면 또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생각하니 갑자기 눈앞이 아득하고 깜깜했다. 

정말이지, 제가 봐도 구제불능이 틀림없다고 생각될 만큼 자신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인지한 탓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녀의 머리맡으로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결정은 내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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