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
문을 열고 산장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본 이예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얼굴을 어떻게 마주할지 걱정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반갑기 그지없었다.
한순간에 환해진 얼굴로 그의 앞에 쪼르륵 다가서자, 남자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혼자선 불도 켤 줄 모르는 것인가?”
“예? 어, 어…….”
그는 좋지 않은 기세로 그녀를 쌩하니 스쳐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냉정한 태도에 이예주는 당황했다.
남자의 손에는 그녀가 줄행랑을 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겉옷과 약초 가루가 든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대충 침상 위에 내려놓은 람은 방향을 바꿔 화덕 쪽으로 걸어갔다.
타닥타닥, 얼마 안 가 나무 타는 소리와 함께 화덕에 불이 피어올랐다.
산장 안이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따듯한 온기에 좀 살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다.
“벗어.”
“……네? 뭐, 뭐라고요?”
“옷, 벗으라고.”
“오, 옷이요?”
이예주가 커다랗게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남자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한 번 말할 때 좀 들어 처먹으라고 했을 텐데.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남자가 그녀를 향해 불쑥 손을 뻗었다.
호, 혹시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때리기라도 하려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마를 알싸하게 타격하는 고통은 없었다. 대신 따스한 손바닥이 이마를 감쌌다.
“미열이 있군.”
이예주는 스르륵 눈을 떴다. 남자의 시뻘건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제 얼굴이 오롯이 비치는 그의 눈동자에 아까 전 호숫가에서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착각이지. 람이 어떻게 자신을 애틋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인간 여자 때문에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예주는 조금 속상해서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으…… 뭐가요.”
“벌벌 떨지만 말고 옷을 벗고 있던가, 모포라도 두르고 있었어야지.”
“저, 젖을까 봐요…….”
“그러다 앓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람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여 벌컥 화를 냈다.
이예주는 좀 전보다 더욱 놀라 토끼 눈을 떴다.
남자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그의 빨간 눈동자에 노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래 봤자 감기 좀 걸리는데…….”
“다친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만, 인간의 모든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더군다나 인간이고 동물이고 추위에 노출된 약한 것들이 매년 수십, 수백씩 손쓸 틈 없이 죽어 버리지. 열병에 걸려 끙끙 앓다가 죽어 버리면 그때 가서 젖을까 봐 어쩔 수 없었단 소리나 하고 있을 것인가? 응?”
“벗을게요!”
알 수 없는 이유로 분기탱천해서 눈을 부라리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두 손을 들고 외쳤다.
“옷 벗을 테니까 화내지 마요.”
화내는 거 무섭단 말이에요……. 이예주는 울먹거리며 남자를 진정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금방 백기를 든 그녀의 수가 먹혔는지 남자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부엌 한구석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저기 가서 벗고, 저거 걸쳐.”
그의 손가락 끝에는 커다란 물동이가 있었다.
사방이 트여 있는 산장 안에서 유일하게 몸을 숨길 만한 곳이었다.
그는 이어서 침상 위에 대충 던져 둔 두터운 로브를 가리켰다.
벗어난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다시 포대 같은 차림새로 돌아가야 한다니!
애통했지만 축축한 옷을 계속 입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이예주는 군말 없이 남자의 명령을 이행했다.
“저, 저 나가요.”
물동이 뒤에 쭈그려 앉아 젖은 옷을 벗은 그녀가 로브의 앞을 손으로 꽉 여민 채 고개를 쑥 빼내고 조심스럽게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람은 미동 없이 쇠꼬챙이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이예주는 선뜻 그의 옆으로 가지 못했다.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이었기 때문이다.
로브가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길이여서 그 아래로 맨 종아리가 훤히 보였다.
이거…… 너무 야한 거 아닌가?
어디 단추라도 안 잠근 곳이 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제 차림새를 훑던 이예주는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헉.”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걸까.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 이예주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 이래서야 물동이 뒤에서 버틸 수도 없잖아.
그녀는 화덕이 있는 산장 중앙으로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이리 와.”
그의 반대편 침상에 앉으려고 했지만, 남자가 제 옆 바닥을 내리치는 바람에 그도 할 수 없었다.
아, 왜 또. 로브 안쪽으로는 헐벗었다는 게 창피했지만 그녀는 별수 없이 화덕을 빙 돌아 남자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뻘쭘한 맨발이 마침내 남자의 옆에 도달했을 때, 그가 제 옆을 슬쩍 턱짓하며 말했다.
“앉아.”
“예.”
이예주는 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살포시 엉덩이를 댔다.
남자가 훌쩍 다가와 그녀의 위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어. 어…….”
그가 모포 끝을 묶어 망토와 같은 모양새를 만들 때까지 이예주는 그저 바보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섬세한 손길로 여러 번 모포를 여며 준 남자는 이내 그녀의 어깨를 꾹 눌러 자리 잡게 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 앉아 따뜻한 불을 쬐자 그가 또 훌쩍 일어났다.
“어디 가게요?”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덥석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부끄럼 따윈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그냥 옆에 같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옷이 마를 때까지라도.
제가 앉자마자 떠나려는 람 때문에 불안증이 돋은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솥을 가지러.”
“솥이요? 솥은 왜요?”
그는 대답 없이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아차 할 새 없이 그를 놓쳐 버린 이예주는 먹이를 구하러 간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처럼 그의 행보를 눈으로 졸졸졸 좇았다.
람은 부엌 찬장에서 인면어 국을 끓이는 데 사용했던 쇠솥을 꺼냈다.
그리고 물동이에서 물을 두어 번 퍼서 그 안에 담은 후, 그녀가 있는 화덕 앞으로 돌아왔다.
“그건 뭐하려고요?”
“물을 끓일 것인데.”
“이 솥으로요?”
그는 말없이 화덕 위 걸쇠에 솥의 손잡이를 걸었다.
멍하니 그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퍼뜩 그 솥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그 솥은……!”
세면용으로 쓰는 것이라 추측되는 가루로 닦은 솥이 아닌가!
샴푸나 비누 비슷한 걸로 닦은 그릇으로 끓인 물을 마셔야 한다니!
그녀는 다급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이 솥은 싫은데요!”
“물을 끓일 만한 그릇은 이것뿐이다.”
“그럼 저는 물 안 마실게요.”
그 순간 람이 이예주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며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친히 떠먹여 줄 수밖에.”
그녀는 그때까지 람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남자가 다시 벌떡 일어나 솥과 같이 닦았던 숟가락을 가지고 오자 산산조각 났다.
먹으려면 너나 먹어! 이예주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남자의 팔이 더 빨랐다.
후드 끝이 붙잡혀 컥 소리 날 만큼 목이 죄이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남자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안겼다기보단 제압당한 것이지만.
“흐, 흐헉! 놔요, 놔요!”
“아 해.”
김이 솔솔 나는 물을 뜬 나무 숟가락이 입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기다렸다는 듯 숟가락이 입술을 비집고 쑤셔 넣어졌다.
이예주는 울며 남자가 떠먹여 주는 물을 삼켰다.
결국 그녀는 그가 후후 불어 떠먹여 준 끓인 물 한 솥을 다 비울 때까지, 온몸을 꽉 옥죄는 람이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 *
뜨거운 물을 한가득 들이켜니 얼어붙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여전히 남자의 품에 안긴 이예주는 병든 닭처럼 꾸뻑꾸뻑 졸았다.
모닥불이 뿜어 대는 열기가 따끈하니, 딱 알맞았다.
앞부분만 불을 쐬다 보면 자칫 뒷면이 시릴 수도 있는데, 등 뒤에는 태산 같은 남자가 버티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완벽하게 온기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때 불현듯 이예주를 보듬어 안고 있던 람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조느라 머리를 규칙적으로 흔드는 여자를 깨웠다.
“예주야.”
정신없이 졸고 있던 자신을 살살 흔드는 손짓에 이예주는 힘겹게 눈을 부스스 떴다.
람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그가 빨간 입술을 열어 뭐라고 말을 걸었다.
“가시 장벽 너머에서 인간의 기척이 느껴진다. 뿌리를 뚫으려 하는 것 같군.”
“예, 예……?”
그러나 물에 얼굴을 푹 담그고 있는 것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웅웅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예주는 잠에 빠져 허우적대며 버벅거렸다.
그 덜떨어진 모습에도 람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잠시 바깥을 둘러보고 오지. 어디 가지 말고 산장 안에만 있어야 한다.”
응? 예주야. 예주야. 람이 여러 번 당부했지만, 잠에 취한 그녀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제 품에 있음에도 머리를 바닥에 처박을 듯이 절을 하고 있는 인간 여자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안은 자세 그대로 그녀를 번쩍 들어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타인에게 덜렁 들려 움직이고 있는 것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졌는지 인간 여자는 침상 위에 올려놓은 후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게 물놀이를 한답시고 난리를 피우더니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군.
그녀의 얼굴 위에 흐드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람은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덜컥하고 산장 문을 열고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불분명한 방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
화덕의 온기가 밴 듯했던 웃음기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탁, 산장 문이 닫히고 훈훈한 내부에는 도롱도롱 잠에 빠진 이예주만이 남겨졌다.
* * *
이예주는 꿈을 꿨다.
꿈에서 자신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정경인가 싶더라니, 산장 뒤편에서 호수까지의 길이었다.
그때였다.
숲길의 끝처럼 보이는 멀찍한 곳에 있는 커다랗고 둥그런 형상이 보인 것은.
이예주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흑, 흑…… 으흑…….”
꼭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저 둥그런 게 울고 있는 건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둥실둥실한 것의 바로 앞에 다가섰을 무렵,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슬쩍 건드렸다.
“저기 왜 우니?”
그러자 그것이 서서히 뒤로 돌아 이예주를 마주했다.
“헉! 너, 너는!”
이예주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렸다.
그 거대한 풍채와 선명한 색감에 놀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박. 어떻게, 어떻게!
“너, 너는 대왕 딸기……!”
그렇다. 숲길 한가운데에서 엉엉 울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대왕 딸기였던 것이다.
새큼하고 달큼한 딸기향이 이예주의 콧속으로 훅 풍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