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84)화 (185/319)

이예주는 깜짝 놀라 눈을 들어 올렸다. 

시뻘건 눈동자가 코앞에 위치해 있었다. 

“울면 못난이 같다고 했지 않아.”

람의 엄지손가락이 살살 눈가를 쓸었다. 

눈물은 아까 전에 이미 말라 있었다. 

훌쩍거리는 것은 줄줄 흐르는 콧물 때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속을 휩쓸고 다니던 분노와 비통함 등으로 뒤범벅된 감정들이 뚝 멈췄다. 

서늘한 눈두덩이 위에 남자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꽃이 피듯 열기가 피어났다. 

얼굴을 닦아 주는 남자의 눈이 꼭, 애틋함을…… 

중요한 것을 바라보듯이 애틋함을 품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착각하는 거지. 그럴 리 없는데. 

이예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남자의 손이 루돌프처럼 빨개진 코밑까지 사붓사붓 내려왔다. 

“아, 아니, 여기는…….”

콧물까진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로 그녀가 황급히 몸을 사렸지만, 이미 인중 한가운데에 닿은 남자의 손가락을 막을 수 없었다. 

더럽지도 않은지 거리낌 없이 잘도 닦아 내며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코밑이 어느새 따뜻해졌다.

“원한다면 물을 뿌릴 수 있도록 해 주지.”

“……예? 예?!”

물을 빨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체온 조절까지 가능하다니. 

멍하니 남자의 해괴한 능력 목록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을 때였다. 

남자의 말에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어, 어디다가요?”

“네가 원하는 아무 곳이나. 한 번 맞아 줄 테니 이번엔 눈 크게 뜨고 정확히 뿌려. 엄한 곳에 뿌리지 말고.”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남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번 맞아 준다고?

“왜요?”

“뭐?”

“왜, 왜 맞아 줘요?”

“내가 젖지 않았다고 방금 전까지 빽빽 울어 대지 않았나?”

왜 그런 이상한 것을 묻느냐는 듯 여상한 목소리였다.

이 자식, 그건…… 그게 아니야! 그건 복합적인 감정에서였지, 단순히 물싸움에서 패배해 운 것은…… 

불현듯 이예주는 무서워졌다. 

일이 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질질 짜고, 대충 해결 보고 가지.”

람은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양옆으로 펼쳐 들었다. 

어디 한번 네 마음껏 해 보라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제가 말도 안 되는 떼를 썼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냉정하게 읊조렸다.

“그러면 눈 감으시죠.”

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러면 헤벌쭉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네놈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예주는 이것이 남자가 준 처음이자 마지막 복수의 기회란 것을 직감했다. 

자신의 방자한 어투에도 람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이건 얼굴에다 뿌려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이겠지? 흐흐. 

이예주는 이를 사리물었다. 

“꽉, 감는 게 좋을 거예요…….”

한 번 더 말을 건네며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양껏 물을 펐다. 

더 많이 풀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서러웠다. 

이럴 때 손이 양동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예주는 서둘러 남자의 얼굴에 차가운 호수 물을 끼얹으려고 했다. 

온 힘을 다해서 풀 스윙을 하려고,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그럴 수 없었다. 

……람이 눈을 감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남자의 눈 아래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른 아침, 잠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오랜 시간 훔쳐보았을 때처럼.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눈썹에서 억지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이예주는 그 입술이 얼마나 보드랍고 따스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입술 새로 나오는 숨이 얼마나 달게 느껴지……. 

‘아냐!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이예주!’

이예주는 파드득 도리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손에 담고 있던 물의 절반 이상이 넘쳐흐르고,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색이 되어 람을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도 물방울 몇 점이 튀어 있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담았던 물을 버리고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더듬었다. 

물방울을 닦아 주기 위함이었으나, 물 묻은 손으로 닦아 봤자 더 많은 물이 묻어날 뿐이었다. 

그 난리를 치는데도 남자는 꿈쩍도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예주는 마침내 남자의 면상에 물 싸대기를 갈기는 것을 포기하고 울상을 지었다.

“왜…….” 

눈 감으랬다고 왜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는 거야. 사람 마음 약해지게. 자꾸 사람만 마음을 들쑤시고.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이예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합리화를 했다. 

일부러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이러는 거야. 내가 못할 줄 알고. 물을 못 뿌리게 하려고. 

하지만 억지로 중얼거리는 머리와는 달리 그녀는 홀린 듯이 눈을 감았다. 

물속에 푹 잠겨 있는 발에 힘을 줘서 까치발을 들었을 때. 이예주는 제가 요망한 요물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방울을 닦아 준답시고 이미 남자의 얼굴을 잡고 있던 탓에 조준점에 닿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컹한 감각과 따스한 날숨이 이예주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예상했던 감촉이다. 

아니, 예상보다 더 좋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남자가 몸을 움칫했다. 

하지만 사납게 내치거나 거세게 몸을 빼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들이댔다. 

사실 키스 따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매번 주도하는 것은 남자였고, 그는 언제나 구렁이 담 넘듯 자신의 입으로 넘어와 제 집처럼 마구 점령하곤 했으니까. 

처음부터 당황하고 휘둘리다가 질질 끌려가기만 했는데, 남자가 제게 했던 것처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저를 밀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남자가 고마워서, 그래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제 마음을 전달했다. 

열심히 쪼물쪼물 거리며 남자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혀를 내어 그의 아랫입술을 슬금슬금 핥았다. 

마음이 너무 간절해지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런 걸까. 

평소에는 꿈에도 하지 못할 일들을 이예주는 애원하듯 자행했다. 

미쳤다고 욕을 들어도 괜찮았다. 어린것이 또 어리광 피운다고 그래도 좋으니까. 

나 좀 봐 줘요. 나 이렇게 당신 좋아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좀……. 

남자의 아랫입술에 달라붙어 그의 날숨까지 모조리 쪽쪽 빨아 삼키던 이예주는 이윽고 까치발을 들고 서 있던 몸을 느리게 원상 복귀시켰다. 

촉, 야살스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이, 이제 냄새 안 나죠?”

왜일까. 떨어지자마자 꺼낸 말이 고작 냄새 안 나냐는 소리였다. 

흐으. 미쳤어, 미쳤어! 추위에 퍼런빛을 띠던 이예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자에게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말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물을 맞아 준답시고 눈을 감았더니 느닷없이 입술을 덮쳤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을까. 

차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호수 어딘가를 방황하듯 바라보며 이예주는 아무 말이나 쥐어 짜냈다.

“이건 그니까. 그니까…….”

“…….”

“내, 냄새가 나나, 안 나나…… 흐이익!”

너무 반응 없는 남자 때문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그 순간 람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남자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잠자코 제 얼굴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탓에,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왜 입을 맞췄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뭐라고 해야 해? 

그녀의 동공이 지진 나듯 한없이 흔들릴 때, 남자가 드디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 나! 추워서 먼저 가야겠어요!”

말보다 행동이 더 앞섰다. 

이예주는 남자가 채 잡기도 전에 물속에서 겅중겅중 뛰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호수를 빠져나갔다. 줄행랑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수치스러운 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늦게 오는 사람이 오늘 설거지 당번이에요!”

그녀는 산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문득 뒤에서 ‘예주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지만, 도망치기 바빠 그것이 환청인지 실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인간 여자가 요란스럽게도 사라져 버린 호숫가에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조금만 걸어도 죽는다고 앓았는데, 요즘은 꽤 단련이 되었는지 잡기도 전에 잘도 도망을 친단 말이야. 

붙잡기 위해 뻗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움켜쥐지 못한 텅 빈 손을 바라보며 그가 작게 혀를 찼다.

그는 그대로 뻗은 손을 들어 제 입술 부근을 매만졌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것에 빨려 들어갔던 아랫입술은 여전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단내가.”

람의 무감각한 눈이 인간 여자가 꽁지 빠지게 도망간 방향에 못 박혔다.

“단내가 나는군.”

그는 빨간 입술을 들어 올려 매혹적으로 웃었다. 

계집이 눈치챌 수 없도록 무감각함으로 감춰 둔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냄새가 안 나냐고? 안 날 리가 없지. 

언제나 그의 후각을 자극하고 군침이 살살 돌게 만들어서 결국 뼈까지 아그작, 아그작 통째로 씹어 먹고 싶은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것인데 냄새가 안 날 리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가장 질척한 방법으로 계집을 묶어 두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지만 그는 그것을 꾹 내리눌렀다. 

어차피 그에게 시간은 무한했다. 그것을 위해 해결해야 할 일이 당장에 닥쳤으니 별수 없기도 했고.

“요망한 것.”

제때 잘도 줄행랑을 친 인간 여자의 자취를 좇으며, 람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혹시라도 남자에게 잡힐까 봐 미친 듯이 달려 도착한 산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호숫가에 남자를 두고 저 먼저 와 버렸으니 산장에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예주는 제가 먼저 도착했다는 기쁨에 젖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예스! 나 오늘 설거지 아니야! 워후!”

설거지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급격히 몸을 덮치는 피로감에 비척비척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실내 공기는 싸늘했다. 

맨몸에 찰싹 달라붙은 젖은 옷 때문에 그 싸늘함이 배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뛰어오는 동안 머리카락과 얼굴의 물기는 대강 말랐지만, 물기를 머금은 상의와 바지에서는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나름 물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들어섰다. 

그러나 이내 제가 무슨 짓거리를 하던 마룻바닥이 젖는 것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내 거침없어졌다. 

그녀는 화덕 근처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화덕에서는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한 재만 남아 있는 모습에 이예주는 울상을 지었다. 

당장 불을 피워 젖은 옷과 식은 몸을 말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불을 피우는 법 따윈 몰랐다. 

이곳에 갇힌 내내 불 관리는 람이 했기 때문이다. 

갈아입을 여분의 옷조차 없는 현실에 이예주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추워…….”

춥고 힘들고 지쳤다. 양쪽 팔뚝이 아릿아릿하게 아파 왔다. 

그렇게 신나게 물장구를 쳐 댔으니 안 아픈 게 오히려 이상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에게 싸움을 걸었으며, 또 무슨 정신으로 키스를 하고 도망을 쳤던 걸까. 

잠시 잊고 있었던 제신의 만행이 떠올라 그녀는 순식간에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렇지, 자신은 그의 입술을 덮치고 희롱한 추행범이었다.

“흐, 흑. 미쳤어. 미쳤어!”

그녀는 끌어안고 있던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수치와 민망함에 몸부림쳤다. 

이곳에 갇힌 후로 자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데, 이렇게 깊게 빠져드는 것이 정상인가? 원래 이런 스킨십은 서로를 알아 가며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이내 첫 키스를 한참 전에 상이랍시고 해치워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겠지?” 

질질 짜다가 뜬금없이 입술을 훔치고 토꼈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이예주는 차게 식은 두 손으로 여전히 척척한 머리끝을 잡아 뜯으며 중얼거렸다. 

“으으, 난 몰라. 모른다고…….”

그녀는 울적한 얼굴로 딱딱딱 부딪치는 턱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실내임에도 갈수록 몸이 차가워졌다. 

불을 지필 줄 모르니 결국 꼼짝없이 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이 도출되었다. 

부끄러워서 아직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없는 산장은 너무도 춥고 허전했다. 

그녀는 옷 바깥쪽의 물이 사방으로 튈 만큼 와들와들 떨면서 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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