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83)화 (184/319)

“왜, 왜 이래요! 왜 이래요!”

한순간에 머리 쪽으로 피가 쭉 쏠렸다. 

미역처럼 축 젖은 머리끝이 물에 닿을 듯 말 듯 달랑거렸다.

“늦으면.”

“으, 으으.”

“호수 물에, 머리부터.”

어디선가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뿐한 것을 들은 것처럼 남자가 이예주의 몸을 두어 번 탈탈 털었다. 

머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덜렁거리자 그녀는 비로소 남자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통렬한 깨달음과 동시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처박아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남자는 빨간 입꼬리를 슬쩍 위로 들어 미소 지었다. 

이예주가 보았다면 악마가 따로 없다고 경을 칠 그런 미소였다.

“놓지 마요! 악! 람! 자, 잘못! 잘못……!”

이윽고 제 허리와 다리를 굳게 감싸 안았던 팔이 헐거워졌다. 

모든 피와 장기가 아래로 쑥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예주는 정말로 머리부터 물속에 풍덩 처박혔다.

“컥…… 크헉……!”

눈을 뜬 심 봉사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차가운 물이 연신 안면을 후려쳤다. 

코와 입, 귀, 목 틈새로 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이예주는 물속에서 개구리처럼 엎어진 채 미친 듯이 몸을 바르작거리고 버둥거렸다. 

그나마 수위가 낮은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간신히 호수 바닥을 짚고 일어났을 때, 그녀는 말도 못할 만큼 시린 물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상태였다.

“어흐으! 어흐, 추워! 으흐으!”

겨드랑이 속속들이 파고드는 한기에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호두 깎기 인형처럼 이를 딱딱딱 부딪쳤다. 

너무 추워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바람 한 점이라도 불었다면 이대로 얼어붙어서 동상이 되어 죽기 딱 좋을 만한 온도랄까. 

그 정도로 너무 춥고 비참하고……. 

“흐으, 으으.” 

입새로 괴상한 소리를 끊임없이 흘리며 벌벌 떨던 그때였다. 

비 맞은 생쥐 꼴을 한 그녀의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파드득 물을 튀기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남자가 눈까지 한껏 휜 채 쿡쿡 웃고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웃어……?”

눈이 마주치자 놈이 아예 대놓고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워낙 표정이 없는 남자였기에 소리까지 내며 웃는 그 모습이 생소했다. 

얼빠진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자, 남자가 지껄였다.

“볼만하군.”

악마 새끼. 이예주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곤 손에 콰득 힘을 주어 잡히지 않는 물을 움켜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전쟁이다.”

“뭐?”

여태껏 물 위에 우뚝 서 있던 람이 그것을 자세히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찰나였다. 

촤하악―! 

차가운 호숫물이 티 한 점 없던 람의 얼굴을 철썩 치고 흩어졌다. 

뜬금없는 물세례가 지나가고 속눈썹 끝으로 물방울이 똑똑 흘러내리는 남자의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와 같다면 그를 보고 발그레 볼을 붉혔을 이예주였지만, 현재는 안타깝게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전쟁! 전쟁이라고!”

“…….”

“어때요, 물맛이? 시원하니 좋죠? 그쵸? 하하! 하하하하!”

어우, 10년 묵은 체증이 훅훅 내려가는 기분이네! 

물에 푹 젖은 람의 앞머리, 턱선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그녀는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리고 그때까지 물 위에 떠 있던 남자가 스르륵 내려왔다. 

마치 느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듯 서서히. 까마득하게 멀던 남자와 시선이 제법 가까워졌을 때까지도 이예주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녀와 같이 물에 잠긴 남자가 마주 웃었다. 

이 미친놈이 왜 마주 웃는 거지? 하하, 하하하……. 

호숫가에 커다랗게 번져 나가던 이예주의 웃음소리가 천천히 멎었다. 

반대로 남자가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전쟁이군.”

물벼락이 쏟아졌다. 

꼭 밧줄에 물을 적셔 채찍질을 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 이예주의 머리 위를 강타했다.

“어풉! 푸하! 허흑!”

갑자기 떨어진 물벼락에 허우적대며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저와 같이 호수에 잠긴 남자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양손을 펼쳐 든 채였다. 눈앞이 혼몽해졌다. 

지금 저 남자, 아니 저 새끼가 나, 물로 때린 거 맞지? 

이건 그냥 가벼운 물싸움 정도가 아니었다. 물을 이용하여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흐, 흐으으! 이, 이! 이 나쁜 놈아!”

울컥, 명치끝에서 뜨거운 울분이 치솟아 오름과 동시에 이예주는 괴성을 지르며 남자를 향해 물을 뿌려 대기 시작했다. 

촤학, 촤하악―! 날아가는 물 덩이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서 남자의 모습이 잘 보이질 않았다. 

이예주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 저 미친놈에게 물을 더 많이 뿌릴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뇌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만 파고드는 찬 기운에 벌벌 떨면서도 이예주는 이를 갈고 뇌까렸다. 

네놈을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그다음은 진짜 전쟁이었다. 

물론 그녀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전쟁.

“푸학! 하윽! 사, 살려 주세요!”

몇 번짼지 셀 수 없을 만큼 쳐 맞은 물벼락을 다시 한 번 뒤집어쓴 이예주는 좀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찬물을 너무 많이 맞아 피부가 얼얼했다. 

전쟁을 선포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녀는 잠수를 수십 번 하다 나온 사람 같은 몰골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물을 퍼부을 채비를 했다. 

저 자식은 손이 무슨 양동이야? 어떻게 물 한 번 뿌릴 때마다 양동이째로 퍼다 맞는 것 같냐고! 

“잠깐! 잠깐!”

“항복인가?”

남자가 소름 끼치도록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방금 전에도 그가 한 번 물었던 것이다. 

물싸움, 아니 물 전쟁이 시작된 지 5분 정도-체감하기로는 5시간과도 같은-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때 제가 뭐라 했더라. 

‘항복은 개뿔, 엿이나 처먹어라.’라고 했던가. ‘엿이나 처먹…….’이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 싸대기를 맞았다. 

차라리 그때 싹싹 빌면서 항복할 것을.

“항복이 아니면.”

남자가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느릿하게 물을 손안에 퍼 올렸다. 

아까는 저 행동을 보고 비웃었다. 

‘물싸움은 스피드야, 애송아.’ 하고 남자를 무시했다. 

저 느리게 담아 올린 물 싸대기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 것인지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예주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항복! 항복!”

“…….”

“흐흑, 항복이라고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해요!”

이예주는 공격 자세를 풀지 않는 남자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잘못을 빌었다. 

패기 있게 먼저 전쟁을 선포해 놓고 이렇게 싹싹 비는 제가 구차하고 비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맞다간 진짜 죽을 것이다.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진실된 항복 의사를 파악하던 남자가, 이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물을 버렸다.

“쯧. 오랜만에 재미있었는데 아쉽군.”

재미. 

그 한 마디에 그녀는 희게 질린 표정으로 제 앞의 미친놈을 돌아보았다. 

재미? 넌 이게 재미있냐, 이 새꺄! 나는 네가 퍼붓는 물에 쳐 맞다가 죽을 뻔했는데, 재미?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이 람을 향해 맹렬히 꽂혔다. 

그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음에도 남자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태연하기만 할까. 여유롭고 또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은 눈으로 람을 쏘아보던 이예주의 분노는 얼마 안 가 푸시시 식었다. 

남자의 모습 때문이다.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그는 옷만 좀 젖었을 뿐, 가슴 위로는 멀쩡했다. 

물 전쟁을 하기 전과 뭐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체 자신은 그동안 뭘 한 걸까. 오히려 살짝 젖어 흐트러진 앞머리가 남자의 인간미를 북돋워 주었다.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인정머리 없는 그에게서 전에 볼 수 없던 섹시함을…….

섹시? 섹시! 하! 저 망할 놈이 섹시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눈을 저주하며 이예주는 깊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반면에 제 꼴을 좀 보라지. 노출된 살들은 모두 본래의 색을 잃고 허옇게 변색되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주르륵 물이 쏟아졌다. 

그것이 귀가 됐든, 코가 됐든, 입이 됐든……. 

멀쩡한 남자와 물에 꼴딱 젖은 제 꼴을 비교해 보자니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흐…… 흐흑.”

입을 열자 물인지 침인지 모를 묽은 액체가 주르륵 쏟아졌다.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그것에 갑자기 서러움이 복 받쳤다.

“흐, 흐흐으…… 이, 이게 뭐야…….”

이예주는 핏기 없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시발,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녀가 예상했던 스토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남자를 속여서 물에 빠뜨리고, 골이 난 남자와 연인처럼 알콩달콩 물장난을 치다가 다시 다정하게 손을 잡고 돌아가는 것이 그녀가 생각한 계략의 전부였다. 

그러다 추위에 벌벌 떠는 저를 남자가 포근하게 안아 주는 것은 플러스 알파였다. 

그 계략 안에는 절대로 이런 빌어먹을 물 전쟁, 아니 물고문을 당하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데 이 비루먹은 꼴은 또 뭐야. 다정은 얼어 죽을, 이 살벌한 분위기는 또 뭐고. 

“흐흑, 어허허헝.”

이예주는 제가 처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는 듯 우는 듯 울었다. 

갑작스러운 훌쩍임에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가 줄줄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쯤, 남자가 소리 소문 없이 물살을 헤치고 다가왔다.

“왜 우는 거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남자가 물었다. 이예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안 한 건 아니었다. 

제가 봐도 울음으로 이어진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맞춰 놀아 줬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나?”

“…….”

“그래서 우는 건가.”

“허흐, 허엉, 엄마아…….”

이 미친놈 좀 제발 어떻게 해 주세요. 이예주는 남자의 별 황당한 소리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함께 눈물도 두어 방울 질금질금 흘렸다. 

인중을 타고 흐르는 뜨끈한 액체를 한 번 더 훔쳐 내려 팔을 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번개처럼 손목을 휘어잡아 코를 닦을 수가 없었다.

“왜 우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남자가 시뻘건 동공을 내리깔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지가 뭐가 아쉬워서 기분이 안 좋아? 억울함에 이예주가 와락 소리 질렀다.

“왜! 왜 이렇게 멀쩡해요?”

“뭐?”

“난 이렇게 물귀신이 됐는데. 나 혼자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고, 당신은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요! 젖은 곳도 별로 없고! 흑.”

“허.”

람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선 그녀에게 현실을 짚어 주었다.

“네가 앞도 보지 않고 멍청하게 엄한 곳에만 물을 뿌려 대었으면서, 지금 내가 젖지 않았다고 떼를 쓰는 것인가?”

“머, 멍청? 떼?! 흐, 흐흑…….” 

이예주는 다시 훌쩍거렸다. 

왜! 왜 얼굴 하나 젖지 않은 거야! 얼굴이라도 젖었으면 혹시나 다른 사람들과 연애 상담을 할 때, ‘난 짝남과 다정하게 물싸움도 해 봤다.’ 하고 지어 낸 자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제 처지는 일방적인 구타를 당한 것에 가까웠다.

“당신은 진짜 몰라요, 몰라…….”

이예주는 한탄처럼 웅얼거리며 시무룩하게 등을 돌렸다. 

물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더 있다간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추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안타까운 몸부림마저 저지하는 이가 있었다. 

촤악, 촤악! 다급히 물을 헤치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이예주의 몸이 거칠게 휙 돌려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채 파악도 하기 전에 차게 식은 양 뺨에 따스한 것이 닿았다. 

남자의 손이었다.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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