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82)화 (18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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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 도착했을 무렵, 이예주는 람과 다정하게 붙잡고 있던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손에 땀이 가득 찼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마주 닿았던 손바닥의 온기가 사라지자마자 땀이 증발하는 통에 손이 다 시렸다. 

뭐야. 벌써부터 남자가 없어 옆구리가 시림을 느끼는 거니, 손년아? 

온기가 사라져 가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볼에 빤히 와 닿는 시선에 퍼뜩 상념을 털어 내고 고갤 들었다. 

남자의 시뻘건 동공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머쓱함에 이예주는 손을 뒤로 숨겼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호숫가를 가리켰다.

“가서 씻고 와. 냄새 안 날 만큼 빡빡.”

이예주는 여전히 불안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호수 주변을 주욱 둘러보았다. 

신처럼 전지전능한 람과 함께 있으니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어제 겪은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호수 근처는 고요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람의 등 뒤 저편, 문제의 그 숲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시선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의 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자신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뭘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지? 얼른 가래도.”

“가, 가요! 가면 되잖아요…….”

“이것도 가져가.”

“뭘…….”

람이 뭔가를 쑤욱 내밀었다. 

초록색 약초 가루가 담겨 있는 유리병이었다. 

그것을 기어이 가져온 남자의 행태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가져가서 씻도록.” 

“대체…… 하, 이건 왜 또 가져온 건데요?”

“세정에 도움이 된다.”

이 미친놈아! 하나도 도움 안 된다고요! 

이예주는 제 앞에 상냥하게 건네진 유리병을 노려보았다. 

“어서.” 

남자가 내민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다시 한 번 채근했다. 

그의 집착이 무서워 그녀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유리병을 꽉 쥐고 호수 근처로 걸어가며 로브의 단추를 똑똑 풀던 이예주는 발치에 차가운 물기가 닿을 때쯤 람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좀 전과 다름없는 부동자세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추를 절반이나 풀어 헤친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안에 검은색의 얇은 내의를 입고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뒤돌면 안 돼요?”

이예주가 물었다. 남자가 눈썹을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답했다.

“……벌거벗고 씻으려는 건가?”

“아니요! 아니요, 무슨!”

“그럼 무슨 상관이지?”

“그냥…… 여자들은 씻는 모습 남한테 보이는 거 좀 그래요.” 

“너도 그 ‘여자’에 해당되나?”

이예주는 남자의 되물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잠에서 깨어나 그에게 입 맞추기 직전 생각했던, 짝사랑에 관한 일련의 고찰들이 떠올랐다. 

망할, 어린애 취급도 모자라, 그동안 여, 여자로 생각도 안 했다고? 

“그럼! 그럼 여자 아니면! 내가 남자예요! 네? 남자냐고요!”

“…….”

“그냥 여기서 막 바지 벗으면 돼요? 한 번 벗어 줘?!”

마담 페니의 가게에서 강요당해 입게 된, 얇고 통풍이 잘되는 검은색 바지는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기 때문에 끈만 풀면 손 쓸 틈도 없이 바지가 내려간다. 

그녀는 끈을 풀 기세로 마구 흔들었다. 

인간 여자의 눈이 그새 희번덕 뒤집어진 것을 안 람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후…… 적당히 하고 나와. 늦으면 호수 물에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아 주지.”

남자가 생각보다 순순히 몸을 돌렸다. 

이예주는 투덜거리며 로브를 마저 벗었다.

“단추는 왜 이렇게 또 많은 거야, 이놈의 포대는.”

벗고 나니 로브의 무게가 실감이 났다. 

겉옷에서 벗어나자마자 몸이 날 것처럼 가벼워졌다. 

후련한 마음으로 팔다리를 걷어붙이며 그녀는 천천히 물을 향해 걸어갔다. 

“으, 차거!”

그러나 발을 물속에 담근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꽥 소리를 지르며 후닥닥 발을 뺐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물이었다. 산 정상의 만년설이 녹아서 생긴 호수라고 하더니.

전에 없던 망설임이 샘솟았다. 

그냥 대충……. 

“……고양이 세수만 할까?” 

푸르른 물 위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중 이예주는 문득 맑은 수면 위에 비친 제 얼굴을 봤다. 

“아…….”

그리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생각보다, 아니 남자가 왜 썩은 내라고 칭했는지 알 만큼 꼬질꼬질한 노숙자 한 명이 호수 위에 비쳤다. 

으으! 썩은 내! 썩은 내! 그녀는 울먹이며 썩은 내를 여러 번 상기했다. 

골수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꾹 참고 호수 안으로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짝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했다.

동상 걸릴 것만 같은 찬물도,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사실 참는 것보단 너무 추워서 감각이 없어졌다는 것이 더 정확했지만, 어쨌든 이예주는 열심히 씻었다. 

남자가 기어이 손에 쥐어 준 초록색 약초 가루도 사용했다. 

의외로 약초 가루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안겨 줬다. 

어제 설거지할 때는 미끌미끌하기만 할 뿐 거품이 일지 않았는데, 씻을 때 사용하니까 폼 클렌징이나 샴푸 대용으로 써도 될 만큼 피부가 깨끗이 씻겼다.

박하처럼 시원한 향과 풀을 짓이겼을 때 나는 쌉쌀한 풀잎향이 그녀의 몸을 은은하게 감쌌다. 

약초 가루를 이용해 몸을 꼼꼼히 씻은 이예주는 유리병의 뚜껑을 닫으며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혹시 이거 세면용으로 쓰는 거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비누나 샴푸 같은 걸로 그릇을 닦은 거잖아. 망할. 

그녀는 어제 사용했던 솥과 그릇을 절대로 다시 사용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세면용인지 그릇 닦는 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세정 작용에 도움이 된다는 무식한 말만 해 댄 망할 놈에겐 기필코 그 그릇과 수저를 주리라.

대충 씻고 난 이예주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람이 생각나서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뒤돌아 서 있는 모습을 틈틈이 확인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남자의 신형이 사라져 있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정신없이 주위를 훑어 대었다. 

한참을 샅샅이 훑은 후에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하필이면, 이예주가 찜찜하게 여기는 그 문제의 수풀 근처에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찾기 힘드나 했더니 람은 아예 나무 뒤편에 기대어 제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제 입으로 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막상 관심 따윈 조금도 없어 보이는 남자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해.”

자신이 씻다가 또 다른 인면어에게 잡아먹히기라도 어쩌려고! 

씩씩거리던 이예주는 그 순간 놈을 엿 먹일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낯을 바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망할 놈. 드디어 대복수의 시대가 열렸도다!

눈을 감고 있어도 람의 온 신경은 호숫가로 쏠려 있었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며 욕설을 내뱉는 것도, 앓는 소리를 내며 첨벙첨벙 물을 끼얹는 것도 귀에 꽂히듯 들렸다. 

“어흐, 추워! 어흐, 어무이!” 하며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 목소리까지. 

보지 않아도 훤히 그려지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람의 입꼬리가 봄바람에 꽃잎이 흔들리듯 살랑살랑 위로 올라가길 반복했다. 

얼마 안 가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끊겼다. 

썩은 내가 난다는 것에 확실히 충격을 받긴 받았나 보군. 람은 배부른 포식자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깨끗해진 것을 데리러 한 번 가 볼까. 

내내 차가운 물과의 혈투를 벌인 기특한 인간 여자를 맞이하기 위해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였다.

“라, 람! 도, 도와줘요! 흐읍!”

인간 여자의 새된 비명이 들렸다. 숨넘어갈 듯 다급한 목소리였다. 

황급히 호숫가로 나온 람의 눈에 희게 질린 낯빛으로 울먹이는 인간 여자가 보였다. 

순간 그의 동공이 커졌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테지만, 람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인간 여자의 모습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지.”

“아흐. 다, 다리가 안 빠져요. 뭐에 꼈나 봐요!”

사실 그보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참느라 이예주는 죽을 것 같았다. 

놈을 속여 먹기 위해 스스로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에 들어설 때부터 그녀는 괜한 짓을 했다며 물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한기보다 더 미치겠는 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평소와 같이 무표정하다는 것이다. 

설마 자신이 거짓말을 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본 건 아니겠지.

이예주는 다급해졌다. 

남자를 속이기 위해 더욱더 격렬하게 절박한 표정을 연기했다. 

“도, 도와줘요, 람! 흐, 흐흑. 다리가 안 빠져요! 저, 저 죽을 것 같아요!”

추위에 벌벌 떨면서 한 번 더 애처롭게 외치자 남자가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호수와 뭍의 경계에 서 있던 그가 한 발을 떼어 호숫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수면 위로 몸을 실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남자가 신발 코 하나 적시지 않고 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 저! 사람이 도와 달라는데 지는 젖기 싫다고 물 위를 걸어와?!’

이예주는 제게로 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내심 안도하면서도 심란해졌다. 

그사이 람의 신발이 성큼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남자는 도착하자마자 대뜸 손을 내밀었다. 

이예주는 묘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도와줘 봤자 후드를 틀어쥐고 무식하게 끌어 올릴 줄 알았는데.

“잡아.”

람이 재촉했다. 

이예주는 물 안에 잠겨 있어서 수면 위에 서 떠 있는 그를 마주 보려면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했다. 

물끄러미 손을 바라보기만 하던 인간 여자가 악동같이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오랫동안 시린 물속에 있어 차게 굳은 손에 남자의 온기가 옮겨진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아, 따뜻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예주는 있는 힘껏 맞잡은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어?”

뒤로 넘어질 각오까지 하고 잡아당겼건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응? 그녀는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짓고 람을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무슨 시답지 않은 짓거리냐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손에 힘이 빠진 것이야. 그게 틀림없어. 

이예주는 다시 한 번 온 힘을 주고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남자를 부여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으, 씨. 왜……!”

안 움직이는 거냐고! 이예주는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담긴 얼굴로 꼼짝하지 않는 손을 몇 번 더 당겼다. 

하지만 애초에 계획했던 것처럼 남자가 물속으로 끌려 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배어 있던 짓궂은 미소가 찬찬히 사그라졌다. 

시퍼레진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그녀를 느긋하게 내려다보며 남자가 물었다. 

“물놀이를 하고 싶었나?”

“…….”

“전에 좋아하느냐 물었을 땐 답도 하지 않더니. 그렇게 나와 물놀이를 하고 싶었으면 진즉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것을.”

번거롭게 뭘 이런 짓까지 하냐는 듯 남자가 씨익 웃었다. 

그 얄궂은 웃음이 방금 전 그녀가 지었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것을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 

제 쪽으로 당길 요량으로 잡았던 손이, 오히려 남자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 어!”

제 몸이 물 위로 쑤욱 들릴 때만 해도 이예주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는 것 정도를 인지했을 뿐.

람의 손에 잡혀 그가 있는 수면 위까지 눈 깜짝할 새 끌어 올려진 것도 잠시, 단단한 팔이 그녀의 무릎 밑을 받치고 공주님 안기 하듯 번쩍 들쳐 올렸다.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됐다.’

불안함이 전신을 타고 번졌다. 

공주님 안기에서 더욱 심화되어 시야가 180도 휙 반전되었을 때,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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