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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81)화 (182/319)

부드러운 흑발이 흐드러진 시원시원한 이마와 반듯한 눈썹. 매끈하니 선이 고운 턱선, 주름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는 붉은 입술까지. 

입술. 붉은 입술. 

그녀는 남자의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살금살금 내려 입술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방금 전 볼에서 느꼈던 서늘함이 거짓말처럼, 남자의 입술은 따뜻했다. 

그녀의 입술을 한 번에 집어삼켰던 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탄성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과거로 돌아 갈 생각을 하며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람이 좋아졌다. 

절대 좋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계속 미워해야지. 

그래서 나중에 과거로 돌아갈 때 그동안 참았던 욕이나 걸쭉하게 퍼붓고 가야지. 

예전에는 정말 그랬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니 이미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푹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예주는 람의 입술 끝을 살살 매만졌다. 

남자의 입술은 거스름 하나 없이 보드랍고 모양이 좋았다. 

‘여자인 나보다 더 예뻐. 예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어.’

남자는 인간을 박멸시키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데다가, 자신을 까마득한 어린애라고 여겼다. 

자신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 어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혹은 감정을 모르는 그가 제가 말한 좋아한다는 말의 무게를 알게 되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람이 자신을 좋아해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가끔 남자가 생각 없이 저지르는 뽀뽀, 키스 같은 것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의미를 가진 행위라는 것을 이예주는 잘 알았다. 

그에겐 정말로 천방지축인 자신을 다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과도 같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가 자신을 이성으로 바라보고 자신과 비슷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는 것 또한.

제가 답 없는 우물 속에 뛰어든 것을 깨닫자 가슴께에 뻐근한 둔통이 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자고 있으니까. 그는 모를 테니까.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남자의 입술을 매만지던 이예주는 생각했다. 

상과 같은 개념으로 남자가 먼저 주던 것이니까. 이번엔 자신이.

원래도 즉흥적인 행동파였기에 그녀가 생각했던 것을 실천으로 옮기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예주는 입술을 만지던 손을 다시 올려 그의 볼을 붙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코끝에 남자의 입새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닿았을 때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입술에 닿는 남자의 온기가 따뜻했다. 

그렇게 이예주는 람에게 입을 맞췄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입술의 온기가 과연 제 것인지 제가 입 맞춘 상대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무렵에서야 이예주는 입을 떼어 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시뻘건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악!”

이예주는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녀의 허리를 옭아맨 남자의 팔 때문에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의 미간이 설핏 구겨지자 그녀는 소리를 지르는 것을 멈췄다. 

대신 숨넘어갈 듯한 새된 소리로 물었다.

“어, 언제부터!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글쎄.”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어 답했다.

“네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갑자기 낯을 달리하고 머리를 잡아 뜯을 때부터였던가.”

“허, 흐억!”

그럼 처음부터잖아, 이 자식아! 

남자의 경악스러운 지껄임에 이예주의 낯빛이 퍼렇게 변했다가 순식간에 벌게지기를 반복했다. 

남자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이예주는 버퍼링 걸린 동영상처럼 좀체 굴러 가지 않은 머리를 굴리며 무어라 변명을 하려고 했다. 

이건 그러니까, 도둑처럼 몰래 당신의 입술을 훔친 게 아니라.

“이, 이, 이건. 그,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

“이, 이건, 그러니까.”

내가 살던 곳만의 아침 인사? 아니면 어제의 만행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 

아니면 갑자기 상이 너무 받고 싶었다고? 

아악! 대체 뭐라고 해야 돼! 

정신이 지진 일어나듯 흔들릴 때쯤 남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대며 괴악한 소리를 해 댔다.

“냄새가 나는데.”

“무…… 무슨 냄새요?”

“음.”

“……다, 단내요? 또 단내 난다 그러려고 그러죠?”

이예주는 일전에 뤼미에르 꽃밭에서 키스를 할 때를 떠올리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자 남자가 정색을 하고 부정했다. 

“아니.”

“그럼 무슨…….”

“썩은 내.”

이예주는 일순 머릿속이 혼몽해지고 눈앞이 하얘졌다. 썩은 내? 누구의?

“썩은…… 썩은 내……?”

“그래. 썩은 내.”

허리를 옥죄던 람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용을 써도 풀리지 않았었는데. 너무나도 쉽게 풀어지는 그의 팔에 이예주는 왠지 허탈했다. 

빠른 속도로 침상 옆에 선 남지가 아직까지 멍한 얼굴로 누워 있는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일어나. 아무래도 씻어야겠다.”

“……누구, 누구요?”

“누구긴.”

“…….”

“너.”

너. 너. 너. 

깊은 동굴 속에서 말을 건네듯, 람의 말이 귓가에서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단내에 관한 추억으로 붉게 상기되었던 이예주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키스를 했더니, 썩은 내가 난다고? 누군가 망치로 세게 친 것 같이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주 심각하군.”

하지만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남자가 쐐기를 쾅 박았다.

남자는 찬장 구석을 뒤적거리더니, 어제 본 초록색 가루가 들어 있는 병을 건넸다. 

그러면서 세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같이 가져가서 씻고 오라고 명령했다. 

제 앞에 내밀어진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예주는 충격으로 굳어진 머리로 ‘엿이나 처먹어라.’ 같은 상스러운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세정에 도움이 되긴 개뿔, 이게 얼마나 쓸모가 없는 것인지 당신도 겪어 봐야 돼요.”

람은 시크하고 도도한 남자답게 두 번 권하지 않고 바로 유리병을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이예주는 부엌 한쪽에 둔 물동이로 가려 했다. 

겨우 고양이 세수일 테고, 먹을 식수가 줄어들겠지만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놈 때문에 별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그녀가 하는 행동을 보던 람이 불현듯 시뻘건 눈을 번쩍이며 후드를 잡아챈 것은 부엌에 막 들어선 때였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이예주에게 호숫가로 가라고 짓씹듯 내뱉었다. 

이예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쫙 빠졌다. 

그녀는 혼자는 못 간다며 벌벌 떨었다. 

그러자 남자가 당장 나가라고 협박했다. 

그녀는 산장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나 혼자선 절대로 못 가니 차라리 내 배를 째라.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이예주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남자의 무시무시한 힘에 속수무책 산장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이좋게, 정확히 말하면 억지로 끌거나 끌려가며 씻기 위해 호숫가로 걸어가게 되었다.

“정말, 정말 아무도 없는 거 맞죠?”

호수로 이어진 숲길을 걷는 내내 불안으로 떨며 이예주는 그에게 여러 번 물었다. 

물론 대답은 한결같았다. 

마침내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 짜증이 일었는지 람이 험악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대체 몇 번을 반복해야 알아듣는 거지? 네 머리통은 학습 능력이라곤 전무한 것인가?”

“어제 진짜 뭐가 있었던 것 같았단 말이에요…….”

“호수 근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 않나.”

“그래도 무서운 걸 어떡해요, 흑.”

후, 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연달아 들려오는 그의 한숨에 이예주는 울상을 지었다. 

그는 자신을 씻기기 위해 움직이는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이곳에 갇힌 후 한결 부드러웠던 말투가 다시 딱딱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스러운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그냥 좋게 씻으라고 말하면 될 것을 썩은 내라니. 

지금껏 그녀에게 좀 씻고 다니라든가, 냄새가 난다는 둥의 말을 지껄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말을 나눌 만큼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지만, 이예주는 건성이라 며칠 감지 않아도 머리에 기름이 잘 끼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요 며칠 못 씻은 것은 맞지만,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또 씻을 곳도 마땅치 않았고……. 

하, 썩은 내. 이예주는 음울한 표정을 지은 채 제게 손속을 두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잡힌 손목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치, 이럴 거면 차라리 사슬 풀지 말고 채워 놓지 왜!

“아파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몸에 꾹 힘을 줘 뻗대었다. 

앞서 걸어가던 람은 뒤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반항을 무시하고 마저 끌고 가려 했다. 

그러나 이예주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진 쪽은 람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얼굴로 뒤로 돌았다.

“뭐지?”

“손목 아프다고요.”

그녀는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손가락질하며 불퉁거렸다. 

람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여유를 둘지언정 절대로 풀어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누가 씻기 싫어서 도망이라도 간다니! 속으로 분노를 삭이던 이예주는 걸음을 재개하려던 남자를 얼른 다시 붙잡았다. 

그러고는 기어코 느슨해진 손아귀를 제 손목에서 떼어 냈다. 

무표정했던 남자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예주는 그가 더 이상 참지 않고 역정을 내기 전에 재빨리 다음 행동을 취했다.

“뭐…….”

“이렇게 잡으면 안 되는 거예요?”

손바닥이 마주 닿았다. 

남자의 볼을 만졌을 때 느꼈던 그 서늘한 온도와는 달리 맞잡은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이렇게 따뜻한데 왜 손목을 잡혔을 땐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가.

이예주는 람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고 잡아 올려 살짝 흔들었다. 

제가 하고도 왠지 맞닿은 손끝이 찌르르하고 전기가 돌듯 간지러워서 남자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소, 손목 잡고 가기 당신도 불편하잖아요.”

“…….”

“이렇게 잡고 가면 어, 당신도 편하고 여, 옆에서 같이 걸어갈 수도 있고. 어, 어…….”

말끝을 흐리던 이예주는 결국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남자에게서 답이 없었다. 

어, 어떡하지. 그냥 놓을까. 망할, 이런 건 남자가 먼저 하는 건데 왜 나는. 흐흑. 

그가 차갑게 손을 내칠까 봐 무서웠다. 

인간 주제에 어딜 건드리는 것이냐고, 주제를 알라고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 

지금이라도 손을 놓으면서 ‘농담입니다. 손목을 잡으십시오.’ 하며 손목을 내밀어야 하는 것일까. 

깍지를 끼고 있지만 남자의 손가락 사이사이는 금방 풀릴 것처럼 헐거웠다. 

짧은 새 고민이 극에 달한 그녀가 결국 제 손을 빼내려고 결심한 찰나였다. 

손가락 사이로 스스륵 빠져나가려던 이예주의 손이 꽉 붙잡혔다. 

헐거웠던 것이 언제였냐는 양 결합이 깊어졌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지.”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허둥지둥 대다 그를 뒤따랐다. 

그녀가 잘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던 전과는 달랐다. 

그의 보폭이 확연하게 작아졌다. 

그녀 또한 곧잘 맞출 수 있을 만큼.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걸을지언정 남자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공기 하나 통할 새 없이 꽉 마주 닿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이예주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손을, 손을 잡다니. 으아! 람과 손을 잡다니. 

그녀는 남자와 맞잡은 손을 연달아 훔쳐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진짜 좋아.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아. 

썩은 내의 수치를 바로 날려 버릴 만큼의 설렘이 이예주의 전신을 덮쳤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실실 웃느라 이예주는 몰랐다. 

두 발자국 앞서 걷는 남자의 귀 끝이 딸기 끄트머리처럼 빠알갛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언제나 그랬듯, 이예주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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