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80)화 (181/319)

“미친, 미친…….”

어마어마한 꿈을 꾼 거 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뿐인 창을 확인하고 나니까 꿈 내용이 으스러져 잘 생각나질 않았다. 

그렇게 거칠어진 숨을 삼키며 커다랗게 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을 진정시킬 때였다.

“무슨 일이지?”

“헉.”

불현듯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예주가 기겁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예주.”

화덕 너머 시뻘건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응시했다. 람이었다. 

흐읍, 이예주는 짧게 신음했다. 보자마자 람인 것을 알았는데, 자신을 향해 살기를 흩뿌리던 수백 개의 시뻘건 눈동자들이 스치듯 떠올라서 가라앉던 가슴이 다시 요동쳤다. 

그녀의 괴성으로 인해 잠에서 깬 건지 그는 침상 위에 앉은 채로 이예주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 자고 뭐 해요?”

“무슨 일이지?”

남자가 두 번째로 동일한 질문을 했다. 

그의 목소리에 이예주는 악몽을 꾸었고,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았다. 

“꿈에서 눈동자가…….”

“…….”

“빠, 빨간 눈동자가…… 흐으. 어, 어디 가요?”

사라지는 꿈의 끝자락을 잡고 람에게 울먹이며 설명을 하던 중이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그가 어디론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 이예주는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불을 켜러.”

“아뇨! 아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요!”

고개까지 붕붕 휘저으며 애원하듯 외치는 통에 람은 반쯤 일어섰던 몸을 다시 원위치로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예주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한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잠기운에서 벗어나 머리가 점점 맑아질수록 생생했던 꿈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그냥, 그냥 원래 가끔 꿔요. 이런 악몽…… 악몽, 흐흑.”

이예주는 자는 사이 멀리 차 버렸던 얇은 담요를 그러모아 끌어안으며 작게 훌쩍였다.

“미안해요. 그냥 이렇게 조금 있다가 다시 자면…….”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동공의 초점이 쉽게 맞춰지지 않았다. 

기실 가끔이 아닌 자주 꾸는 악몽이었지만, 꿈 내용이 생생한 것보다 이런 식으로 안개 낀 것처럼 뿌옇다가 그대로 잊혀질 때가 가장 답답하고 무서웠다. 

혹시 예지몽인데 기억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또 끔찍한 일을 겪고 꿈을 꾸지 않아 몰랐다는 한마디로 넘기는 것이 너무, 너무 괴로워서.

잠을 설칠 때마다 늘 그랬듯, 지독한 두통이 뇌리 저편에서부터 슬금슬금 몰려왔다. 

으으, 속으로 신음을 삼킨다고 삼켰는데 저도 모르는 새 입 밖으로 새어 나간 건지 남자가 한숨을 내쉬웠다.

“미안해요. 잠 깨워서…….”

이예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람에게 사과했다. 

분명 람이 자신에게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타박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무시로 일관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하지만 남자는 요를 들추고 자신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이리 와.”

“……네?”

“이리 오라고.”

이예주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당신…… 옆으로요?”

“한 번 말할 때 들어 처먹었으면 좋겠다고 벌써…….”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은데. 

남자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예주는 벌떡 일어나서 맞은편으로 코끼리처럼 돌진했다. 

화덕 위를 스친 담요가 회갈색 잿가루를 뭉텅 묻힌 채로 저를 따라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한달음에 람이 있는 침상까지 도착한 그녀는, 천둥 치는 밤의 어린아이처럼 오들오들 떨며 남자의 품을 마구 파고들었다.

“무서워요.”

엄마가 죽은 후부터 악몽을 꾸고 깨어나면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구석구석이나 모서리에서 누가 자신을 주시하며 비난하는 것 같았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또 누가 자신을 보며 괴물이라 손가락질할까. 또 어떤, 또 누가. 

엄마가 있으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그저 악몽일 뿐이니 다시 자면 그만이라고 말해 줄 텐데. 

눈을 뜨면 이예주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손톱을 딱딱 물어뜯고 벌벌 떨며 지샜던 수많은 밤들 중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누군가 곁에 있던 적이 없다.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누군가 있는 것 같아요.”

자꾸만 한기가 드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예주는 덜덜 떨었다. 

그때 문득 허리에 단단한 무언가가 감겼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타인의 품속으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옴짝달싹 못할 만큼 온몸이 옥죄었다. 

움츠릴 새도 없이 귀 바로 옆에서 남자가 뜨거운 날숨을 내쉬며 낮게 읊조렸다.

“아무도. 아무도 없어.”

숨 막힐 듯 끌어안는 힘이 답답했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끼기도 전에 안심하는 자신이, 이예주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아무도 없는 거 맞죠?”

“그래. 너와 나 단둘뿐이다.”

작은 몸뚱이를 품에 꽉 끌어안은 채 람은 한 손으로 인간 여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도닥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할 테니 걱정 말고 그만 자거라.”

그만 자거라. 그 말에 이예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진짜 어쩜 이래. 어쩜 이 남자는 이렇게, 좋아하지 않으려 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끝내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그녀는 제 품에 모아 두었던 손을 뻗어 남자의 허리를 마주 껴안았다.

“아무 데도 가지 마요.”

“…….”

“일어나서도요.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옆에 있어 줘요.”

단단하면서도 아늑한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이예주는 킁킁, 남자의 냄새를 좇았다. 

아무리 들이켜도 남자에게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비염도 아닌데 왜 남자의 체취를 맡을 수 없는 것일까. 

이예주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일어났는데 당신 없으면 너무 무서워요.”

“……알았다.” 

마지못해 답하는 사람처럼 남자는 언제나 뜸을 들인다. 

안달복달, 애면글면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그 사실이 못내 서글퍼 이예주는 확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 말을 걸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토닥이는 남자의 손길에 점점 말이 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이예주 본인은 몰랐다.

“……정말요.”

“어리광만 늘어가는군.”

“약속해 줘요.”

“네가 원치 않으면.”

느릿느릿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남자의 손아래, 이예주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내리 감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 들기 직전에 남자가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어디로든 가지 않으마, 예주야. 

조잘대던 제 목소리가 사그라졌음에도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예주야. 예주야. 예주야……. 

아득한 심연 저편에서 마치 소중한 것을 부르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몇 번 더 반복됐다. 

그 목소리가 너무 포근하고 너무 듣기 좋아서 이예주는 제가 간절히 빌고 또 빈 소원을 하느님이 꿈결에나마 이루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       *       *

더 자고 싶은데 모기 소리, 잘못된 자세, 혹은 커튼을 치지 않았던 것 등등의 외적인 요인으로 점차 잠기운이 가실 때가 있다. 

이예주의 현재 상태가 딱 그랬다. 

더 자고 싶은데, 더 자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온몸에 가해진 압박 때문에 강제로 기상하기 직전인 그 상태.

“으윽…….”

숨 막혀. 답답해! 

이예주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온몸을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뭐야. 이불에 돌돌 말려서 못 빠져나오는 건가! 

그녀는 결국 번쩍 눈을 떴다. 

뜨기 싫었지만 이불 늪에서 헤어 나오려면 별수 없었다. 

퉁퉁 부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연지를 바른 것처럼 붉디붉은 입술이었다. 

웬 입술.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 자유로운 한쪽 팔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니 이번에는 오뚝한 콧망울이 보였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비니까, 이번엔 먼지를 쓸어도 될 만큼 촘촘히 박혀 있는 예쁜 속눈썹이 보였다. 

눈, 코, 입을 모두 모아 보니 잘생긴 외간 남자의 얼굴이 손가락 두 마디 거리 앞에 놓여 있었다.

“흐―! 허억!”

이예주는 귀신을 본 사람처럼 몸을 마구 물렸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뒤로 빼고 발버둥 쳐도 남자와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무심결에 내린 시선에 허리를 굳건히 감싼 남자의 팔이 보였다. 

그로 인해 배부터 허벅지까지가 남자의 몸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본 이예주의 얼굴이 폭발할 듯 달아올랐다. 

미쳤어, 미쳤어. 이예주! 

“외, 외간 남자와 이렇게 딱 달라붙어 자는 것은, 그것은 도의적로도 윤리적으로도 어긋나는 행위야……! 하, 한국 사회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이잖아! 자고로 남녀가 이런 짓을 하려면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

뭐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횡설수설하던 그녀는 순간 꿈틀대는 람의 눈꺼풀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안 돼. 깨면 안 돼!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지금의 자신을 바라본다면 심장이 폭발해서 죽을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남자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이예주는 여전히 미동 없는 남자의 팔을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어떡하지. 이런 자세, 이런 상황은 가끔 정 할 짓이 없어서 심심해 죽을 때나 보던 연애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인데. 

물론 지난밤 이리 오라는 남자의 말에 개처럼 허겁지겁 달려온 제 탓도 있지만……. 

문득 간밤 일을 회상하자니, 악몽에서 깨어난 후 제가 했던 어마어마한 만행들이 부록처럼 딸려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차마 이불에 발길질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이예주는 자괴감에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참 후, 그녀가 간신히 수치스러움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남자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던 건가. 

이예주가 지금껏 보았던 남자는 같은 시간에 잠드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먼저 깨었다. 

그녀 또한 낯선 곳에서 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닌지라 대부분 선잠으로 지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람의 기척을 단 한 번도 눈치챈 적이 없었다. 

그런 남자가 제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이예주는 조금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기야, 남자가 어제 했던 그 어마어마한 힘자랑이라면 피곤할 만도 하지. 

그녀를 번쩍 업어 드는 것도 모자라 인면어가 담긴 나룻배를 힘차게 끌고 왔지 않은가.

다시 보니 잠든 남자의 혈색이 조금 수척한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민망함으로 몸부림치던 게 언제였냐는 양 이예주의 얼굴이 금세 걱정으로 흐려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남자의 뺨에 가져다 대려다가 멈칫했다. 

뺨도 허락 맞고 만져야 하는 거 아냐? 

주춤거리며 손을 물릴까 하던 이예주는 고민 끝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남자의 뺨 위에 살짝, 느낌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살짝 손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닿는 온도가 서늘했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얼굴이 금방 뜨거워지는 자신과는 달리 차갑다고 느껴질 만큼 낮은 온도였다. 

인간인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차가운 빨간색 눈동자처럼.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신인류를 바라볼 때와는 다른 새빨간 시선을 마주하면 가슴이 따끔거렸다. 

가끔은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조차 겁이 나고 벅찰 때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들끓는 증오와 혐오가 남자에게 돌아왔을 봐. 

다시 나를 죽이고 싶어졌을 까 봐.

그래도 잠들었을 때만큼은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이예주는 고이 잠든 남자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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