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대답에 그녀의 두 동공이 찢어질듯 확장되었다.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지만 답은 같았다.
“아,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그래. 아무것도.”
“그럴, 그럴 리가 없는데…….”
짧은 순간 이예주의 얼굴 위로 다채로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놀라움으로, 그다음은 공포와 두려움, 경외감, 체념 등등으로 시시각각 물드는 인간 여자의 낯빛을 람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감상했다.
남자가 그러는 줄도 모르고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호숫가에서 들었던 소리를 회상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은밀하게 풀밭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부, 분명 들었어요. 뭐가 크, 크르르, 크르르르 하는 거요.”
기괴한 시선이 느껴지는 숲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다시 떠올려도 소름이 끼쳤다.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그녀는 이내 손짓 발짓까지 해 대며 열심히 그 소리에 대해 설명했다.
“크르르 알죠? 그 개나 호랑이 같은 동물이 막, 막 경계할 때 내는 그런.”
“…….”
“크르르르, 크르렁! 있잖아요, 왜. 크헝크…….”
열심히 묘사하던 이예주는 문득 본 남자의 얼굴에 소리 내던 것을 멈췄다.
놈은 팔짱을 낀 채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하는군.”
“…….”
“더 해 봐.”
미친……
이예주는 아이에게 어흥 하고 덮치는 흉내를 내듯 위로 번쩍 쳐들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고는 아주 불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왔는데요?”
“빨리 오고 싶었지만, 네가 진창에 처박은 채 버리고 온 이것들을 도저히 그냥 들고 올 수가 없더군.”
그가 들고 있던 솥을 내밀었다.
막 물에 씻은 듯 쇠솥의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슬며시 솥 안을 살피자 호숫가 근처에 아무렇게나 패대기쳤던 숟가락과 그릇, 초록 가루 병, 헝겊도 고이 담겨 있었다.
잠시 솥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눈이 별안간 천천히 커졌다.
다 닦지 못해 솥 바닥과 벽에 눌어붙은 흔적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헉. 다 씨, 씻어서 가져온 거예요?”
“…….”
남자는 대답지 않았다.
이예주는 조금 얼떨떨했다. 분명 그녀가 예상했던 남자의 반응은 구박과 면박,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직접…… 직접 씻고 왔다고?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놔.”
“어, 어…….”
람은 이예주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그녀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받은 솥을 들고 부엌 찬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부엌에 도착해 찬장 문을 열고 그 안에 솥을 내려놓은 이예주는 참 요상하게도 얼굴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이예주의 양 뺨은 물 오른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제 양 뺨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머, 어떡해. 너무 가, 가정적이야…….”
이상하게 자꾸 어디가 간질간질 거렸다.
그래서 몸을 간헐적으로 움칠거리던 그때, 남자가 문득 그녀를 불렀다.
“아무것도 없으니 그만 이리 오지.”
“예, 예? 뭘요?”
“거기 아무리 뒤져 봤자 먹을 것 없다. 네가 아까 이틀 치를 다 먹어 치웠지 않아.”
“먹을 걸 찾긴 누, 누가요! 그리고 그게 무슨 이틀 치……!”
“그런데 거기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지?”
뭐 하긴! 이 멍청한 계집께서 네놈이 가정적이라는 멍청한 착각을 잠시 하고 있었지 뭐야!
너무나도 노골적인 돼지 취급에 이예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몸을 계속해서 들썩이게 만든 간지럼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건들건들 걸어갔다.
“설거지도 다 했으니까 우리 이제 뭐 해요?”
남자가 시뻘건 눈으로 흘긋 그녀를 곁눈질하다가 침상으로 걸어가며 스치듯이 말했다.
“자야지.”
“예. 자긴 자는데…… 아, 아니 뭐라고요? 벌써 자요?”
본인의 침상 앞에 선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예주의 침상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까 설거지하러 갈 때 해 안 졌다면서요.”
“이제 졌으니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야! 이제 해가 졌으니 바로 잠에 들라고?
이예주는 잠이 오긴커녕 호숫가에서 들은 괴생명체의 소리 때문에 오던 잠도 싹 가신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남자와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니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뭔가 하루 종일 부림만 당하고 이렇게 그냥 자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그녀는 반항 어린 표정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잔말 말고 누워.”
하지만 남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근데 그냥 안 자면 안 돼는 거예요?”
“안 돼.”
“왜요?”
“어린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쑥쑥 크기 때문이지.”
역시나 뭔가 느낌이 석연치 않노라 했더니 망할 놈이 망할 소리만을 골라서 해 대었다.
이예주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우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게 다 큰 거라고요…… 그리고 쑥쑥 키워서 진짜 뭐 해 먹게요!”
“잡아서 뼈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고 하였지 않아.”
이 새끼! 아직도 그, 그런 무서운 소릴! 먹이를 앞둔 포식자가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자신을 향한 람의 시뻘건 눈동자가 오싹하게 번들거렸다.
이예주는 괜히 목이 바싹 타는 기분에 큼큼 헛기침을 하며 침상 위에 앉았다.
나름 남자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놈은 귀신같이 손가락질했다.
“누워.”
“진짜아…….”
결국 이예주는 자리에 누웠다. 그녀가 완전히 침상에 누운 것을 확인한 남자가 스르륵 몸을 움직여 산장 안을 밝혀 둔 등불을 끄고 다니기 시작했다.
밝았던 불이 똑똑 꺼질 때마다 이예주의 불만 또한 쭉쭉 폭등했다.
얼마 안 가 산장 안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
한동안 눈앞이 깜깜해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지만 곧 어둠에 익숙해져 조잡스러운 나무판자가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서 잘 것을 그랬나.
하지만 대충 나무를 덧대어 2층 침대 흉내를 낸 나무 침상은 조악하기 짝이 없어 조금이라도 몸을 뒤척일라치면 끼익 끼익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자다가 침대가 부서지는 망할 일을 겪기보단 차라리 조금 답답하더라도 1층에서 자는 것이 훨씬 맘 편한 일이리라.
애써 위로하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던 이예주의 입에서 실낱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간인지 좀체 잠이 오질 않았다.
“……저기요. 그냥 자기엔 너무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요?”
“네가 다 먹어 치워 밥도 없는데. 원한다면 지금 일어나서 다시 식량이라도 구하러 가지.”
“안녕히 주무세요.”
이예주는 곧바로 눈을 감고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있잖아요.”
“스읍, 자라고 했을 텐데.”
“아니! 자긴 자는데요! 그런데 자자면서 당신은 왜 안 누워요?”
“…….”
이예주는 화덕 반대편, 남자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어둠 속에서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가 광채를 쏟아 내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곧 맞은편에서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옆을 보니 남자가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짜식, 잘 거면 같이 자야지 저만 깨 있으면 쓰나?
시뻘건 눈으로 흉흉하게 저를 노려보면서도 속 긁는 소리 없이 같이 누워 주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어둠 속에서 해맑게 웃었다.
사실 겁이 났던 것도 같았다.
이렇게 어두운 산장에 자신만 처박아 놓고 또 밖으로 휭 나가 버릴까 봐.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놀라 굳어 있는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어디 가지 말라고요.”
이예주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듣기에도 작은 목소리라 남자가 들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일어나도 어디 가면 안 돼요, 람.”
어저께도 일어났는데 당신이 없어서 너무 무서웠으니까…….
들려오는 남자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이예주는 조금 전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두 눈을 감았다.
분명 커피라도 몇 잔 들이켠 것처럼 가슴이 뛰어서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을 줄만 알았는데,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마치 늪 같은 수마에 맥도 못 추리고 끌려갔다.
* * *
이예주는 문득 눈을 떴다.
산장 안은 빛 한 점 들지 않고 깜깜하기만 했다.
눈이 어둠에 익지 않았더라면, 제가 있는 곳이 산장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왜 잘 자다가 갑자기 깬 거지?
그녀는 침상에 누운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갑자기 눈을 뜬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왼쪽 뺨을 찌를 듯이 적나라하고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깜깜하고 저 혼자뿐인데. 누가 몰래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는 무심결에 왼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작은 쪽창이 있었다.
창밖은 깜깜했다.
뤼미에르 꽃의 뿌리로 사방이 막혀 있으니 깜깜한 것이 당연했지만, 꼭 검은색 크레파스로 마구 칠한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조금 이상했다.
원래 창밖이 저렇게 어두웠었나?
뤼미에르 꽃봉오리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있을 텐데.
그때, 캄캄한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창에 빨간 눈동자 두 개가 번뜩 나타났다.
람? 아무 생각 없이 람을 부르며 침상에서 내려서려던 이예주는 바닥에서부터 창문까지의 높이를 인지하곤 우뚝 멈췄다.
천장 가까이 나 있는 쪽창은 그녀는 물론, 람의 키보다 훨씬 높이 위치해 있었다.
뭘 밟고 올라가지 않는 이상, 아니 뭘 밟고 올라가더라도 창밖에서 산장 안을 내려다볼 수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머리 위로 누군가가 얼음물을 쏟은 것처럼 쏴아악 핏기가 가시면서 한기가 돌았다.
그럼 저기 있는 건 뭐야? 귀, 귀신?
이예주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차마 다시 그 창문을 올려다볼 생각조차 못했다.
불현듯 오른쪽 눈가 근처에도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서서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보았다. 방금 전 본 유리창의 반대편 창에도 시뻘건 동공이 매달려 있는 것을.
그 창 또한 높이가 천장에 가까운 것을 깨닫자 이예주는 아낌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그녀는 동공을 피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가 눈을 돌린 그 자리에도 검은 창이 있었다.
세 번째 시뻘건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이예주는 어느덧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여기도, 저기도, 저쪽 구석도, 이쪽 구석도, 어딜 보아도 그녀의 시선이 닿는 족족 검은 창이 생겨났다.
창을 통해 이예주를 내려다보는 수십, 수백 개의 시뻘건 눈동자들이 하나같이 살기를 철철 흘려 대며…….
“흐. 흐읍! 흐아악!”
이예주는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팔을 허우적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헉. 가쁜 숨이 입술 새로 쏟아졌고, 전력 질주라도 하다 멈춘 사람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무슨 일인지 의식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는 산장 안의 벽과 천장을 눈으로 훑었다.
눈이 닿는 족족 검은 창이 보였던 방금 전과는 달리, 산장 안에 나 있는 창이라곤 딱 하나뿐이었다.
이예주는 부릅뜬 눈으로 그 하나뿐인 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깜깜하지는 않았다.
산장 밖에 있는 뤼미에르 빛이 창 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