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 흐윽…….”
“크르르르…… 크르렁!”
“아, 아아아악!”
귓가에 다시 한 번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예주는 솥단지고 뭐고 괴성을 지르며 냅다 뒤돌아 달렸다.
길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리가 나던 숲의 반대편으로 줄행랑치기도 바빴으니까.
방향도 모르고 두서없이 마구마구 달음박질을 치자니 억센 풀줄기와 나뭇가지들이 날카롭게 안면을 후려쳤다.
이예주는 그래도 개의치 않고 달렸다. 솥단지를 씻어 내느라 기운을 많이 뺀 탓에 금방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맞는 길로 도망치고 있는 건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연달아 뒤를 돌아보며, 울음소리를 내었던 그 짐승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지그재그로 뛰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걸까?
야생 동물과 마주치면 행해야 하는 지침들을 마구잡이로 떠올려 보았지만 뛰는 것도 벅차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 정경이 너무 휙휙 지나가서 뭐가 따라오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뭔가 검은 것이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핏기가 가신 얼굴을 뒤에다 고정시킨 채 앞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달리던 급박한 순간이었다.
무심코 앞으로 고개를 돌리던 이예주는 불쑥 튀어나온 검은 인영을 보고 속도를 줄일 새도 없이 그대로 충돌했다.
“어억!”
퍽―!
엄청난 충격이 코끝을 강타했다.
시발, 시발. 어흐흐흑……. 찡하게 저려오는 안면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것도 잠시, 이예주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검은 마수에 고통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살려 주세요!”
“……주야.”
짐승이 뭐라 지껄여 대며 양팔을 덥석 부여잡았다.
이예주는 더욱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나는 맛없어! 나는 맛없다고, 아아악!”
“예주야! 이예주!”
집어삼켜지듯 어둠이 와락 시야를 덮쳤다.
쫓아온 짐승이 기어코 자신을 잡아먹는구나 싶었는데,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람의 단단한 품 안이었다.
“……람?”
이예주는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뻘건 눈동자가 놀람과 걱정을 띤 채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뭘 봤기에 이리 놀란 것이야, 응?”
정말 람이었다.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자 이예주는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거세게 갈비뼈를 두드리던 심장이 곧바로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흐, 흐흑!”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동시에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으흐, 흐허어엉! 호, 호수에 뭐가 있어요. 뭐가 있다고요!”
“그럴 리가. 이곳은 너와 나뿐인데. 다른 생명의 기척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에요! 호수 근처에 괴물이 있단 말이에요, 어허엉! 내가 다 들었어. 나 잡아먹으려고 짐승 울음소리 내는 거 다 들었다고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 이예주는 엉엉 울며 남자의 품에 얼굴을 도로 처박았다.
람이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확인해 보아야겠군.”
남자의 품에 안겨 울던 이예주는 그 소리에 다시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어딜 가요! 괴물 있다니까요? 진짜요!”
“그러니 진짜 있나 확인해 보겠다는 것 아니야.”
“으흐으, 가지 마요. 그냥 같이 산장으로 돌아가요. 네?”
그녀는 람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질질 매달렸다.
그러나 남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확인해 보고 위험한 것이라면 속히 처리해야지. 쥐새끼 같은 인간들이 숨어 있는 것을 간과하면 후에 가서 골치 아플 것이 분명하다.”
“흐, 흐으…… 호, 혼자 있기 무서운데요.”
“그러면 너도 나와 같이 호숫가로 가든지. 그러고 보니 씻으러 가져갔던 그릇들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이지?”
이예주는 남자의 물음에 훌쩍이던 입을 다물었다.
차마 그에게 ‘호숫가에 버리고 왔습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가 호숫가로 가서 둘러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최선이라는 말도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예주는 최대한 늦출 수 있을 때까지 늦추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근데 산장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해요?”
단순히 말을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녀는 새삼 놀랐다.
겁에 질려 무작정 달렸더니 저도 모르는 새에 산장에 도착해 버린 건가?
그러나 주위는 여전히 나무와 풀뿐이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산장으로 이어진 길에 맞게 들어선 것인지 주변이 묘하게 익숙하기는 했지만.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람에게로 돌렸다.
그가 손을 뻗어 미친년같이 산발한 머리에 엉겨 있던 나뭇잎을 떼 주었다.
“하도 오지 않기에 호수에 빠져 죽었나 보려고 마중 나오는 길이었다.”
“마, 마중이요……?”
“그래.”
그 소리에 이예주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럴 거면 처음에 같이 가 달라고 했을 때 같이 가 줬으면 좋잖아!
뚱한 표정에도 상관 않고 남자는 그녀의 왼쪽 뺨에 묻어 있던 흙 부스러기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털어 주며 말했다.
“어쨌거나 다시 호수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혼자 산장으로 돌아가야겠군.”
혼자 가라는 소리에 이예주는 단번에 창백해졌다.
“흐, 흐흑. 호, 혼자 가긴 무서운데…….”
“그럼 호수로 같이 가든가.”
“아, 아니요! 그건…… 그냥 같이 산장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네가 호숫가에 버리고 온 것들이 있는데 그럴 수야 있나.”
호숫가에 솥과 그릇을 나 몰라라 버리고 온 것을 곧바로 간파당한 이예주는 순간 가슴이 뜨끔거렸다.
더 이상 조를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시무룩하게 람의 말에 수긍했다.
“알았어요…… 그, 그러면 나 먼저 산장으로 돌아갈 테니까. 대충 보고 빨리 와야 돼요.”
“알았다.”
“빠, 빨리요! 정말 빨리요!”
몇 번이고 그에게 약속하듯 확인을 받아 낸 인간 여자는 걸어가면서도 못내 불안한 듯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참 애절하게도 바라보는 통에 결국 람이 “스읍, 그렇게 가다 자빠져서 울지 말고.” 하고 주의를 준 후에야 몸을 바로 했다.
“저, 저 가요.”
이예주는 비로소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드문드문 뒤를 돌아보는 것은 여전했기에 람은 그녀의 그림자가 점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는 뒤로 돌아 호수를 향해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도착한 호숫가는, 괴성을 내지르며 달음박질을 친 이예주가 무색할 만큼 고요했다.
그녀는 괴물이 자신을 쫓아온다고 믿었지만 슬프게도 푹신한 이끼 위에는 이예주의 발자국과 누운 자국만 남아 있었다.
괴물은 고사하고 작은 들짐승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충 주변을 훑으며 이예주가 움직인 경로를 쫓던 람의 눈에 그녀가 나 몰라라 버리고 간 물건들이 포착됐다.
“쯧.”
람은 작게 혀를 찼다. 부득부득 이를 갈며 눌어붙은 음식물을 닦아 낸 이예주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돼 버렸다.
설거짓거리들이 질척한 진흙 위에 나동그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면 또 빽빽 울어 대겠지.
그것들을 챙기기 위해 람이 그쪽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뗐을 때였다.
람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돌연 고개를 휙 돌려 한 곳을 직시했다.
이예주가 두 번이나 기민하게 주시했던 어두운 풀숲과 정확히 일치하는 방향이었다.
“숨소리 하나 내지 말라 했을 텐데.”
잠시 멈춰 섰던 람이 다시 솥단지를 향해 움직임을 재개하며 읊조렸다.
혼잣말을 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호숫가는 여전히 작은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허리를 숙여 그릇들을 주워 든 남자는, 한 번 더 어두운 숲 너머를 돌아보며 차갑게 동공을 번뜩였다.
“다시 부를 때까지 입 다물고 처박혀 있어.”
“…….”
“명령이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말에 답하듯 수십, 수백 개의 시뻘건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번쩍 빛을 내고 사라졌다.
홀로 산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이예주는 산만하게 실내를 누비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없는 시선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만큼은 기똥차게 느끼는 자신이 무려 두 번이나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분명 자신을 경계하는 듯했던 그 의문의 소리!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크르릉 거리는 것이 무슨 짐승 소리 같았는데.
혹시 숲에만 사는 호랑이나 곰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람이 이곳엔 몇 년째 짐승이 살지 않았고, 다른 생명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아주 혹시라도 다리족이 숨어든 것이면 어떡하지?
저번에 마을 족장에게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뭐 때문인지 자신과 조롱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리족에서 사들였다는 약물 주사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이 남잔 확인만 하고 후딱 돌아온다면서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열어 둔 산장 문 앞을 부산히도 서성이며 이예주는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렸다.
벌레 들어온다고 산장 문을 되도록 열지 말라던 남자의 경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람의 신변은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과연 누가 감히 그를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땅을 가르고, 번개를 번쩍번쩍 내리치고, 모래를 밧줄처럼 이용하는 전지전능한 남자를.
하지만 그런 남자가 바로 엊그제 칼에 찔려 피를 철철 흘렸다.
이예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작정하고 칼부림을 하면 람도 다칠 수 있는 거 아냐? 아프기도 하고, 또 피도 나고.
그 남자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동물들이라면 모를까, 정말로 다리족 같은 망할 인간들이 숨어 있는 거면. 그런 거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톡톡 물어뜯었다.
누군가 남자를 해칠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목 끝까지 잠식하던 그때였다.
검은 인영이 산장을 돌아 불쑥 튀어나왔다.
“람!”
시뻘건 눈동자를 한눈에 알아본 이예주가 퍼드득 그에게로 뛰어갔다.
제게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인간 여자를 보며 람은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이예주는 호들갑스럽게 람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남자는 솥을 들고 있었다.
제가 버리고 온 것이 떠올라 아차 싶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그의 몸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람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는 인간 여자의 행태가 이해 가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굳이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썩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에 달라붙어 심각하게 그를 바라보는 이예주를 매몰차게 떼어 내는 대신, 람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것을 지적했다.
“문 닫고 있으라 했지 않았나.”
“다, 당신이 아직 안 왔는데 어떻게 저 혼자서 문을 닫고 있어요.”
“그사이 벌레들이 잔뜩 꼬였군.”
남자가 산장 내벽 군데군데 걸려 있는 등불을 가리켰다.
“내일 아침에 물렸다고 징징대면 혼날 줄 알아.”
이예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자가 그것을 본체만체하고 산장 문을 닫으며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타박만 주는 못된 입을 가졌지만, 어디 다친 데 없이 무사히 돌아온 남자를 보니 불안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대충 둘러만 보고 빨리 온다고 했잖아요. 거기에 뭐 있었어요? 있었던 거죠, 그쵸? 뭐가 있었던 거예요?”
이예주가 조잘대며 물었다.
남자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저, 정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