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77)화 (178/319)

이예주는 잠시 망설였다. 

아까처럼 밥 한 끼 얻어먹기 위해 미끼로 부려질 바에는, 그냥 비슷한 인간들 사이에 껴서 살다가 어떻게든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홀로 찾아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간 놈들 사이에 섞여 살겠다면 너 또한 박멸할 대상이 되겠군.”

아니, 아니야. 역시 더러워도 이 남자 곁에 있는 것이 낫지. 암. 그렇고말고.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뒤집으며 이예주는 제 결론에 가슴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깔끔한 공감과는 별개로 그녀는 엉킨 실처럼 여전히 혼란스럽고 뒤숭숭했다. 

그동안 잊고 있어 잔잔하기만 했던 호수 위로 같은 한국인이라는 돌멩이가 던져져 마구 파동을 일으켰다. 

어쩌면 과거로 갈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기회를 그저 시간족이 무섭다는 이유로 날려 버리기에는 영 아까웠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진짜 1000년 전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 정말. 이 남자는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야 얘기해 가지고는…… 

괜히 모든 원망을 람에게로 돌리며 이예주는 극심하게 갈등했다. 

어쩌지. 가서 어떤 사람들인지 만나 보긴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러다가 또 위험에 처하면? 그럼 어떡해. 아, 어쩐담. 어쩌지. 어쩔까. 어째요, 어째…… 하.

“……딸기 먹고 싶다.”

너무 간절히 갈망하면 무의식중에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일까. 

오랜만에 머리를 빡세게 굴렸더니 미친 듯이 단것이 당겼다.

그러나 이런 힘든 내적 갈등을 알 리 없는 남자는 별 해괴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이예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 따가운 눈초리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다 먹었으니까 그럼 이제 자면 돼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긴 어딜.” 하고 곧바로 들려온 그의 말이 개소리하지 말란 소리로 치환되어 들렸다.

“다 먹었으니 가서 그릇 씻고 와.”

“예? 그릇요?”

이예주는 화들짝 놀라 부엌 한구석에 있는 물동이를 돌아보았다. 

식수로 써 온 그 물동이 안의 물은 그들이 산장에 오기 전부터 미리 채워져 있었다. 

마셔도 된다는 람의 허락하에 오며 가며 목을 축였고, 람 또한 인면어 국을 만드느라 많은 양을 사용했기에 물 높이는 꽤 줄어들어 있는 상태였다.

“저기 있는 물은 그릇을 씻을 만큼 많지 않은데요?”

정말로 멍청할 만큼 순수하게 되물어보는 인간 여자 때문에 람은 기막힌 웃음을 감출 새가 없었다.

“호숫가로 가서 씻어야지.”

“허! 뭐, 뭐라고요? 이 솥을 들고 어떻게 호수까지 씻으러 가요!”

“어쩔 수 없지. 그 한 솥을 비운 것이 너니까.”

“참나! 나만 먹었어요? 우, 우리 같이 먹었잖아요!”

“양심이 있으면 네 앞 좀 내려다보지그래.”

이예주는 당당하게 제 앞을 내려다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인면어의 굵은 뼈들이 보였다. 

다급하게 남자의 앞을 확인해 보았지만, 뼛가루 한 조각 없이 깔끔하기만 했다. 

심지어 그의 그릇은 비어 있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 먹을 때 대체 뭐 한 거야, 저놈은! 이마에 한 가닥 핏줄이 솟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이 오밤중에 혼자 어떻게 가요…….”

“밖은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아오! 망할 뤼미에르 뿌리! 이예주는 분에 겨워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익! 그, 그래도요! 그래도……!”

“그래도 뭐.”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또 인면어라도 있으면 어떡해요! 나 설거지하다가 잡아먹히면 어떡하냐고요!”

“인면어는 수심이 깊은 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얕은 호수 근처에 나타나는 일은 없다. 얕은 물까지 나타난다손 치더라도 너는 걱정할 필요 없겠군. 방금 전 누가 딱 하나 남은 개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으니 말이야.”

망할 새끼. 철저한 수비에 이예주는 이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남자가 칼같이 그녀의 미련을 잘라 내었다.

“어서 갔다 와.”

“무거운데 같이 가서 좀 도와주면 일도 반으로 줄고 훨씬 빨리 끝날…….”

“스읍― 제가 먹은 것은 제가 치울 줄도 알아야지.”

혀를 차며 재차 훈수를 두는 남자의 말에 속으로 욕을 날리며 이예주는 우당쾅쾅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그러곤 제가 먹은 그릇과 숟가락을 솥 안에 집어넣었다. 

마치 그녀가 설거지 당번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듯 남자가 거친 헝겊 조각 하나와 알 수 없는 초록 가루들이 담긴 작은 병 하나를 솥 안에 담아 주었다. 

“그릇을 닦는 천과 세정에 도움이 되는 약초 가루다. 맨손으로 닦을 생각이라면 가져가지 않아도 되고.” 

덧붙이는 말은 안 그래도 잔뜩 발화 중인 이예주의 불똥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아드득 까드득 이를 갈며 그녀는 솥 손잡이를 들어 보았다. 

“으윽!”

이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혼자 거기까지 가서 씻고 와! 연약하고 여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영 산장 문을 나서지 못하는 그녀의 뒤통수에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딴 길로 새지 않고 금방 갔다 오면 또 상을 내려 주지.”

“그, 그, 그런……!”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아까 일에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 가죽이 화끈했다.

“그런 상, 필요 없거든요!”

이예주는 빽 소리를 지른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산장 문을 뛰쳐나갔다. 

당황하여 우왕좌왕 걸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분홍빛을 띠었다. 

그딴 상, 필요 없어! 없고말고! 

이예주는 격렬히 거부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설거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지 머리를 굴리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깟 뽀뽀가 뭐라고…….”

이예주는 현재 호수 근처에 쪼그려 앉은 채 솥 안을 벅벅 닦아 내고 있었다. 

남자의 마지막 말 때문에 거의 뛰어 오듯 호숫가에 도달하여 열심히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닦고 닦아도 설거지는 좀체 끝이 나질 않았다. 

맛있게 퍼먹을 땐 전혀 알지 못했다. 

점성 높은 국물이 눌어붙은 솥 바닥을 닦아 내기가 이렇게 어렵고 고단할 줄은. 

수세미도 아니고 헝겊으로 그것을 문지르고 있자니 이건 설거지가 아닌 막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에이 씨! 왜 이렇게 안 닦여!”

이예주는 남자가 헝겊과 같이 담아 준 병을 거칠게 잡아채어 초록 가루들을 아낌없이 솥 안으로 팍팍 쏟아부었다. 

그 위를 다시 헝겊으로 퍽퍽 문댔지만, 눌어붙은 것들은 쉽사리 닦이지 않았다.

“이 망할 놈아! 세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더니 도움은 개뿔, 거품이 하나도 안 나잖아!”

그가 준 약초 가루는 물에 녹아 거품을 일으키지 않았다. 

문댈수록 조금 미끌미끌해지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러니 잔뜩 눌어붙은 인면어의 살점들이 천으로 깨끗하게 닦일 리 없었다.

“하악! 팔 아파! 나 힘들어 죽어!”

그 후로 한참을 더 솥을 박박 문지르던 이예주는 팔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 돼서야, 호수 물에 대강 헹군 솥을 패대기치듯 뒤엎어 놓음으로써 빌어먹을 설거지를 끝냈다. 

헝겊을 힘없이 내려놓은 팔은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해쓱해진 얼굴로 비척비척 호숫가에서 일어나 물이 닿지 않은 근처 풀밭에 대자로 뻗었다. 

기껏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을 즐기기도 전에 노가다와 다름없는 설거지로 모두 소화시켜 버렸다. 

내일부턴 또 굶을지도 몰라 이예주는 홀쭉해진 배가 여간 속상했다.

팔이 빠질 것처럼 뻑적지근 아파 왔다. 그러나 아픈 것보다 더한 짜증이 남아 있었다. 

혼신을 다해 닦았지만 군데군데 눌어붙은 자국이 남아 있는 솥 바닥을 보고 잔소리를 해 댈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놈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딴 길로 새지 말고 빨리 기어 오라고 했을 텐데.’라거나 ‘닦아 놓은 것을 보아하니 헛짓거리나 하고 왔겠군.’ 따위의 말들을 지껄여 댈 것이 분명했다. 

귀 옆에서 들려오듯 생생하게 예상되는 목소리에 이예주는 진절머리를 쳤다.

“아 몰라! 난 진짜로 열심히 닦았어! 그렇게 불만이면 자기가 마저 닦던지!”

더 닦을 마음이 있더라도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설거지 때문에 심신이 지친 이예주는 산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대로 벌러덩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람의 말처럼 들짐승들이 살지 않아 그런가. 맑고 청량한 물소리를 제외하곤 호수 근처는 조용하고 아늑했다. 

물가 근처라 땅에 나 있는 풀은 대부분 눅눅한 이끼여서 등에 와 닿는 지반 역시 푹신했다. 

온도 또한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약간 서늘한 게 딱 알맞았다. 

배도 부르고 노동으로 인해 몸도 적당히 노곤했으니 잠이 솔솔 쏟아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 빨리 산장으로 돌아가서 상은 받아야 하는데. 어쨌든 팔이 아플 때까지 설거지한 건 거짓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질까. 돌아가야 되는데. 가야 되는데. 자면 안 되는데. 이런데서 자면 안 돼, 예주야. 안 돼, 안 돼, 안 돼, 돼, 돼…….

폭풍처럼 뇌리를 점령하는 수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시장벽으로 뒤덮인 천장을 바라보던 눈꺼풀이 끔뻑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던 그때였다. 

부스럭― 

불현듯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무성한 풀밭을 밟을 때 나는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예주는 너무 잠에 취해서 어디서 바람이 부나 보다, 그렇게 가볍게 치부했다.

부스럭부스럭, 그러나 한 번 더 같은 소리가 들렸을 때, 일순 이곳은 두터운 가시장벽으로 막혀 있어서 바람이 불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스럭, 세 번째로 같은 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예주는 번쩍 눈을 떴다. 

커다랗게 확장된 그 눈동자엔 잠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예주는 바닥에 편안하게 뻗어 있는 상체를 스르륵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졸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찰랑이는 물소리뿐이었다. 

그녀와 자신, 단둘뿐이라고 람이 말했으니 제3자의 기척이 느껴질 리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전 들렸던 소린 뭐지? 숲이니까 다람쥐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 

하지만 람이 분명 이 지역에 들짐승들이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라고 했는데……. 

자신이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인가 고민하던 이예주는 불현듯 피부에 닿는 기묘함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닿은 것은 나무가 잔뜩 우거진 숲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사방이 숲이었으니 헷갈릴 만도 했지만, 이예주는 그 숲이 아까와 같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 차렸다. 

아까 전 남자의 물을 걷는 기행을 구경할 때 느꼈던 기이한 시선. 

그것이 그쪽에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뤼미에르가 피지 않아서인지 유독 어둡고 음침한 풀숲 저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부스럭― 

“헉!”

이예주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뭐야? 뭐야! 방금 전 것은 정말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 누군가 있어. 누가 있다고!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는 소리가 난 쪽을 주시했다. 

벌벌 떠는 그녀를 비웃듯, 우거진 숲 너머는 다시 잠잠해졌다. 

이곳에 자신 외의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예주를 극도로 두렵게 만들었다.

“저, 저, 저기요. 거, 거기 누구 있어요?”

공포 영화를 보며 그렇게 욕하던 멍청한 주인공들이나 할 법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이예주는 똑같이 따라 했다. 

물론 겁이 많아 주인공들처럼 가까이 다가가거나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두침침한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저기요. 흐, 흐…… 호, 혹시, 누구 있는 거예요?”

떨리는 두 동공처럼 겁에 질린 이예주의 목소리 또한 형편없이 떨렸다. 

“거기, 누구…….”

크르르르― 

그리고 그녀는 들었다. 작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짐승 울음소리를. 

꼬리뼈부터 돋은 소름이 척추골을 타고 정수리 한가운데까지 쫘아악 피어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