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얼빠진 얼굴로 상에 관해 오랜 기억을 되살릴 때쯤, 남자가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기껏 맨손으로 흙 파서 캐고 벌레 붙어 있는 것도 힘들게 따 왔는데 칭찬은 못해 줄 망정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살며시 웃었다.
“가져오느라 고생했다, 예주야.”
심장을 쥐고 마구 뒤흔드는 것처럼. 후에 어마어마한 횡포를 부릴지라도 그녀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질질 휘둘리기만 하게끔.
이예주는 깨달았다.
더 이상 제게는 떨어질 심장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래서 더럭 겁이 났다. 온전한 제 것 하나 남기지 못하고 벌써 다 빼앗긴 걸까 봐.
그래도 조금쯤은 남겨 둬야 하는데. 그래야 나중에 그에게 버려지거나 혹은 죽임당하더라도 악몽을 덜 꿀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예주야’ 하고 예쁘게 웃는 남자 앞에서 그런 생각은 모두 무용지물이 돼 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았다.
“이렇게 고분고분하니 얼마나 좋아. 앞으로 종종 상을 줘야겠군.”
입을 다물고 맹추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듯 남자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지껄였다.
뽀뽀로 망종 같은 인간 여자를 단번에 휘어잡은 것이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제 밥 먹을 시간이군. 텃밭에서 캐 온 것들은 버리지 말고 다 주워 오도록.”
마음이 자꾸만 커져서,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예주를 두고 남자가 뒤로 돌았다.
그러고 보니 나룻배 안에 끔찍한 인면어의 사체가 없었다.
텃밭에 간 사이 칼질을 끝낸 남자가 산장 안으로 옮긴 듯했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어지럽게 만들어 놓고 그는 산장 안으로 홀가분하게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이제 어떡해요?
과거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제 더 좋아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별 뜻 없는 말투 하나, 행동 하나에도 당신이 너무 좋아서.
나는 이제 어떡하냐구요.
람의 뒷모습을 향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소리 내어 묻지 않았으니 답을 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 * *
“안 먹으면…… 안 되겠죠? 그냥 굶으면…….”
굶으면 안 되냐는 물음에 남자가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이예주는 즉시 입을 닥치고 우울한 얼굴로 제 앞의 화덕 위에 올려진 커다란 솥단지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만들어 준 인면어 국은 사골처럼 불투명한 뿌연 색이었고 걸쭉했다.
큼지막하게 잘린 채로 남자의 손에 의해 솥 안으로 투하되던 인면어 덩어리를 본 것 같은데, 다행히 가라앉은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텃밭에서 열심히 따 온 채소들만이 되직한 국물 위에 떠 있었다.
이예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남자는 묵묵히 국자로 솥 안에 든 것을 한가득 퍼서 오목한 토기 그릇에 쏟아부었다.
이건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해 주는 밥……이겠지? 참 좋아하고 감복해야 할 상황이 분명한데.
그녀의 얼굴은 좋아하고 있다기보다는 착잡해하고 있다는 것에 가까웠다.
람이 두 번이나 국자를 푹푹 떠서 담은 그릇을 이예주에게 내밀었다.
“받아.”
“꼭…… 먹어야 할까요?”
“죽기 싫으면.”
남자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살벌한 협박에 이예주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부엌 찬장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나무 숟가락으로 죽과 같은 인면어 국을 한 번 뒤적거렸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처음 맡는 냄새가 뜨듯한 열기와 함께 풍겨져 나왔다.
“먹지.”
람이 숟가락을 들며 명령했다.
이예주는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성의 없는 손길로 걸쭉한 국을 휘적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숟가락질하던 손을 딱 멈췄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배고프다고 떽떽거렸지 않아.”
“떽떽…… 그렇긴 한데요. 근데 조금. 그냥 이 국은 먹기 좀 그래요.”
그릇 속을 휘젓고 다니던 숟가락 끝에 야채들과는 달리 물컹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면어의 일부였다.
남자가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좋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숟가락질을 못해서 떠먹여 주어야 하는 건가?”
“무, 무슨! 누가 숟가락질을 못해요!”
“그럼 주둥이를 벌려서 억지로 쑤셔 넣어야 하는 건가.”
“먹을게요! 먹으면 되잖아요…….”
어떻게든 이 한 그릇만 다 먹으면 되겠지? 눈 딱 감고 마구 퍼먹으면, 맛을 느낄 새도 없이 금방 다 먹지 않을까.
이예주는 부들부들 떨리는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얼른 먹고 무럭무럭 자라도록.”
남자가 격려랍시고 복장 터지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예주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이 자꾸 착각하는 것 같은데요. 이미 다 자란 거예요, 이거.”
“…….”
“그리고요. 무럭무럭 자라면 뭐 어쩌게요? 잡아먹기라도 하게요? 치.”
“흠, 거기까진 미처 고려하지 못했는데. 꽤 괜찮은 생각이군. 많이 먹고 쑥쑥 크거라. 뼈까지 남김없이 오독오독 씹어 먹어 주지.”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남자가 정말로 그녀를 씹어 먹을 것처럼 시뻘건 눈을 빛내는 탓에 이예주는 허겁지겁 그릇에 고개를 파묻고 인면어 국을 퍼먹는 척을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의식할 새 없이 인면어 국의 맛을 보았다.
혀끝에 와 닿는 액체의 점도에 그녀는 순간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불쾌함도 잠시였다.
“어……?”
입속으로 들어간 국 한 숟가락은 생각보다 걸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도 모르는 사이 구렁이 담 넘듯 부드럽게 혀를 타고 넘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두 삼켜 버린 후였다.
그 신묘함에 이예주는 서둘러 또 한 번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어 보았다.
끔찍한 맛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룸 살 적 자주 시켜 먹었던 배달 음식 집의…….
“이거 설렁탕……?”
토끼 눈을 하고 이예주는 국을 연달아 떠먹었다.
그리고 외쳤다.
“마, 맛있어!”
그다음부턴 무아지경이었다. 그릇 속에 머리를 쑤셔 넣을 듯이 정신없이 인면어 국을 떠먹던 그녀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텅 빈 그릇을 바닥에 쾅 내려놓은 이예주가 커다랗게 주모를 외쳤다.
“한 그릇 더!”
람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예주는 쪽팔림이나 민망함, 혹은 멋쩍음 따윈 느끼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음식, 게다가 없어서 못 먹는 설렁탕과 맛이 똑 닮은 인면어 국에 홀딱 반해 버렸기 때문이다.
뚱한 얼굴로 솥에서 새로이 국을 퍼 담아 넘겨주는 남자의 손으로부터 빼앗듯이 그릇을 받아 든 그녀는 다시 와구와구 국을 퍼먹기 시작했다.
중간에 인면어의 퍼석이는 살들이 씹혔다.
생선이라 그런지 종종 뼈가 씹혔지만 다행히 잔가시가 아닌 큰 통뼈라서 보이는 족족 쉽게 쉽게 발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여겼던 생선 괴물이었는데 막상 배고픔이 극에 달한 채 먹으니 꽤 괜찮았다.
생선과 닭고기의 중간 맛이라고 해야 할까.
솥 안에 가득 담겨져 있던 국의 양이 줄면 줄수록 이예주의 앞에 쌓여 가는 뼈들의 양은 많아졌다.
끊임없이 국을 들이켜면서도 그녀는 이거 구워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후…….”
목구멍까지 꽉 차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을 때가 돼서야 이예주는 숟가락을 쪽쪽 빨며 폭주하던 자신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제대로 앉아 있기도 버거웠다.
슬며시 뒤로 몸을 젖힌 그녀는 눈에 띄게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깍두기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말아 먹을 밥이라도…….”
“혼자서 그 큰 솥 하나를 통째로 비우고 난 뒤에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무슨 소리예요? 같이 먹어 놓고.”
“…….”
텅 빈 솥단지를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그녀 때문에 람의 빨간 두 동공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배를 채운 이예주는 걸걸한 목소리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렇게 다 먹고 나서 후식까지 먹으면 딱일 텐데! 예를 들면 딸기라든가, 딸기라든가, 딸기 같은…….”
“안 돼.”
역시나 남자가 단호하게 헛소리를 쳐 냈다.
“누, 누가 뭐래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냥…….”
지레 찔린 그녀는 불퉁거리다 금세 울적해진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는 주눅 든 얼굴로 람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살살 꼬드기면 하나쯤은 허락하지 않을까.
하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빤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치자 내뱉으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또 왜. 뭐! 괜히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생각은 좀 해 보았나?”
“예? 무슨 생각이요?”
이예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네 과거의 흔적을 찾아 가는 것에 대해. 사흘간 생각해 보라고 했을 텐데.”
“어…….”
그녀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면 전혀, 아주 조금도, 손톱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은커녕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상태였다.
“설마,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남자가 눈에서 시뻘건 광채를 뿜어 대며 귀신같이 물어봤다.
여기서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당장에라도 요절이 날 것이다.
이예주는 질겁하고 도리질을 쳤다.
“아, 아니요! 그게. 어…… 새, 생각해 보고 있어요! 네! 네! 그럼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그렇군.”
다행히도 남자는 납득한 듯 무난히 넘어갔다.
“결론이 서면 즉시 얘기하도록.”
덧붙여지는 말에 진정되던 그녀의 가슴이 다시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 그게 결론까지 내려야 하는 일이었어? 그냥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만 해 두고 잊어 먹은 지 오래였다.
분명 남자가 가기 싫으면 안 데려다 준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번잡스럽게 머리를 굴리던 이예주는 “그, 그런데 있잖아요…….” 하고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그 과거의 흔적을 찾는다는 거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리족이라면서요. 그리고 저는 이곳 사람도 아닌데요…….”
“그렇지. 너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가.”
이예주는 정확히는 과거에서 온 사람이라고 정정해 줄까 했지만 관두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너와 뿌리가 같은 인간들이더군.”
“뿌리요?”
“그래. 인간들도 여러 종으로 나뉘니, 너와 그들의 선대가 같은 뿌리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
“헉. 그, 그럼……!”
호, 혹시 한국인? 한국인이 살아 있다고?
이예주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다.
고로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처럼 뿌리가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게 아닌 이상 그녀의 뿌리는 단 하나였다.
대박. 한국인이 아직도 살아남았다는 거야?
역시 고조선 시대부터 잦은 왜놈들의 침입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5000년, 아니 이젠 6000년 역사를 가지게 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아직까지 살아남은 조국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이예주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생김새, 말투, 억양. 그리고 결정적으로 흐르는 피까지 너와 동일했다. 너와 같이…….”
스르륵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를 흘겨본 남자가 말을 참 함부로 했다.
“……잔머리를 잘 굴려서 얍삽하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 또한 비슷하고.”
“허허, 거참. 누가 얍삽하고 간사하다고…….”
“같은 인종이니 네가 찾으려 하는 과거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을 도와준다는 조건을 걸고 계약까지 한 것치곤 참으로 성의 없는 말투였다.
뭔가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있을지도 몰라?
같은 한국인이 살아 있다는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잠시, 이예주는 곧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졌다.
뿌리가 같다고 해 봤자 자신과 그들 사이에는 1000년이라는 벽이 있는데, 어떻게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그들은 그냥 평범한 인간들도 아닌, 다리족 인간들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잊었을 리 없다.
동쪽 대륙 마을의 족장이 검은 안개를 팔아 거둔 어마어마한 돈으로 다리족들에게서 신인류를 해칠 수 있는 약물을 사들인 것을.
이예주가 지금껏 겪어 왔던 1000년 후의 이 세상 사람들은, 과거 2017년 현대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악랄하고 잔혹했다.
불현듯 입안이 지독히도 썼다.
“그럼 만약에…… 만약에 그 사람들을 만나러 산꼭대기까지 갔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마저 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요? 그럼 어떡해요?”
이예주는 아까부터 들던 불안함의 원인을 람에게 물었다.
그는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이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 치의 고민 없이 답했다.
“그럼 별수 없지. 선택하는 수밖에.”
“선택이요? 무슨…….”
“인간 놈들 곁에 남아 살 것인지. 아니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