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75)화 (176/319)

칼 든 남자가 제 앞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앞에다 내려놓고 다시 갔다 와.”

“씨, 씨잉…….”

“얼른. 밥 굶는다.”

남자가 시뻘건 눈을 빛내며 칼을 뽑아 들자 이예주는 어쩔 수 없이 남자 쪽으로 걸어가서 옷자락에 담고 있던 채소들을 우르르 그 앞에 쏟았다. 

이런 식으로 바로 꼬랑지를 내린 자신이 비굴하고 비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고로 칼 든 미친놈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다 집어 던진 탓에 막상 내려놓은 채소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당근, 양파, 옥수수……. 그나마 1000년 전이랑 크게 모양이 달라진 점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빼쭉거리다가 이내 몸을 휙 돌렸다.

어쩐지 목이 메었다. 

그래도 고생했다고 칭찬 한 마디는 해 줄 줄 알았는데……. 

칭찬은 개뿔, 무식하고 멍청한 것이라는 욕만 더럽게 먹었다. 

기운이 쭉 빠져 어깨를 늘어뜨린 채 이예주는 텃밭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바라보며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당근! 당근! 아오!”

다시 텃밭으로 되돌아온 이예주는 보다 전투적인 태세로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맨 처음에 마주쳤던 가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쌩하니 지나쳤다. 

얼마 안 가 당근, 양파, 감자 따위의 뿌리채소가 자라 있는 밭이랑에 도착했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맨손으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하자니,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처량 맞기 그지없었다. 

제기랄. 이예주는 언제까지고 시뻘건 미친놈 앞에서 약자이자 을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적한 얼굴로 땅을 팠다. 

“억! 왜 이렇게 깊게 묻혀 있는 거야…….”

그녀는 땅 위에 우거진 줄기 대가리를 잡고 낑낑대며 한참을 씨름했다. 

다 뽑아 내고 나니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헥헥, 숨을 몰아쉬다가 흙바닥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철푸덕 주저앉아 버렸다. 

“하…… 힘들어. 옥수수도 따야 하는데…….”

아련한 표정으로 텃밭 저편 먼 곳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중얼거렸다. 

먹은 것 없이 힘만 잔뜩 썼더니 금세 지치고 피곤했다. 

그때였다. 문득 어떤 냄새가 솔솔 풍겨져 왔다.

“……어?”

새콤하고 달큼한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많이 맡아 본 냄새인데.”

냄새는 알 수 없는 줄기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는 텃밭 더 안쪽에서 풍겨 오는 것 같았다. 

쩝쩝, 무의식중에 입맛을 다셨다. 꼬르륵하고 위장이 아우성 쳤다. 

홀린 듯이 일어난 그녀는 상큼한 향을 쫓아갔다. 

애써 캐고 딴 채소들을 잊지 않고 옷 위에 담은 이예주는 다른 한 손으로 촘촘하게 자라 있는 풀들을 꺾으며 텃밭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얼마 걷지 않아 그 군침 도는 달큼한 냄새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헐, 대박. 딸기야!”

눈앞에 별세계가 펼쳐졌다. 

어디서 많이 맡아 본 냄새 같더라니! 

엄마와 같이 살던 집을 나온 후에도 매해 철마다 딸기만은 꼬박꼬박 사 먹던 딸기 귀신이 바로 자신이었다.

“어흐흐흐! 딸기야, 딸기!”

이예주는 순간 옷에 채소를 담아 두었단 사실도 잊고 그것들을 와르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풍성하게 자라 있는 딸기나무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딸기! 딸기!”

가까이서 본 딸기나무의 줄기 끝에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주먹만 한 크기의 왕 딸기였다. 

혹시 람이 말한 채소들처럼 1000년간 변종된 것일까 싶어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예주가 아는 그 딸기였다.

“좀 덜 익었네…….”

조금 덜 익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이라고 치부하며 울상을 지었다. 

과육이 맺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끝 부분만 불그스름할 뿐 전체적으로 하얬다. 

달큼한 냄새에 속아 집어 먹었다간 시큼하고 텁텁하고 떫은맛에 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예주는 자꾸만 침이 고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며칠을 굶은 참에 좋아하는 과일이 떡하니 놓여 있으니 눈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덜 익어서 시고 떫을 텐데. 하지만 그럼 좀 어때? 으으, 먹고 싶다. 먹고 싶어 죽겠어.

흔들리는 눈으로 딸기를 바라보던 이예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덧 그녀는 양손으로 딸기를 똑똑 잡아 뜯어 옷 앞자락에 마구마구 담고 있었다. 

그나마 손에 가득 쥔 그것들을 입에 처넣지 않은 것은 산장 앞에서 서걱서걱 칼질을 하고 있을 미친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 같이, 같이 먹고 싶어서 따 왔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그녀는 중얼중얼 자기 합리화를 했다. 딸기를 따면 딸수록 향이 더욱더 짙어져서 뇌 속까지 딸기 즙으로 그득 차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지 천 안쪽에 담은 덜 익은 딸기들이 그사이 익어 버린 것처럼 붉어 보였다.

빨리 람에게 돌아가 먹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텃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힘겹게 캔 채소들도 잊지 않고 챙겨 들었다. 

“람! 람! 이것 봐요!”

뛰지 말라 혼낸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코뿔소처럼 흥분해서 달려오는 인간 여자를 본 람은 기가 막혀 실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예주는 그 앞으로 신나게 뛰어갔다. 

활짝 웃으며 달리는 그녀의 뒤로 달달한 잔향이 흩뿌려졌다.

“뛰지 말라고 방금 전 말했던 것은…….”

“람, 이것 봐요!”

해맑은 얼굴로 그에게 제 아랫배를 쑤욱 내밀어 보였다.

“이거! 이거 딸기예요! 이거 우리 같이 먹어요, 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곱게도 웃으면서 총총 뛰어 대는 이예주 때문에 람의 가슴이 다시 지끈 울렸다. 

“네, 네?”

이예주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그 재촉에 못 이겨 람은 무거운 입을 떼었다.

“……적색인 것은 가져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언제요?”

전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인간 여자가 휘둥그레 두 눈을 치떴다. 

“네가 텃밭으로 가기 전에.”

람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딸기에 눈이 먼 이예주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거 맛있는 과일이에요. 좀 덜 익긴 했어도…… 아니, 지금 보니 다 익은 것 같기도 하구.”

“벌써 먹은 것은 아니겠지.”

“같이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는데요.”

“잘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의 칭찬에 이예주는 순간 좀 설렜다. 

“그럼 텃밭으로 도로 가서 갖다 버리고 와.”

하지만 덧붙여지는 소리에 설렘은 곧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뭐, 뭐라고요?”

“도로 가서 갖다 버리고 오라 했다.”

“시, 싫어요. 이건 절대 싫어요! 먹고 죽더라도 먹을 거야!”

이예주는 남자에게 사수하듯 딸기를 담은 옷을 양팔로 꼬옥 껴안았다. 

얼굴을 덮치는 달달한 향에 문득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상했다. 꼭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큰한 게, 반드시 딸기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남자는 티 나게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을 내밀었다. 

분명 죽은 인면어를 잡았던 것을 보았는데, 그의 손은 오물 하나 묻지 않아 깨끗하기만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리 내. 내가 갖다 버리지.”

“시, 싫어요.”

“이리 내래도.”

“왜, 왜요! 대체 왜요! 왜! 먹게 해 줘요! 먹게 해 줘어!”

왜 내 딸기한테 그래! 다른 건 독 들었다니까 군소리 안 하겠는데, 제발 딸기만은! 딸기 한입만 먹어 보자고! 응?! 

“안 돼.”

하지만 람은 가차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예주는 그 손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 비틀거렸다. 

역시 취했군. 남자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너같이 어린 것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먹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데요? 먼저 가는 데엔 순서 없다 그랬어요.”

“인간들도 어린아이들에겐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지 못하게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술? 설마 술 말하는 거예요?”

남자가 갑작스럽게 딴소리를 했다. 

그녀는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숲에서 나고 자라는 적색의 것들은 이성을 둔화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다. 너처럼 어리고 취약한 것들이 먹게 되면 쉽게 알코올에 점령당해 환각을 보지. 심하면 중독이 되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다.”

쏟아지는 남자의 진지한 설명에 이예주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자신이 따 온 딸기 안에 술처럼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 있다고? 

“미친, 무슨 딸기에 알코올이 있어, 또. 흐흑…….”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저도 모르게 괴상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이예주는 이제 남자의 다리를 부여잡고 애원하는 듯한 얼굴로 주절대었다.

“저기요…… 저 정말 술 잘 먹어요. 나이도 안 어리구요!”

“…….”

“그니까. 몇 알만, 아니 딱 한 알만 먹게 해 주면 안 돼요? 제발.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말도 잘 듣고 그럴 테니까 제발, 제발…….”

그녀의 애원에 남자의 두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이예주는 간절하고 간절한 눈으로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안 돼.”

아악! 이예주는 절규했다.

“몰라요! 그냥 먹을 거야!”

“안 된다고 했다. 갖다 버리게 여기다 쏟아.”

그녀는 정말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았다. 

코앞에 딸기가 한 가득인데 먹을 수가 없다니! 

당장이라도 입에 처넣고 싶어 덜 익은 왕 딸기를 한 손으로 와락 잡았다. 

남자가 혀를 찼다. 

“스읍― 이예주.”

“…….”

“향을 맡고 이미 취했군. 어서 내려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적색 과일의 향을 잔뜩 들이마신 인간 여자의 얼굴은 점점 불그스름하게 변해 갔다. 

향을 마신 것만으로도 이렇게 얼굴이 벌건데, 맛을 보면 얼마큼 심한 주사를 부릴지 무서웠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이예주를 살살 달래었다. 

“예주야, 어서.”

“아, 진짜!” 

이 자식! 내가 이름 부를 때마다 덜덜 떠는 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부르는 거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쫘아악 끼치는 기분에 이예주는 저도 모르는 새에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쳐 버렸다. 

한가득 담겨 있던 것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향긋하고 달달한 향을 폴폴 풍기는 것들이 그대로 흙바닥을 뒹굴었다. 

채 줍기도 전에 남자가 그 위를 짓밟았다. 

순백의 딸기들이 진흙과 섞여 으스러졌다. 

그게 꼭 제 처지 같아서 이예주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기껏 맨손으로 흙 파서 캐고! 벌레 붙어 있는 것도 힘들게 따 왔는데, 칭찬은 못해 줄 망정 갖다 버리라고만 하고!”

그녀는 제정신이면 절대로 하지 못할 대거리를 했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향에 취해 열이 올라 연지라도 바른 것처럼 발그레한 얼굴이 다시 한 번 람의 눈앞에 어른어른 거렸다.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인간 여자가 들고 있는 덜 익은 과일에서 나는 풋내와는 다른 냄새였다. 

이것은 그러니까, 제 앞의 조막만 한 인간 여자를 볼 때마다 목이 타고 심장이 지끈거리고 또 기분이 미묘해지는 그런 것인데…….

람의 낯빛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하게 붉어졌다. 

역시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인간 여자는 입술을 벌려 불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딸기도 못 먹게 하고! 정말 이럴 거면 그냥 마을에 있는 게 더…….”

쪽― 

이예주의 입술 위로, 순간 물컹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끊임없이 조잘대던 입이 뚝 멈췄다.

분명 방금 전까지 건조한 얼굴의 남자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입술에 와 닿는 물컹한 감각에 정신을 차리자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예주의 눈이 순식간에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뭐야? 지금 혹시 입, 입 맞춘 거야? 너무 놀라 까무러칠 것 같은 심정에 그녀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하지만 비단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지, 가까이서 본 남자의 시뻘건 동공 또한 평소완 달리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자, 자기가 했으면서 왜 놀라고 그래?’

이예주는 혼란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먼저 남자를 덮친 것 같은 모양새가 돼 버렸지 않은가.

“이, 이게 무슨…….”

얼굴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 이예주는 얼굴을 확 붉히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녀는 양 볼을 덥석 부여잡는 커다란 손 때문에 도망갈 수 없었다.

쪽― 다시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도장 찍듯 꾹 닿았다. 

그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른 후 떨어져 나갔을 때, 이예주는 터질듯 달아 오른 얼굴로 울먹였다.

“흐흐으, 왜, 왜 이러세요.”

종잡을 수 없는 남자 때문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혈압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지게 만들다가,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렇게 사람 가슴을. 

그니까 왜 뽀뽀를…….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둘 데 없이 움직이는 이예주와는 다르게 남자는 언제 놀란 표정을 지었냐는 양 순식간에 낯빛을 갈무리했다.

“상이다.”

“상……?”

상장 줄 때, 그 상? 뽀뽀가 상이라고? 

이예주는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보았던 소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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