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를 갈며 남자의 말을 이행했다.
분통이 터져서 아무 풀때기나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다 제가 먹을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터덜터덜 주위를 둘러보며 걷던 이예주는 곧 채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텃밭이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어 텃밭보단 그냥 풀숲에 가까웠다. 드문드문 파져 있는 밭고랑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 위를 밟고 걸어갔을 것이다.
누군가 채소를 심어 키우다가 더 이상 가꾸지 않고 방치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살았던 집은 비록 크기는 아담했지만 앞마당과 뒷마당이 존재했던 단독주택이었다.
엄마는 철마다 앞마당에는 딸기나 토마토, 앵두나무의 모종을 심었다.
딸기가 열리는 5월이면 이예주는 등교를 위해 마당을 지나가다 새콤달콤한 냄새에 홀려 아직 덜 익은 딸기를 두어 개 따 먹었다.
시큼털털한 맛에 오만상을 찌푸릴 무렵, 뒤늦게 ‘예주야! 체육복 가져가야지!’ 하고 뛰어나오던 엄마에게 등짝을 얻어맞곤 했었다.
이놈의 가시나, 엄마가 익을 때까지 따 먹지 말라고 했지! 네가 오며 가며 다 뜯어 먹어서 딸기 구경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찰싹찰싹, 양손으로 사정없이 등을 때리면서도 체육복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주는 엄마와 그 뒤로 보이던 집의 정경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아 이예주는 황급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물기로 흐릿해진 눈이 맑아지고 눈앞에 어렸을 적 살던 집 앞마당이 사라지자 그녀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보살피던 사람의 손길이 끊겨 망가진 텃밭을 내려다보며 이예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인생이 쓰레기처럼 망가지지 않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되돌려야 망해 버린 인생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녀는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아니, 사실 이예주는 자신이 과연 과거로 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 한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과거로 되돌아가야 하는 사람이란 것을 번번이 잊어버린다.
소중한 것이 생겼다.
자신을 위해 죽음을 불살랐던 조롱이.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며 인면어를 칼로 푹푹 들쑤시고 있을.
“……람.”
흐흑, 저를 좋아한단 여자를 가차 없이 부려 먹는 그 남자의 행태를 떠올리며 이예주는 작게 흐느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가 그런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을 좋아해서…….
“정신 차려. 늦으면 그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예주.”
그녀는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자신을 일깨웠다.
얼른 채소라도 많이 따 놔야지. 남자가 또 밥을 준답시고 자신을 미끼로 써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저리를 치던 이예주는 아득 이를 악물고 눈을 빛냈다.
갑자기 없던 의욕이 솟구쳤다.
그녀는 전투적으로 텃밭을 훑기 시작했다.
땅이 기름진 건지, 다행히 주인의 손길이 끊겼음에도 텃밭 안의 작물들은 병충해로 시들시들하지 않고 아직 싱싱했다.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텃밭 안으로 들어섰다.
텃밭의 크기가 생각보다 넓었다.
크고 기다랗게 자란 식물들이 우거져 있는 탓에 꼭 숲 안에 작은 숲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 가지!”
이쪽저쪽 둘러다 보던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식물은 줄기 끝에 축 늘어져 있는 보랏빛 열매였다.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간 이예주는 약간 당황했다.
마트에서 흔히 보던 손바닥만 한 크기가 아닌, 무슨 팔뚝만 한 대형 가지가 잔뜩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 가지 맞겠지?”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에 먹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생김새는 가지가 맞는 것 같은데.
이예주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두어 개를 비틀어 땄다.
더 많이 챙길까 잠시 고민했지만, 또 다른 익숙한 모양의 열매가 그녀를 유혹했다.
“옥수수도 있네?”
가지와 크기를 바꿨는지 바로 옆에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옥수수가 껍질에 쌓여 매달려 있었다.
덜 큰 건가. 옥수수는 집에서 키워 본 적이 없어 얼마나 큰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별생각 없이 그것도 똑 따 버렸다.
어쨌든 먹을 수 있는 익숙한 것들이 많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외에 당근이나 양파, 감자 따위의 뿌리채소들은 엄마가 사시사철 키우던 것들이었기에 잎이 나 있는 모양만으로도 쉽게 찾아 뽑을 수 있었다.
뽑아 놓고 보니 당근은 주황색이 아닌 노란색이었고, 양파는 껍질이 파란색-혹시 몰라 껍질을 까 보니 다행히도 뽀얀 속살을 내보였다-이었다.
감자는 크기가 많이 작았다.
그 옆에 있는 녹색 고추도 땄다.
오이 고추처럼 알이 실해서 기분 좋게 여러 개를 따고 있었는데, 게 중 하나에 벌겋고 기다란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아무튼 평소 알던 채소와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예주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캤다.
손이 모자라서 중간에는 결국 입고 있는 로브 자락을 앞치마처럼 쳐들고 그 안에 담아야 했다.
점점 옷이 묵직하게 가라앉았지만 그녀는 열심히 수확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으윽! 무거워.”
땅에 박혀 있는 허연 것이 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저앉았던 이예주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신음하고 말았다.
어느 사이 이렇게 많이 수확한 건지 옷자락 위에 여러 종류의 작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무거워서 낑낑대면서도 이예주는 뿌듯함을 숨길 수 없었다.
제가 이런 당근, 양파, 감자 같은 뿌리채소까지 용히 알고 캐 온 것을 알면 저를 무시하던 그 남자가 놀라서 까무러치겠지?
그녀는 실실 웃으며 람이 있는 산장 앞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저기요! 람! 람!”
막 인면어의 내장 해체를 끝낸 람은 문득 저를 부르는 인간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텃밭에 자란 식물이란 식물은 있는 대로 뽑아 온 건지, 앞으로 펼쳐 든 옷 위에 이것저것 잔뜩 쌓아 올린 인간 여자가 뒤뚱거리며 뛰어 오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 한가득 웃음이 걸려 있었다.
티 한 점 없이 해맑은 웃음이 온전히 람에게로 쏟아졌다.
불현듯 왼쪽 가슴이 지끈거렸다.
전에도 저것을 보고 어떠한 단어를 떠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어라 불렀더라.
멍청한 것? 실없는 것?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람은 다가오는 인간 여자를 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인간 주제에 자신을 보며 저렇게 환히 웃는. 곱고 어여쁜…… 그래, 어여쁜 것.
거기까지 생각했을 즈음, 가까워지던 인간 여자의 몸이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었다.
“으헉!”
“조심……!”
채소가 아까운 나머지 옷자락을 쥐고 있는 손을 떼지 못한 이예주는 중심을 잡을 새 없이 무서운 기세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람의 빨간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인면어를 자르기 위해 들고 있던 칼을 나룻배 안으로 집어 던지고 넘어지는 인간 계집을 향해 성큼성큼 뛰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처박을 뻔한 것을 간신히 낚아채어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살벌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넘어질 뻔했지 않아.”
“어. 어…….”
“정신을 어디다 빼 두고 다니는 것이냐, 멍청한 것.”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욕 세례에 이예주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시뻘건 눈동자가 무서운 빛을 내며 자신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금 억울해졌다.
“빠, 빨리 기어 오라고 그래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다가 다 엎어서 뭉개지고 으깨지면. 그 흙투성이가 된 것들은 네가 다 씹어 먹을 건가?”
“……히잉.”
이예주는 붕어처럼 입술을 쭉 내밀었다.
멍청하다고 할 것까진 없잖아…….
또 구시렁거리려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내밀어진 입술을 바라보던 람의 표정이 일순 묘해졌다.
불그스름하고 통통하니 바로 앞에서 어른어른하는 입술.
그러고 보면 요즘, 인간 계집이 입을 삐죽거릴 때마다 그 입술이 람의 눈에 자주 들어왔다.
마치 집어 먹어 삼켜 달라고 그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어디선가 솔솔 달큼한 냄새가 풍겨 왔다. 그는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 내 채소들! 어디 떨어진 건 없지?”
람이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굳어 있던 때, 이예주는 퍼뜩 채소 생각에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뭉그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았을까 열심히 살피던 그녀는 별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는 대뜸 들고 있는 것을 람에게 들이밀었다.
“그래도 많이 따 왔어요! 여기. 어때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의기양양해 보였다.
“이거 봐요, 람. 가지가 무슨 팔뚝만 해요. 이렇게 큰 가지 완전 처음 보는데…… 오이는 왜 이렇게 울퉁불퉁해. 수세미를 착각해서 가져온 건가?”
“…….”
“헉! 뭐 방사능 맞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하, 너는…….”
수북이 쌓인 야채 더미들과 꼴사납게 뒹굴 뻔한 것이 방금 전이었는데, 그새 잊기라도 한 듯 제가 따 온 것들을 자랑하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멍청하고 어린 인간 여자였다.
이런 어린것을 가지고 잠시나마 묘한 기분을 느낀 자신이 한심해서 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이예주는 눈치 없이 울상을 지었다.
“왜요? 정말 여기 방사능 지역인 것…….”
“그딴 건 없어.”
징징거림을 단칼에 자른 그는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배 부근에 쌓인 채소들 중 가지 모양의 채소 하나를 움켜쥐었다.
“이건 못 먹는 것이다.”
휙, 남자가 성의 없이 가지를 옆으로 집어 던졌다.
어? 내, 내 가지! 이예주가 황급히 날아가는 커다란 가지를 따라 눈동자를 돌리다가 얼빠진 표정으로 람을 다시 돌아보았다.
“왜요? 가지, 먹는 거예요! 가지 볶음 몰라요?”
“복용하면 설사를 일으키는 독성이 들어 있는 것인데. 탈 나고 싶으면 볶아 먹던지.”
“내 감자랑 호박!”
“이것들도 구토와 현기증을 일으킨다.”
남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채소들을 집어 던졌다.
바구니 삼아 들고 있던 옷 앞이 금방 가벼워졌다.
“이것.”
“고추! 그, 그건 벌레 붙어 있는 것도 무릅쓰고 간신히 따 왔구만. 왜요!”
“맛이 쓰고 비려서 식재료로 쓸 수 없는 것이다.”
“고추가 쓰긴 뭐가 써!”
“이것 또한.”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열심히 따 왔던 작물들이 눈앞에서 휙휙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예주는 당황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왜 기껏 따 온 것들을 다 집어 던지는 걸까.
남자가 던진 것들 모두 바닥에 세게 부딪혀 여러 파편으로 나뉜 채 흙 위를 뒹굴었다.
그가 이예주를 향해 더욱 환장할 소리를 해 대었다.
“알아서 구분 잘한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영 시원찮군.”
“텃밭이잖아요! 텃밭! 텃밭 아니냐고요!”
“…….”
남자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담 텃밭은 확실하다는 소린데.
“텃밭이 아니라 무슨 독 밭이야? 왜 먹지도 못하는 이런 것만 기르는데요? 와, 주인 진짜 누구야?”
“인간들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들이 신인류들한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니까.”
텃밭 주인을 두둔하듯 슬며시 대꾸하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가 도끼눈을 부릅떴다.
“그럼 왜 나보고 가서 뜯어 오라고 한 건데요?”
“인간이고 또 제가 먹을 것이니, 뭐가 먹는 것이고 못 먹는 것인지 더 잘 구분할 줄 알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나 있는 것 모두 잡아 뽑아 올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일 줄은 몰랐군.”
“무식? 무식?! 이, 이……!”
“여기다 내려놓고 들고 있는 것들만 다시 가서 두어 개씩 더 가져오도록.”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부르르 몸을 떠는 그녀를 남겨 두고 남자는 대가리가 잘린 인면어가 있는 나룻배 쪽으로 휑하니 걸어갔다.
이예주는 격렬히 항의했다.
“그렇게 타박 줄 거면 차라리 같이 가요, 같이 가!”
“그럼 내가 뜯어 올 테니 네가 이것을 마저 자르고 있을 텐가?”
남자가 느른한 투로 이야기하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식칼을 주웠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람은 속이 꽤 착잡했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그녀를 잡아채기 위해 들고 있던 것도 집어 던진 채 한달음에 달려간 방금 전의 자신 때문에.
왠지 뒷목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그는 배가 갈린 채 누워 있는 인면어 위로 칼을 세게 내리꽂았다.
푸욱― 질척이며 살을 헤치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자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헉 하고 밭은 숨을 내뱉었다.
서, 설마. 텃밭 주인 욕 좀 했다고 저 남자, 화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