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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73)화 (174/319)

까만 머리칼에 박혀 있는 그녀의 두 동공이 혼란스러움에 양옆으로 흔들렸다. 

남자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책으로 본 그 몇 구절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을 겪었기에 고작 머리를 만지는 일에 ‘먹을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는 걸까. 

“너무…… 너무 까매서 예뻐요.”

너무 예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래도 먹고 싶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요. 

이예주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손끝에 닿은 남자의 머리칼은 반들반들한 흑요석을 아주 얇게 저민 것처럼 예뻤다. 

제가 이 머리카락을 가진다면 먹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신줏단지 모시듯 모셔 놓고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하루하루 소중하게 보관할 것이다. 

“원래 눈도 이렇게 검은색이었는데 이, 인간들이 당신을 뜯어 먹으려 해서…….”

‘인간들’이라고 지칭할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서 눈동자 색이 그렇게…… 변한 거예요?”

이예주는 말하는 내내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그전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마쳤다. 

소심하게 머리끝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질 만한데도 남자는 쉬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자신 또한 인간이니까. 그가 증오하고 또 혐오하는 대상이니까. 

그 사실에 꼭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예주는 까만 머리카락을 열심히 쓰다듬는 것으로 애써 우울함을 떨쳐 냈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람의 머리 근처에서 손을 떼어 냈다.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끔히 포기했다. 

그런데 돌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화가 나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 때문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어 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나?”

질문에 대한 답을 받기보다는 도리어 또 다른 질문을 받은 것에 당황하던 이예주는 이내 곰곰이 남자의 말을 되새겼다. 

너무 화가 나서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어 가는 경험? 

글쎄.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살면서 그런 적이 두어 번 있지 않았을까? 

이곳에 온 후엔 제 목숨 챙기기도 바빠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기도……. 

아, 한 번 있었다. 동쪽 대륙 마을 광장에서 자신을 밀어 수레에 깔려 죽을 뻔하게 만들었던 붉은 개 때문에.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던 그년을 남자가 옹호했을 때.

“어…… 이, 있었던 것 같기도요.”

그때를 떠올리니 지금도 울분이 치솟는 것 같았다.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예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험이 있음을 토로했다. 

그러자 곧바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조차 에너지를 다스릴 수 없을 만큼 격분하게 되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

“그것은 모체 에너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의식을 가진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지. 잠에 들기 직전에 보았던 것은, 인간들의 피처럼 온통 검붉은 색뿐이었다.”

말을 끝마치고 람은 잠깐 침묵했다. 

뒤에 있는 탓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이예주는 남자가 어떤 생각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목소리만으론 그가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서글퍼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겐 인간들을 모두 죽이고 박멸해야 한다는 투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붉은 기운들이 들끓었지. 의식 따윈 차릴 새도 없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 에너지의 흐름들이 제멋대로 날뛰었기 때문이다.”

람의 말투는 남 얘기를 하듯 무뚝뚝하고 또 무덤덤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의식을 차리고 보니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색처럼 몸통 한구석이 이렇게 붉게 변해 있었다. 후에 너희 인간들에게 듣자 하니 그 미칠 듯하던 붉은 기운이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이라고 하더군.”

“…….”

“한 줌 남은 검은 안개들이 말했다.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이 그대로 새겨져 이리 변했으니 다른 감정을 알면 원래의 색을 되찾을지도 모른다고.”

남자가 감정을 알아내라는 괴상한 요구를 하게 된 이유를 드디어 알려 주었다.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고저가 없어서 이예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하루아침에 머리카락 전체가 하얗게 새어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남자도 그런 것일까. 분노와 증오로 눈앞이 시뻘겋게 점철되어서, 종내에는 그 시뻘건 색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배인 걸까.

그런……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렇게 담담해요? 

누군가 자신을 만질 때면 항상 뜯어 먹으려는 건지 가늠해야 하고, 분노와 증오 때문에 가지고 있던 고유의 색까지 변해 버렸는데. 

이예주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자신이 키우던 애완견을 죽였다고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봉구도, 수학여행에서 죽은 친구들도, 엄마도. 

남자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남 이야기 하듯 무심하게 말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말이 입에서 맴돌아 이예주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묻지 않았다. 

대신 남자의 어깨 위를 짚고 있던 팔을 앞으로 쑥 뻗어서―

“……내가. 내가, 꼭 찾아 줄게요.”

람은 걷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등 위에 올라타 있는 여자가 느닷없이 팔을 뻗어 뒤에서부터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팔이 목 아래를 휘어 감았다. 

한 손으로 꽉 쥔 채 힘을 주면 그대로 똑 부러질 듯 얄팍한 팔목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등을 내준 상태에서 인간 계집이 그대로 온 힘을 다해 목을 조른다면 아무리 자신이라 할지라도 꽤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경계하지 않았다. 

목을 휘감은 팔에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는 눈치라면 등에 업힌 인간 여자를 곧바로 집어 던질 수 있었다. 

아니면 팔을 낚아채 그대로 잡아 뜯는다든지. 

때마침 인간 여자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하나만으로 충분히 그녀의 본의를 의심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파편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 여자가 단내를 폴폴 풍기며 귓가에 작게 속살거리는 말을 듣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당신은 빨간색보다 검은색 눈동자가 더 잘 어울리니까…….”

“…….”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 다른 감정을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내가 꼭 찾아 줄 거야. 그래서 당신이 나를 시뻘건 눈이 아닌, 까만 눈동자로 보게 만들 거야. 

다짐하듯 재차 중얼거리며 이예주는 조금 더 힘을 줘서 람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를 업은 채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남자의 걸음이 다시 움직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후에도 이예주는 남자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간간이 피어 있는 뤼미에르 꽃에서부터 흘러나온 빛이 그들이 걷는 땅 위로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람과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이예주의 그림자가 틈 하나 없이 붙어 있어 꼭 한 사람의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 그것을 알아본 이는 없었다.

*       *       *

“이, 이거…… 먹을 수는 있겠죠?”

허옇게 눈깔을 뒤집은 채 죽어 있는 인면어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예주가 물었다. 

남자는 별 동요 없는 얼굴로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질을 해야겠지.”

“저는 못해요.”

“그럼 굶을 수밖에.”

“아아악!”

악몽 같은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비명 질렀다.

“왜 그래요, 진짜! 이거 잡는다고 몇 시간을 더 굶었는데! 씨잉!”

억울함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남자는 스윽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정말 이대로 굶는 거야? 진짜?

“어, 어디 가요! 이렇게 잡아 놓고 진짜 밥 안 줘요? 네?!”

당황한 이예주는 열린 산장 문 앞으로 포르르 쫓아갔다. 

그녀를 완벽하게 무시한 채 남자가 찬장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고 다시 문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커다란 식칼이 들려 있었다. 

문을 막고 불만스레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인간 여자를 향해 칼끝을 척 들이밀고 까딱이자 여자가 사색이 되어 헐레벌떡 비켜섰다. 

그 꼴에 람은 그녀 모르게 피식 웃음 지었다. 

손을 걷어붙인 그는 식칼을 나룻배 위에 있는 인면어의 아가미 바로 밑 부위에 꽂았다. 

대가리부터 잘라 내려는 심산이었다. 

“치, 한 번씩 그렇게 놀려 먹으면 좋아요? 기분이 막 좋아져요?”

인면어를 손질하기 시작하는 람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투덜댔다. 

그냥 좋은 말로 해 주면 좀 좋아? 꼭 이렇게 사람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아야 속이 시원하냐고. 

람은 내심 뜨끔하여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한 번씩 골려 먹으면 바로 불을 내뿜으며 반응하는 제 모습이 얼마나 재밌는지 어린 인간 계집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다 될 때까지 산장 안에서 좀 누워 있을게요.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서…….”

이예주는 칼질을 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기회를 틈타 스리슬쩍 몸을 빼려 들었다. 

그러나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놈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그녀를 재빨리 낚아챘다.

“스읍, 어딜.”

“억!”

후드가 억세게도 잡힌 탓에 넘어질듯 휘청거리던 이예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획 뒤돌았다.

“씨이! 후드! 후드! 목 졸리니까 후드 잡지 마요!”

“손질하는 동안 산장 뒤뜰에 가서 먹을 수 있는 채소가 있나 가서 보고 와.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가져오도록.”

“제가요?”

이예주는 저를 가리키며 눈을 댕그랗게 떴다. 

그새를 못 참고 자신에게 또 뭔가를 시켜 먹으려는 모양이다.

“저 못해요. 뭐가 먹을 수 있는 건지 어떻게 알아요?”

“외향이나 색깔을 보면 뭐가 먹을 수 있고, 없는 건지 대충 판단할 수 있을 것 아니냐.” 

“그, 그건…… 전 잘 몰라요. 여기 지리도 잘 모르는데 그런 걸 어떻게…….” 

“어린 것도 모자라, 그도 판단 못할 정도로 멍청하기까지 한 것인가?”

데리고 다니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군. 

혼잣말과 같이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간신히 눌러놓은 분노 게이지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 멍청해서 데리고 다니기 힘들어?! 

“머, 멍청?! 와, 멍청!”

“멍청한 게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먹을 것도 구분치 못하는 것을 똑똑하다고 해 주어야 하나?”

“파, 판단해요, 판단해! 아오! 판단해서 가져오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럼 가 봐.”

얘기 끝났다는 듯 남자는 인면어로 깔끔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예주는 홧김에 산장 뒤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래! 그깟 먹을 거! 내가 다 따다 준다 이거야! 1000년 후라고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뭐 다르겠어? 

없는 투지까지 활활 불태우며 이예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숲에서 나는 붉은색 섞인 것들은 먹지 못하는 것들이니 가져오지 마. 그리고 꾸물대지 말고 바로 기어 오도록.”

“…….”

“아까처럼 또 태평하게 괴상한 노랫말이나 떽떽대다가 아무것도 손에 든 것 없이 되돌아오면…….”

“걱정 마요! 금방 올게요! 잔뜩 따서 금방 온다고요!”

뒤에서 나지막이 덧붙여 온 협박에 이예주는 땅이 놈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발로 퍽퍽 밟아 걸으며 소리쳤다. 

걱정 말라고! 사내자식이 잔걱정만 많아 가지고! 

그녀는 가슴을 탕탕 치며 당당하게 그깟 채소, 네놈보다 훨씬 더 명석하게 판가름해서 가지고 올 것이라고 소리쳤다. 

나, 그래도 엄마랑 같이 살 때 텃밭 좀 길러 본 여자야, 왜 이래! 

하지만 그 정신 승리는 얼마 가지 않았다. 

참으로 기묘하게도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자꾸 놈에게 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뭐가 아닌 걸까. 곰곰이 고민하며 걷던 이예주는 산장 뒤뜰에 완전히 도착한 후에서야 남자의 도발에 홀라당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아아악! 

텃밭으로부터 인간 여자의 괴성이 들리자 남자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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