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등을 내주고 자세를 낮추는 람을 바라보던 이예주의 눈이 순식간에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 하는 거예요?”
“업히라고.”
“……왜요?”
멍청한 질문임을 이예주 자신 또한 잘 알았다. 업히라는데 ‘왜요’라니.
남자 또한 그녀가 멍청한 짓을 곧잘 한다는 것을 아는 건지 딱히 다른 타박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별 희한한 것을 다 묻는다는 듯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못 걷겠다며.”
“…….”
“그러니 업히라고 했다.”
이예주는 자신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짐을 느꼈다.
아니, 얼굴인가? 이상해지는 게 정말로 얼굴일까? 아니면…… 가슴인가?
주위가 온통 울창한 나무와 무성한 풀숲이어서 그런가.
그녀는 이 상황을 어디선가 겪어 본 듯한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남자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북쪽 대륙이었다.
하루 종일도 모자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숲을 걷고 또 걸어야 했던 그 지독한 강행군 속에서, 몇 번씩이나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라고 주저앉았던 그때.
처음에는 좀 봐주는가 싶던 시뻘건 미친놈이 두 번째에선 어떻게 나왔더라.
자빠져 앉아 있다가 포식자에게 잡아나 먹히라고 악담을 퍼부은 것은 애교요, 나중에 가서는 따라오든지 말든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만 가던 것이 바로 제 앞에 몸을 숙이고 있는 놈이었다.
번번이 빨리 일어나라고 닦달하던 조롱이가 아니었으면 이예주는 남자의 손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든가, 아니면 결국 버림받아서 숲을 헤매다가 종국엔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땐 그렇게 원망스럽고 짜증 났던 미친놈이 이젠 제 앞에 순순히 등을 내주고 업히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조롱이는 과연 알까?
“……정말요?”
믿기지 않았다. 남자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소심하게 확인했다.
“그치만…… 무거울 텐데요? 배, 배도 끌고 가야 하잖아요.”
“그럼 네 발로 계속 걷던지. 대신 도착할 때까지 입도 벙긋 말고 네 밥이 엎어지지 않도록 잘 잡고 있어야 한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만…….”
“다섯, 넷…….”
“자, 잠깐만요! 아 진짜!”
느닷없이 남자가 카운트다운을 세는 바람에 이예주는 앞뒤 잴 것 없이 남자의 등 위로 온몸을 날렸다.
“어, 어!”
제대로 자세로 잡지 못한 상태인데, 물건 들리듯이 몸이 위로 덜렁 들렸다. 시야가 한순간에 치솟았다.
무슨 철인 3종 경기도 아니고, 남자는 자신을 등에 업고 한 손으론 배를 끌었다.
그녀가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뿐하게 움직이는 그였지만, 이예주는 그래도 걱정이 됐다.
“괘, 괜찮아요? 안 무거워요?”
“어린 것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역시 피곤한 일이군.”
“어리긴 누가요!”
괜찮은지의 여부나 대답할 것이지 딴소리를 하는 남자 때문에 발끈한 이예주가 곧바로 걱정 어린 태도를 집어치웠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는 왜 매번 어리다고 무시하는 걸까?
그녀가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이 취급받을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이곳에 처음 와서 가방을 잃어버린 탓에 남자에게 자신이 다 큰 성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람의 코앞에 민증을 들이대며 ‘이거 봐! 나 이런 사람이야. 1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외칠 수 없음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저번부터 자꾸 어리다, 어리다 하는데, 저 다 컸다니까요?”
“무거우니 버둥거리지 마. 떨어진다.”
진짜 떨어뜨릴 듯이 엉덩이를 바치고 있던 남자의 팔이 헐거워졌다.
이예주는 기겁을 하며 남자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으허억! 진짜아!”
“꽉 잡아.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징징대지 말고.”
“징징…….”
부루퉁한 얼굴을 하면서도 떨어지긴 싫었던 이예주는 람의 허리에 감고 매달렸던 다리를 다시 한 번 꽉 조였다.
그녀의 입이 다물리니 그들이 걷는 숲길 위로 적막이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남자는 이예주를 업고 나룻배를 끌며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숲길을 잘도 내려갔다.
혹시나 짐이 될까 몸에 힘을 바짝 주고 있던 그녀는 흔들림 없는 남자의 걸음걸이에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무심결에 내려다본 바닥은 아찔할 만큼 높았다. 이예주는 남자가 얼마나 키가 큰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람의 등판은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위에서 뒹굴어도 될 만큼 드넓고 단단했다.
그의 어깨 죽지에 이마를 콩콩 박아 보던 그녀는 이내 그 위에 제 머리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확실히 남의 다리를 빌려 걸으니 세상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아까 전 망할 놈의 인면어를 잡는답시고 자신을 미끼로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이 미친놈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마자 대뜸 업어 주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복잡해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는데. 가끔 다정해지는 모습을 보면 자꾸만 뭔가를 바라게 된다.
그러다 아닌 것을 알고 절망하다가 또 이렇게 잘해 줄 때면 바람결에 흔들리는 뤼미에르 줄기처럼 속절없이 가슴이 떨렸다.
과연 이 남자가 밀당을 잘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것 하나에 와르르 무너지는 제가 구제 불능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이예주는 조금 울적해졌다.
“……치, 정말 병 주고 약 주고. 완전 잘하는 거 알아요?”
남자의 어깨를 이마로 두어 번 툭툭 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불만스러움이 상당히 내포된 행동이었다.
그래 놓고 혹시라도 기분이 상한 남자가 자신을 바닥에 내동댕이칠까 두려워 이예주는 람을 끌어안은 팔과 다리에 힘을 잔뜩 줬다.
남자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너에게 병 준 적 없다.”
“왜 없어요? 제가 고혈압이었다면 당신 때문에 전 이미 죽었을 거예요.”
이예주는 체력이나 지구력이 형편없을 뿐, 고혈압이나 저혈압과 같은 유전병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진지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겐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
“내가 네게 병을 줬다면 고혈압 같은 걸로 곱게 죽진 못했겠지.”
그런 살벌한 말을 참으로 산뜻하게도 한다며 다시 울컥했지만, 이예주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람의 말에 동의했다.
첫 만남부터 양손 가득 쥔 것처럼 인간들의 잘린 머리통을 바리바리 싸 들고 걸어오던 남자였다.
다리 없는 노망난 노친네를 죽일 땐 또 어쨌던가.
머리통을 터뜨려서 죽였다. 머리통을 무슨 버블티 먹다가 이빨로 타피오카 펄을 터뜨리듯 팍―!
지금껏 그가 해 왔던 어마어마한 범죄들을 생각하면 이예주는 비록 지속적으로 살해 협박을 당해 왔을지언정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잘리지 않은 채 온전하게 숨이 붙어 있는 편이었다.
그녀의 얼굴색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갈 즈음이었다.
남자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이전에 전염병을 풀어 인간들이 모여 살던 마을 하나를 괴멸시켰던 적이 있다.”
“저, 전염병요?!”
아니, 그런 짓도 할 수 있단 말이야?
무슨 신인 양 전지전능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능력에 이예주는 숙였던 이마를 번쩍 쳐들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새어 나와 죽게 되는 끔찍한 병이었지. 결국 인간 놈들이 해독 작용을 하는 약초를 찾아내어 전염병으로 박멸시키겠단 계획은 실패했지만 말이야.”
“그, 그런…….”
“눈구멍, 콧구멍, 귓구멍에서 줄줄 피를 쏟는 것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던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
머릿속에서 절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눈과 코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들, 좀비 떼처럼 비칠비칠 걸어 다니며 마을 안을 누비던 사람들이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 내며 괴성을 지르는데…….
“어린 것이고 늙은 것이고 할 것 없이 죽어 나갔지. 그 때문에 마을 근처를 가로지르던 강줄기 하나가 완전히 피바다가 된 적이…….”
“……우욱!”
정말 근처에 피바다라도 있는 것처럼 어디선가 역한 피비린내가 훅 몰려왔다.
이예주는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남자가 선심 한 번 크게 쓴다는 듯 말했다.
“아, 넌 혈액 공포증이 있다고 했던가? 그럼 그만 말하지.”
그러나 그녀에게는 전혀 선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노인의 머리통이 터지는 것을 보고 기절한 자신이 다시 깨어났을 때 횡설수설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자신을 놀려 먹는 모습에 되레 분통이 터졌다.
“이, 이미 다 말했으면서……! 으윽, 토할 것 같아요.”
“내 위로 오물을 쏟기 전에 집어 던져야겠군.”
“안 쏟아요!”
파리하게 질린 낯빛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예주는 다시 남자의 어깨 위로 이마를 퍽 처박았다.
그 모습이 꼭 겁에 질린 어린 것이 제게 아양을 떠는 것 같아 람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당연하게도 이예주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그녀가 이마를 처박는 것을 기점으로 그들의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올라오는 토기를 참던 이예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속이 편해졌다.
격렬하게 위장을 뒤틀던 역함이 사라지자 기분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높아진 시야가 괜히 제 키 같아서 그녀는 붕붕 다리를 흔들며 이쪽저쪽 고개를 돌렸다.
올라올 때와 별다를 바 없는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문득 턱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렸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남자의 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람의 까만 머리통이 한 손에 잡을 수 있을 만큼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턱 근처에 닿는 머리카락들이 그녀가 내뿜는 숨결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예주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람은 자신보다 머리 한 개 하고도 반이 더 높을 만큼 장신이었기에 그의 머리 위를 내려다볼 기회는 전무했다.
이토록이나 쉽게 그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게만 다가왔다.
이예주는 비듬이나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정수리 위로 저도 모르게 불쑥 손을 뻗었다.
그러다 손끝에 머릿결이 닿을 듯 말 듯 할 때 멈칫하고 움직임을 그쳤다.
“……있잖아요.”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머리카락…… 만져 봐도 돼요?”
먹물을 들이부은 듯이 한 올 한 올이 완벽한 검정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토종 한국인인 자신보다 더욱 새까만 머리칼이었다.
보통 머리 색이 진하면 머릿결이 뻣뻣하고 두껍기 마련인데, 람의 머리칼은 부들부들하고 뽀송뽀송해 보이기만 했다.
남자는 이예주의 물음에도 묵묵부답으로 한참을 더 걸었다.
그의 머리 근처에 멈췄던 손을 움찔거리며 그냥 동의 없이 만져 버릴까 고민하던 때만 해도 이예주는 완벽한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제 물음에 대답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 것이라고.
한참 후에 스치듯이 그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뜯어 먹을 것이 아니라면.”
이예주는 순간 들이쉬던 숨을 훕 하고 멈췄다.
처음에는 제가 안 된다는 소리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크게 홉뜬 눈으로 놓쳐 버린 남자의 말을 더듬더듬 다시 되풀이해 보았는데, 아무리 되풀이해 보아도 허락의 말과 같아 보였다.
그런데 머리를 만지라고 허락하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너무 무서운 소리였다.
뜯어먹을 것이 아니라면 만져도 좋다고?
다시 한 번 람의 말을 되새기던 이예주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근치에서 겉돌던 손을 남자의 머리 위에 턱 내려놓아 버렸다.
예상했던 것만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사르르 감겼지만, 그녀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왜, 왜…….”
“…….”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크게 치뜬 눈으로 이예주가 다시 되물었다.
그러나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구절 하나 때문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대답하지 마요.”
―검은 파편이다! 검은 파편! 검은 파편!
검은 파편을 알아본 인간은 벌을 내리기 위해 검은 파편에게서 검은 안개를 빼앗아 뜯어 먹었다. 검은 파편은 겁에 질려 간신히 남은 검은 안개 한 줌을 타고 도망쳤다.
“안 뜯어 먹어요. 아무리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다고 해도 절대 안 뜯어 먹을 거예요.”
이예주는 남자에게서 무슨 대답을 들을지 무서운 사람처럼 연거푸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머리카락 끝을 쓰다듬었다.
깨지기 쉬운 얇은 유리 다루듯 아주 살살.
만지는 건지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조심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