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8)화 (169/319)

한눈에 봐도 낚싯대였다. 

가방에 대체 뭘 이것저것 쑤셔 담았기에 산을 오르는 내내 무겁고 덜그럭거리나 싶더라니. 

농락을 당해 꽥꽥 불을 쏟아 내는 이예주와는 달리 남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편식하느라 생선을 싫어할 줄은 미처 몰랐군.”

“편식하는 게 아니라……!” 

야, 이 자식아! 맞짱 뜨자! 가슴을 한 번 쾅 하고 내리친 이예주는 후후, 심호흡을 한 후 침착한 얼굴로 다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제 말은 그니까 왜 처음부터 낚시를 하러 간다고 언질도 안 주냐 이 말이죠. 그리고 전 낚시 같은 지루한 거 싫어한단 말이…….”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니 기대해도 좋다.”

“…….”

그만 닥쳐. 이예주는 더 이상 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기대해도 좋다는 남자의 말 또한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녀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눌러 참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다시 둘러보아도 호수의 크기는 정말 방대했다. 

찰랑거리는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호수 주변을 둘러보던 이예주는 무언가를 보고 입을 벌렸다. 

넓은 호수를 둘러싼 숲 너머로 가시 장벽이 높다랗게 자라 천장을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제야 호수 주위를 환히 볼 수 있는 것이 근처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뤼미에르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장에서 이렇게나 한참 걸어왔는데. 이토록 드넓은 호수까지 감싸 안은 뤼미에르의 뿌리의 거대함에 이예주는 아연해졌다. 

분명 보이지 않는 먼 호수의 끝까지 가시 벽으로 뒤덮여 있을 것은 틀림없었다. 

무슨 요새도 아니고 말이야. 

호숫가와 그 정경 전체를 감싸고 있는 가시 장벽들을 천장까지 쭈욱 훑던 이예주는 불현듯 천장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가시 장벽으로 이루어진 천장 어느 한 부분에 농구공만 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날이 밝았다는 람의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 구멍으로 환한 햇빛이 새어 들어와 무대 조명처럼 수면 위를 반짝반짝 비췄다.

“저기…… 땜빵이 있는데요?”

한동안 반짝거리는 호수를 넋 놓고 바라보던 이예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빛이 새는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람이 그것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인간 여자의 말마따나 틈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빡빡한 가시넝쿨 틈의 유독 한 부분만 뻥 뚫려 있었다. 

다행히 누군가 인위적으로 구멍을 뚫어 놓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저 엉켜 있는 덩굴들이 자연스럽게 끊어진 형태였다.

“몇 송이 죽었나 보군.”

“뤼미에르 꽃이요? 헉, 꽃이 죽었어요? 왜요?”

“글쎄. 오며 가며 돼지 한 마리가 짓밟아 죽인 것일 수도.”

“이곳엔 몇 년째 들짐승이 안 산다면서요.”

이예주가 볼멘소리로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어쩐 일인지 남자가 묘하게 입을 다물고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밥 달라고 꿀꿀대는 돼지가 여기 한 마리 말고 더 있었나?”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이젠 아예 대놓고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언의 압박에 이예주는 전혀 깨닫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까드득 까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느그 은 븗읐으으…….”

“…….”

“아, 진짜예요! 오는 동안 꽃 밟아서 죽인 적 없거든요!”

“그렇다고 쳐 두지.”

남자가 제가 져 준다는 듯이 관대하게 말했다. 이예주는 주먹을 꽉 다잡았다. 

안 그러면 금방이라도 주먹이 튀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으. 참자, 예주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노니. 

그녀가 그렇게 참을 인(忍) 자를 세 번 새기고 있을 적에 남자가 그녀의 곁을 스윽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잠시 꼼짝 말고 있도록.”

“어, 어! 어디 가요?”

잡을 새도 없이 람이 호수 근처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대뜸 물 위로 발을 드미는 남자에게 ‘수영하게요?’ 하고 물으려던 이예주는 곧바로 목도한 기적에 입을 떡 벌렸다. 

남자의 검은색 신발 앞이 물속으로 스며드는가 싶더니 그도 잠시, 그는 그대로 물 위에 우뚝 서 버렸다. 

그러더니 마치 땅 위를 걷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속도로 휘적휘적 호수 표면을 밟고 걷기 시작했다.

공중 부양이라도 하는가 싶어 걷고 있는 남자의 발을 자세히 살폈지만, 그가 밟는 자리마다 잔잔하던 물결이 요동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에도 남자가 물 위를 걷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졸도했다가 갓 깨어난 상태였기에 이렇게까지 놀랍지 않았다. 

제 맘대로 지진을 일으키고 번개를 번쩍번쩍 내리치는 그였기에 물 위를 걸을 때도 뭔들 못하겠냐 싶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제3자의 시선으로 보니 벌어진 입이 다물릴 줄을 몰랐다. 

인간이 아니야. 이예주는 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이미 알고 있었지만 꼭 새로 알게 된 사실인 양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 예수님이세요? 그녀는 정체가 뭐냐고 그에게 소리쳐 묻고 싶었다. 

호수 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람을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그는 어느덧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천장의 땜빵 자리 밑에 도달했다. 

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수면 때문인지 멀리서 바라본 그의 몸도 빛이 나듯 반짝거렸다.

“……아.”

이예주는 멍청하게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 덜컥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두운 천장 위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빛. 물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남자. 

마치 람에게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남자가 그대로 빛과 함께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까 봐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싸하게 아려 오는 것도 꾹 참고 부릅뜬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람은 허공을 향해 서서히 손을 들었다. 

장신의 남자였지만, 하늘까지 엮여 있는 가시 장벽의 천장은 그런 그가 작아 보일만큼 높은 곳에 위치했다. 

분명 손이 닿을 턱이 없는데. 어쩐지 남자가 손으로 구멍이 난 자리를 쓰다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구멍이 난 자리에 가시 장벽들이 스르륵 새로 자라 엮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정말로 닿은 것처럼. 

사그락 사그락, 조용한 소릴 내며 자라난 가시 장벽은 얼마 안 가 서로의 줄기를 얽어매어 구멍 난 자리를 완전히 메웠다. 

한껏 고개를 쳐든 채 천장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고개를 내려 다시 람을 보았다. 

구멍이 메워져 새어 들어오던 햇빛은 분명 사라졌다. 

그런데 여전히 람의 주변이, 아니 그가 반짝반짝 거리며 빛이 났다. 

너무나도 실재 같지 않은 그 모습에 그녀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말 그에게서 빛이 나는 건지, 아니면 제 눈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만큼 남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 

그래서 가슴이 자꾸 아릿아릿하게 저려 와 그에게서 좀체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홀린 듯이 남자만 쳐다보던 그 순간, 이예주는 언뜻 뺨에 와 닿는 이질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응?”

호수 외의 다른 곳은 적막에 휩싸인 채였다. 주변엔 온통 숲, 나무, 풀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들짐승이 보이지 않은지 벌써 몇 년째라 했다. 

그런데 이 위화감은 뭐지? 눈알을 뒤룩뒤룩 굴려 이쪽저쪽 샅샅이 훑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동쪽 대륙에서 뒤를 쫓던 제드의 시선을 바로 알아챘던 것처럼 이예주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편이었다. 

분명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뭘 찾는 거지?”

그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물 위를 걷는 묘기를 선보이는 것은 관둔 건지, 호수를 빠져나온 남자가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이예주는 괜히 겁이 나서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가 붙었다.

“있잖아요. 여기…… 아무도 없다고 그랬지 않아요?”

그녀가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래. 아무도 없는 빈 숲이지.”

“그쵸? 휴…….”

역시 괜한 생각이었나 보다. 순간 숲에 그들이 아닌 또 다른 이들이 있는 걸까 싶었던 이예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러지? 혹 다른 이가 있는 것을 보았나?”

“아니요. 그냥…… 누가 방금 쳐다보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여긴 너와 나, 단둘뿐이다.”

어쩐지 단둘뿐이라는 람의 마지막 말에 몸뚱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예주는 작게 웃었다. 

나도 참, 동쪽 대륙에서 너무 개고생을 해서 그런지 겁쟁이가 다 되었다니까. 

“에…… 잘못 느꼈나 봐요.”

이예주는 괜히 예민을 떤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누군가 있기는 개뿔,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요한 숲뿐이었다. 

괜히 겁만 잔뜩 먹어 가지고. 그 탓에 다시 호수 위를 걸어 제게로 되돌아오는 람의 모습을 상당수 놓친 것이 그녀는 못내 아쉬웠다. 

람은 그런 이예주를 스쳐 지나가 그녀가 바라보았던 풀숲으로 걸어갔다. 

혹시 뭔가 발견했나 싶어 그가 하는 양을 예의 주시하던 그녀는 그가 마구 자란 풀들을 헤치고 쓱쓱 끌고 나오는 무언가를 보고 탁 맥이 풀렸다.

그가 앞부분을 잡고 끌고 나온 것은 작은 나룻배였다. 

그녀와 같이 이곳에 처음 와 보는 타지인들은 그런 곳에 나룻배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만큼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묘하게 이곳에 익숙해 보이는 람의 모습이 꽤 수상쩍었다. 

그가 나룻배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예주의 뇌리에 문득 별로 달갑지 않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미친놈, 정말 낚시할 생각이야.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좀 거들지.”

그때 한 손으로 거뜬하게 그것을 끌고 나오던 남자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이예주를 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서도 잘만 끌고 나왔으면서 내가 놀면 그렇게 배알이 꼴리냐! 

그녀는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남자의 무서움을 아는 몸이 저절로 움직여 뱃전을 돌아 배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선체에 손을 얹었지만 굳이 이예주가 뒤에서 밀지 않아도 나룻배는 쭉쭉 잘만 끌려갔다. 

그래도 남자의 눈치를 봐서 열심히 힘을 보태는 척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혹시 당신 고향이라든지, 전에 살던 곳이라든지…… 뭐 그런 거예요?”

하지만 남자는 이예주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남자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녀가 힘을 주지 않고 낑낑 소리만 낼 즈음, 그들이 끌고 간 나룻배가 흙 위에 기다란 길을 만든 채 호숫가 근처에 다다랐다. 

람이 옆으로 돌아서 뱃전을 잡고 한 손으로 힘주어 밀자 뱃바닥이 철썩하고 물에 잠겼다.

“저것 가져와.”

이예주의 질문 따윈 가뿐히 씹어 먹은 남자가 마침내 뒤돌아서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뭐, 뭐요?”

“네가 패대기친 가방.”

“지, 진짜로 낚시하게요?”

“그럼 가짜로 해야 하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이예주는 애처로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망할. 남자를 따라오기만 하면 바로 밥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 또 고생하며 생선을 낚아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소과와 물로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저 미친놈이 순순히 밥을 줄 거라 생각했던 제 어리석음에 이예주는 탄복했다.

“빨리 주워 와.”

줍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는 그녀에게 남자가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이예주는 끽 소리도 못하고 되돌아가서 제가 내동댕이쳤던 가방을 주섬주섬 주웠다.

“흐흐흑…… 나, 나는 한 번도 낚시 같은 거 해 본 적 없어요. 물에 들어가는 것도 싫고요……. 이 배 안전한 건 맞아요? 중간에 가다가 막 물 새고 그래서 그대로 죽으면 어떡해요. 다, 당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있겠지만!”

“…….”

“흐어엉, 나는 수영도 잘 못한단 말이에요!”

배와 함께 가라앉는 자신을 물 위에 서서 무뚝뚝하게 내려다보고만 있는 남자가 떠오르자, 이예주는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대며 치를 떨었다. 

“차라리 저는 여기 남아서 먹을 만한 풀이나 과일 같은 걸 찾아다니면 안 돼요? 민물고기는 비린내도 많이 난다고 했단……!”

“잔말 말고 타.”

람이 우는 소리를 차갑게 끊어 내며 일갈했다. 

시뻘건 눈에 담긴 기색이 좋지 않자 이예주는 뭉그적거리던 게 언제였냐는 양 람의 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나룻배 안에 가죽 가방을 내려놓고 제 몸도 배 안으로 주춤주춤 밀어 넣었다. 

1